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열녀전 끼고 서방질한다?
수청 들 남자를 원한 전라감사의 부인
옛날에 투기가 아주 심한 여자가 있었다. 지아비가 전라감사로 부임하자 그녀도 따라서 임지로 갔다.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감사는 수청기생을 들였다. 화가 난 감사의 부인은 아랫사람들에게 감영의 통인 중에서 미남을 골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감사가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미남을 데려다가 어디에다 쓰겠소?"하고 물었다. 부인 왈, "공께서는 곧 수청기생을 두어 즐기시면서 어찌 저에게는 수청남을 허락하지 아니하옵니까." 감사는 크게 놀라 기생을 물리치고, 다시는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겠노라고 부인에게 다짐하였다. 일제 시대의 국학자 이능화가 <조선여속고>에 소개한 옛이야기 한 대목이다. 나는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 이야기를 문득 떠올렸다. 화면에는 남창 노릇을 하다가 붙들린 젊은 청년들 열댓 명이 경찰서 바닥에 쭈그리고 있는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방송기자는 천하의 악당을 잡은 것처럼 공격하고 앵커맨은 '말세'라고 혀를 끌끌 찼다. 하루도 빠짐없이 남성을 기다리는 '꽃집'을 찾은 남성들이 파렴치범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또한 그 '꽃집'을 찾은 남성들이 파렴치범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여장부가 당당하게 수청남을 청했다는 옛이야기를 문득 떠올린 것이다. 우리 인류의 가족사를 들추어보자. 배우자 선정에서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던 가장 낮은 발전단계의 혼인이었던 집단혼에서 빠져나온 인류는 서서히 대우혼으로 이행하였다. 대우혼은 집단혼에서 일부일처제로 넘어오던 과도기적 혼인방식으로, 남녀 각기 여러 명 중 '본처'와 '본부'를 갖는 것이었다. 대우혼 단계에 이르러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등 혼인과 핏줄로 연결된 육친의 관계가 명백해졌다. 일부일처제 혼인은 부계제도에 기초한 일부일처제 가족을 출현시켰으며, 또한 그것은 계급사회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엥겔스는 이것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서술하였으며, '가장 심각한 혁명의 하나'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전통적 성관념의 대부분이 조선 시대의 강력한 부계제도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방식의 일부일처제는 강력한 도전을 받아 그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일처제 자체는 그대로 존속될 수밖에 없겠지만 기존의 방식대로 답습될 전망은 흐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간통이 아닐까 한다. 간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합법적인 매춘은 간통이 아니고, 비합법적인 남녀관계만 간통일까. 혹시 신성불가침처럼 모셔온 일부일처제에서는 간통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가 지적했듯이 유럽에서도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간통이 시민계급에서조차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갔다. 사유재산제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던 일부일처제의 모순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행위의 하나로서 간통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일부일처제 사회지만 남성들은 합법적인 매춘, 즉 합법적인 간통을 허락받고 있다. 반면에 여성들은 남성을 위한 매춘의 대상으로만 전락한 데다가 여성들의 간통은 남성들의 간통과는 비할 바 없는 극형을 당하였다. 물론 성의 역사 또한 억압과 해방의 오랜 싸움이었다. 사회적 규범이란 잣대 속에서 체제를 유지하는 거대담론과 인간의 본능에 기초한 개인의 욕망이란, 어쩌면 불협화음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사회적인 선택에 의하여 운명지어졌다. 때로는 그 운명을 거역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간통, 정조, 과부, 개가, 열녀 등의 언어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다. 특히 엄격하기만 했던 조선 시대에는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함부로 언급하기조차 꺼리던 이들 '욕망의 본질'속에서 우리 문화의 숨겨진 상징 이데올로기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자유로운 야합의 시대, 고대사회
