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풍물굿 1799-1999
땅도 땅도 내 땅이요, 조선땅도 내 땅이다!
19세기에 이르면 민란이 터지는 곳마다 맨 앞에 풍물굿이 나섰다. 일제 시대에 농민들이 주재소 앞으로 몰려가 소작쟁의를 벌일 때도, 삼채가락이 이렇게 쏟아져나왔다.
땅도 내 땅이요, 조선땅도 내 땅이다!
그 전통에 따라 1970-1980년대의 어려운 고비마다 굿패들은 똑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도대체 풍물굿에는 어떤 변혁적 역동성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노동의 현장에서 얻어진 힘에서 해답을 구해야 할 듯하다. 애초에는 풍물굿이 악귀를 쫓고 복을 구하던 신앙풍습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모내기 노래를 부르면서 논북을 치던 모방고, 김매기의 두레풍장굿은 가닥이 다르다. 영조 14년(1738년) 11월의 <승정원일기> 881책에 이렇게 적혀 있다.
상이 말하시다. "원경하 어사 때 속공한 것은 모두 사중 기치였는데 지금 이 서계에 민간의 쟁고 기치를 민간에 돌려주자는 요청이 있는데 민간에 이런 물건이 이전부터 있었던가?"
인명이 말하다. "민배 경획때 모두 이 소리로 소리를 내어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경하가 당초 이를 금단한 것은 비록 나라를 위해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해서 취한 것이지만 이것은 지나친 염려입니다. 인심이 이반하면 호미와 고무래, 가시나무 자루가 모두 도둑이 될 수 있는데 어찌 병기 없는 것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것들은 본래 민물이 되어서 갑자기 속공하면 의당 민원이 돌 것입니다."
태량이 말하다. "민물은 결코 속공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할까요?"
상이 말하시다. "복험의 직임이 어찌 조각쇠를 집으로 가져가는 것을 상대할 것인가? 이상스러워 놀라지 않겠는가? 그 깃발은 군문에서 보통 쓰는 것과 같은가?"
태량이 말하다. "모두 쓸모없는 물건이고, 또 이미 백년이 된 민속이어서 금지하기도 어렵습니다."
풍물의 '위험성'이 논란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백년 민속'이란 표현에 주목하자. 앞에서 설명한 1648년 <송도지>의 매귀희로부터 백년을 더하면 1748년이 되니, 위 <승정원일기>의 1738년은 '백년 민속'에 근접한 연대가 아닌가. 옛 사람들이 오래 되었음을 뜻할 때 쓰는 '백년'이란 시간관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야 없지만, 17세기 정도에 풍물굿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음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바로 이 시기는 이앙법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대며, 두레의 역사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하여 그 앞뒤의 맥락이 모두 맞아떨어지고 있다. 이는 풍물굿의 역사가 농민들의 두레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풍물굿은 매귀굿에서 기원하였으되, 노동의 힘겨움을 놀이로 풀어내던 농민들의 일터에서 완성된 셈이다. <승정원일기>의 위 대목을 보노라면, 늘 풍물굿의 변혁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미 이때부터 지배층은 풍물굿에서 어떤 '불온한 기운'을 감지한 게 아닐까. 이후로도 풍물굿의 '불온성'은 계속 이어졌다. 1738년으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이동할 때 영기 뒤에는 꽹과리, 호적, 북 같은 악기가 뒤 따라 다녔다. 농민군은 악기의 차이만 갖고도 자기 진영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 악기와 결합된 연희적인 요소들, 가령 길군악 같은 요소들은 바로 일상적인 생활에서 단련된 것이었지만 유사시에는 군악대의 역할도 했다. 고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때, 주모자들은 1월 10일(양력 2월 15일) 밤 배들평을 중심으로 10여 마을의 풍물굿패를 동원하여 예동에 수천 명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전봉준은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봉기를 선언하고 나서 고부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역설한 다음, 대오를 둘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향한다. 음력 1월 10일은 정초에서 대보름 사이이므로 한창 걸립굿이 벌어질 시기이다. 10여 개 마을의 걸립꾼이 모였으니 1개 마을당 약 30여 명쯤 어림잡아도 걸립꾼만 3백여 명이 모였음직하다. 그 외의 동리 사람을 합하면 수천의 사람이 모였을 터이니 풍물굿패가 범지역적 합굿을 이룬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898년, 한말에 일어난 농민운동의 하나인 영학당 사건의 공초에도 농민군을 동원할 때 풍물을 쳤다는 기록이다. 장에 가는 백성을 모으기 위해 날라리, 꽹과리, 징, 장구가 동원되었다. 이 같은 전통은 일제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풍물굿은 늘 불온시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종교지도자였던 강증산은 어릴 때 풍물가락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증산은 자신이 행한 천지공사를 천하굿이라 불렀고, 풍물장단으로 춤추면서 의례를 집행했다고 한다. 풍물의 대중성을 잘 알려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돌이켜보면 1970-1980년대에도 풍물굿은 시위대를 모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풍물소리만 나면 경찰이 몰려들었다. 방독면을 허리에 찬 '로마병정'들이 굿판을 늘 지켜주었다. 일과 놀이의 한바탕 어우러짐이 변혁이란 토양과 만남으로써 풍물굿은 민중적 진취성을 획득한 셈이다. 그러나 과연 이쯤에서 풍물굿이 완성되었을까. 사태는 조금 더 복잡하다.
