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풍물굿 1799-1999
북상하는 풍물굿, 남하하는 풍물굿
사람들이 풍물굿에 대해 오해하는 게 하나 더 있다. 풍물굿을 전국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점이다. 하지만 풍물굿은 중부지방을 상한선으로 하여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풍물굿의 역사를 훑어보면, 삼남지방에 생겨나 쌀농사 보급과 함께 계속 북쪽으로 올라간다. 20세기 초반까지 나날이 발전한 남도의 풍물굿이 황해도, 강원도를 거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모내기도 남부지방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계속 북상하였다. 모내기의 보급과 더불어 모내기의 모방고 소리도 북상하였고, 모고의 북소리도 올라갔다. 전라도식의 모방고 소리는 일명 '상사디여'라 부르는데, 충청남도 부여까지 올라가다가 그만 칠갑산을 못 넘고 중간에서 멈추어버렸다. 북한의 민속학자 전장석도 1957년도에 <문화유산>이란 잡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개풍군 광수리 최승록(70세)의 증언에 따르면, 60년 전만 해도 신해방지구에서조차 건파농사를 하였으며, 두레는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홍기문 동지의 증언에 따르면, 북강원도의 농악은 일제 강점 초기에 남조선에서 들어왔다고 하며, 리상춘 동지에 따르면 개성 이북 황해남도에 두레가 파급된 것이 그다지 오래지 않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에는 풍물굿이 제주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논농사 지대가 아니라서 풍물굿이 자생적으로 생겨날 토양이 없었다. 풍물굿은 제주도로 내려가 독특한 걸궁이 되었다. 걸궁은 제주도에서도 성읍을 중심으로 퍼져 있을 뿐 다른 지역에는 없다. 걸궁은 걸립에서 나온 말로 보이며, 걸궁의 구대진사 같은 잡색이나 가락으로 미루어볼 때 호남 걸립굿에서 기원했음이 분명하다. 남도로부터 바다 건너 제주도로의 이 문화적 유입은 20세기 초반에야 이루어진 셈이다.
만물이 운동을 하듯이 풍물굿도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풍물굿 운동은 18-19세기에 남으로 북으로 이리저리 요동치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그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제의 억압과 제것을 무시하고 내다버리는 풍조 속에서 풍물굿 운동도 잠시 숨을 멈추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1970-80년대 이래로 풍물굿은 다시 자기 운동을 시작했다. 풍물굿은 출생부터가 조선 후기 민의 성장이 만들어낸 '근대성' 그 자체였으니, 오늘날까지 힘차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닐까. 되살아난 풍물굿은 바로 우리 문화의 주체성 복원과도 같은 것이다. 축제가 죽어버린 억압의 시절을 이기고 대동굿의 한마당을 열어제친 것이니 그 생명의 끈질김에 새삼 놀랄 일이다. 얼마 전, 북경 아시안 게임 때의 일이다. 남북이 풍물굿을 가지고 합굿을 쳤다. 휴전선을 허물어내리는 합굿, 남과 북이 함께하는 합굿, 그 합굿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열망을 담아낸 통일의 대동굿이 아닐 수 없다. 이옥이 <봉성문여>를 쓴 1779년으로부터 2백여 년이 흐른 1999년, 21세기의 풍물굿은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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