<한서> 지리지에는 고조선 여자가 정절을 소중히 여긴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확고하게 성립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서> 부여조를 보면 남녀가 음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다 죽였다고 하였다. 질투가 아주 심하여 사형을 받으면, 그 시신을 국남산에 내놓아 썩게 하였으며 여자집에서 시신을 찾아가고자 하면 우마로만 실어가게 하였다. <북사> 백제조에는 그 형법에 부녀가 범간하면 부가에서 잡아들여 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일단 기록으로만 보면 남자의 범간은 나오지 않고 대개 여자에 대한 처벌규정만 나온다. 그만큼 여성에 남성의 우월적 지위가 확고부동하였으며, 여성의 간통은 남자의 강간보다도 강한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고대사회의 남녀는 어느 정도의 평등성도 보장되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결혼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성립된다"고 하였다. <북사>권 94에서는 고구려 풍습을 심각하게 공격하고 있다. 풍속이 매우 음란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풍속에서는 유녀가 많고 남편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밤이면 남녀가 무리 지어 섞여서 놀고 귀천의 구분이 없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고구려인들은 자유연애를 하는 데다가 남녀관계도 개방적이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오늘날 야합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 야합의 원래 뜻은 남녀가 정식 혼인절차를 밟지 않고 자유의사로 결혼함을 뜻한다. 유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의 결혼은 대부분 야합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비하면 얼마나 자유스러운 결합방식이었던가! <동이전>의 '음란하다'는 표현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지만 그만큼 개방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유녀가 많은 것으로 보여 일부일처제 사회였음도 분명하다. 일부일처제의 보완책으로 유녀제도를 인정하고 있었고, 유녀는 남편 없이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일종의 '프리섹스 전문직'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제가 확립된 사회에서 일부일처제는 애초부터 남성들의 '완벽한 섹스의 자유'와 여성들의 '성적 억압'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들어가는 제도다. 가부장 제도가 강해질수록 매춘제도는 복잡 다양한 성향을 지니며, 일부일처제의 보완책으로 기능하게 된다. 남성들은 합법적인 매춘을 통해 '일상적 간통'을 허락받게 된다. 매춘의 역사는 이렇듯 그 뿌리가 깊은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일부일처제는 남녀평등에 가까울 정도로 여성의 지위를 인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여성들의 처지가 조선 시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 같다. 신라는 어땠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김유신이 김춘추를 유인하여 누이동생 문희와 야합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문희는 오라버니의 묵인 아래 부모 몰래 김춘추와 밀회를 거듭하다가 임신하게 된다. 문헌상으로 보면 임신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지 밀회 자체는 문제가 아니란 해석이 가능하다. 조선 시대에는 생각도 못할 대담한 일이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문호와의 동생 차득공이 왕의 밀지를 받고 전국을 미행하다가 무진주에 이른다. 안길이란 자는 그가 비범한 인물인 줄 알고 처첩 세 명을 불러 "오늘 이 손님과 자는 사람은 평생 해로하리라"고 하였다. 두 처는 거절하고 한 처가 받아들였다. 오늘날 에스키모 같은 종족들 사이에 일부 남아 있는 진객 접대방식으로서의 부인 내주기 풍습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여성은 남편의 권유 아래 아주 합법적으로 '간통 아닌 간통'을 허락받은 셈이다.