벙어리 노인 혹은 노트르담의 꼽추
내가 대보름 때마다 자주 들렀던 부안의 어느 마을에는 벙어리 노인이 한 분 살고 있다. 70년대 초반의 노인치고는 힘이 장사지만 말만 못하는 게 아니라 듣지도 못한다. 행동거지마저 어눌하여 동네 아이들에게조차 놀림거리가 된다. 그런데 동네에서 대보름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대동 걸립을 다니기만 하면 어김없이 그 벙어리 노인이 나타난다. 어디 있다 왔는지 모르게 훌쩍 뛰어들어 신명나게 한바탕 춤을 추는데, 지게목발을 가지고서 추는 막대춤이 일품이다. 평생을 지게목발만 지고 살아온 인생의 한풀이인 양 그 막대춤에는 어떤 달인의 경지가 엿보인다. 그의 보릿대춤은 또 어떤가. 엉덩이를 불쓱 내빼물고 꼽추처럼 등을 숙여 춤을 춘다. 그 춤을 보면 왠지 안소니 퀸이 분한 '노트르담의 꼽추' 생각이 절로 난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삶의 한과 고통이 발산되는 것이랄까.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벙어리 노인이야말로 굿판의 진정한 주역이고, 진짜 '인간문화재'라고 생각하곤 했다.
우리는 흔히 풍물굿을 잘못 알고 있다. 앞에서 이끄는 상쇠나 장구잡이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락을 이끄는 앞치배 못지 않게 뒤에서 흥을 돋우는 뒤치배도 중요하다. 우리의 풍물굿은 아예 뒤치배를 조직적으로 발전시켰다. 뒤치배가 없으면 볼품이 없고 신명이 없어 굿이 이내 깨지고 만다. 뒤치배의 으뜸은 역시 잡색이다. '농촌 탈춤'이랄 수 있는 잡색놀이에서 각시, 양반, 포수 등이 어우러져 거리굿을 연출한다. 공연자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잡색이 무수하게 따라다니는 판굿은 풍물굿이 최고도로 발전한 대동굿판이 된다. 동네 판굿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다 보면 이웃마을로 나서는 본격적인 걸립도 생겼다. 바야흐로 풍물굿이 본격적인 '연예의 길'로 나선 것이다. 풍물굿에는 또 다른 요소도 흘러들어왔다. 장터를 누비면서 연예를 팔며 살아가던 유랑예인집단의 세련된 기예가 풍물굿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예능을 팔아야 했던 예인들의 전문적인 기량은 일반 농민들의 두레풍물굿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사당패가 마을로 들어와 한껏 기량을 과시할 때, 마을 상쇠도 전문적 기량을 열심히 연마하였을 것이다.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아예 남사당을 따라나서기도 했다.
풍물굿패는 군사적인 요소도 흘러들어왔다. 풍물패는 늘 행진곡풍의 질굿(혹은 길굿)을 치는데, 이를 길군악이라 부른다. 길을 가는 군악이란 뜻이니,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을 하던 군사적 풍습이 결합된 것이다. 풍물패의 상징인 농기, 명령전달기인 영기도 바로 조선 시대 군기와 결합된 것이다. 덕수궁 소장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용기, 영기 등의 군기와 풍물패의 농기는 그 모양과 형태가 모두 똑같다. 농민들이 국가적인 위엄을 갖춘 군사 깃발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상징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당시 농민은 그야말로 '향토예비군'으로서 유사시에는 늘 전투원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풍물패를 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풍물굿에는 다양한 진법도 들어와 있다. 진법이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전투진용 아닌가. 군문열기 같은 놀이에서는 완벽한 정도로 진법 변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풍물굿으로 유입되었을 것이 분명한 쇄납은 그 자체가 군악의 중심이기도 했다. 일명 태평소, 호적, 날라리라고도 하는 쇄납은 몽고에서는 'suru-nai', 터키, 페르시아, 인도에서는 'sur-na'라고 하여 아시아에 널리 퍼진 악기다. 일찍이 <악학괘범>에 이르길, "태평소는 본디 군대에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신앙, 노동, 군사, 연예 같은 여러 요소들이 지류처럼 합쳐져서 큰 강물을 형성하여 풍물굿을 완성시켰다. 상쇠덕담의 신앙성, 진풀이의 전투성, 춤과 노래와 노래가사의 총체적 예술성,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쌀농사 현장에서 완성되었으니, 풍물굿의 폭과 깊이는 '장강대하'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민중의 역사 속에서 성장, 발전한 풍물굿도 일제 말기에 '끝장'이 나버렸다. 구장을 앞세운 순사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놋젓가락과 징, 놋사발과 꽹과리를 공출해갔다. 총알공장 혹은 대포공장에서 녹인 징과 꽹과리는 총알이 되고, 대포알이 되어 각각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어떤 놈은 남양군도로 향하였고, 어떤 놈은 북만주로 향하였다. 또 어떤 놈은 일본사람 총구멍으로 들어갔고, 어떤 놈은 징병간 조선사람 대포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조선사람 중에는 마을에서 풍물깨나 치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풍물굿이 약화된 것을 어찌 일제의 탓만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브라스 밴드가 들어와 길군악을 대체하게 되었으며, 장구 소리는 유치하게 여기면서 바이올린 소리는 고급스럽게 보는 식의 그릇된 근대주의, 개화주의가 풍물굿을 경시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심지어 새마을운동도 풍물굿의 보존을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별따세 별따세 하늘잡고 별따세
풍물굿을 이야기하다 보면 흔히 명인들의 계보를 꼽는다. 판소리 계보가 있듯이, 풍물굿도 계보가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견해에 썩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저런 장단을 배울 수야 있었겠지만, 풍물굿은 '모태 신앙'처럼 아기 때부터 온몸으로 체화되어야 제 가락이 나오는 법이다. 요즈음이야 어느 선생님에게 가서 배웠다는 식으로 '주소성명'이 분명할지 몰라도, 예전에야 자라면서 보고 들은 입장단으로 시작되었지 않은가. 악기를 치고는 싶은데 악기에 손대는 것을 막으니 살짝 건드려보았다가 혼이 나서 도망을 치던 아이, 무작정 따라나서서 동네 아저씨 어깨 위에 무동을 타고 넘실넘실 춤을 추다가 그대로 장단이 온몸에 밴 아이, 엄마품에 안겨서 새록새록 잠을 자다가 풍물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 그렇게 배운 아이들에게 무슨 계보가 있고, 스승이 따로 정해져 있었겠는가.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입장단을 익힌다. 풍물굿을 익히는 '배냇짓소리'처럼.
별따세 별따세 하늘잡고 별따세 줄기줄기 물줄기 골짝골짝 산줄기 꽁꺾자 콩꺾자 두렁너머 꽁꺾자
사실 풍물굿은 온몸으로 배워 나가는 것이지만 단순한 가락으로만 배우는 것은 아니었다. 산굽이를 돌아서 고향을 찾아갈 때 먼 들판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던 풍물굿 소리를 생각해 보라. 어찌 보면 징과 꽹과리, 북과 장구와 소고, 날라리는 각기 다른 음색으로 어우러져 신명을 만들어낸다. 각각은 때때로 호흡을 맞추다가 때로는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그 오묘한 음색과 부조화의 조화, 조화 속의 부조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풍물소리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으리오! <악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쇠와 가죽과 대소리의 조화야말로 풍물굿의 음악적 완벽성을 이루는 핵심인 셈이다.
쇠소리는 갱하니, 그 갱한 소리는 호령을 일으키고 호령은 기운이 가득하게 하고 기운이 가득하면 무를 일으킨다. 가죽소리는 훤하니, 훤한 소리는 동하게 하고, 동하면 군중을 진발시키니 군자가 북과 도의 소리를 들으면 장수의 신하를 생각한다. 대소리는 남하니, 남한 것은 합회를 일으키고, 합회는 군중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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