신라 시대 간통의 역사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주인공은 처용이 아닐까. 용왕의 아들 처용이 밤새워 노닐다가 들어와보니 침상에 다리가 넷이었다. 자기 처가 외간 남자와 부정한 행위를 하는 걸 목격한 것이다. 처용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아간들 어찌하리오" 하고 체념하며 춤을 춘다. 아내를 빼앗은 남자는 역신으로 나타나지만 이 기록 역시 당대 사회에 간통이 묵인될 수도 있다는 증거물로 채택할 수 있다. 신라 진성여왕은 유모의 남편을 빼앗아 자기 정부로 만들었다. 또한 그가 죽자 미소년 두세 명을 끌어들여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그 같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열려 있었던 당시의 성풍속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여속사를 전공한 김용숙 교수(숙대)는 신라 말 경애왕 때 포석정에서 열린 잔치에 참가한 인물 가운데 비빈, 후궁, 궁녀, 종친, 외척 이외에 내시와 유모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조의 폐쇄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적어도 신라의 여인들은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방적인 생활을 했음이 분명하지 않을까.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지고
고려 시대는 어땠을까. <고려도경>권 23을 보면 여름철에 시냇물에서 남녀 구별없이 옷을 벗고 목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고려사>를 보면 곳곳에서 여자들이 절에 가서 술 먹고 춤 추고 놀아 풍기가 문란함을 지적하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고려도경>에는 아예 '경합이리'라고 하여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진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송나라 사신의 기록이므로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개방적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여성들의 개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임금 중에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김용숙 교수는 이같이 쉽게 헤어지는 풍습이 결국 여성들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자유롭게 이혼하고 결혼한 듯 하다. 조선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고려 시대의 성풍속에 대하여 궁금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고려속요의 활달하면서도 건강한 성 노출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악장가사>에 등장하는 쌍화점을 보라. 쌍화점은 만두집 사건, 삼장사 절간 사건, 우물 사건, 술집 사건으로 이어진다. 쌍화점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다가 회회아비가 손목을 쥔다. 삼장사에서는 주지가 손목을 쥐고, 우물에 물 길러 갔더니 용이 손목을 쥐는 식이다. 고려가요는 "남녀상열지사가 대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려가요의 특색"이란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시작되자마자 그들 시구들은 철퇴를 맞고 만다. 어쨌든 고려 시대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이해하는 데는 고려속요보다 좋은 자료가 없을 성싶다.
당시의 일부일처제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을까. <고려사> 박유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충렬왕 때 원나라의 축첩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때 박유가 나서서 일부다처제를 왕에게 권한다. 그가 임금을 호위하여 연등회를 갈 때 어느 할머니 하나가 나서서 "축첩을 청한 자가 저 늙은이다"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고 서로 전하여 손가락질 하니 온 마을에 붉은 손가락이 다발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박유가 건의한 축첩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유가 뭇여성들의 공격대상이 될 정도로 일부일처제는 그런 대로 지켜지고 있던 것 같다. <고려사>에는, "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부인을 하나만 거느리고 아들이 없는 자도 감히 첩을 두지 않았다"는 대목도 나온다. 고려 시대의 일부일처제에 대해서는 학계에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기왕의 견해는 고려 시대 역시 축첩제도가 발달한 사회로 본다. 그러나 고려사 전공자 허흥식 교수(한국정신문화원)는 몽고의 압제를 받으면서부터 일부다처제가 발생한 것으로 본다. <고려도경>같은 중국 문헌에는 부유한 집안에서 부인을 여러 거느리는 축첩풍속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부 특권계급은 축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첩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려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남녀관계의 균형이 유지된 사회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 시대, 특히 후대로 올수록 사태는 역전된다. 우리들이 지금껏 알고 있는 상식과는 매우 다른 셈이다. 조선 시대 풍습에만 지나치게 매달린 짧은 지식 탓이다.
청상과부에다 마당과부까지
조선의 개국은 남녀평등에 관한 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준비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무리 좋게 해석을 해도 그런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조선 시대 남녀관계의 특징은 '남존여비'와 '삼종'의 악법으로 대표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던 사회였다. 먼저 대표적인 남녀유별 풍습으로 역시 내외법을 들 수 있다. 내외라 함은 남과 여라는 뜻이니, 내외법은 남녀에 관한 법을 말한다. 그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남녀칠세부동석은 남녀가 7세부터 만나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석이라 함은 돗자리, 더욱 좁혀서는 아랫목에 까는 요석, 즉 보료 같은 것을 뜻했다. 한마디로 앉은자리에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또한 삼종지도라 하여 출가 전에는 아버지에게, 출가 후에는 남편에게,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에게 순종해야 했다. 삼종지도의 시절에 내외법은 여자를 구속하는 유효한 불문율로 사용되었다. 쓰개치마를 벗어 던지고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난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차츰 내외법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억압의 뿌리가 깊은 탓에 8.15해방 당시까지도 사회적 통념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엄격한 내외법은 당연히 여성의 외출제한으로 이어졌다. 장옷이나 너울이 발달한 것도 여성의 얼굴 가리기와 관계 있다. 부득이한 경우에 상면이 허락되는 촌수도 부모형제, 시부모 및 백부모, 숙부모, 고모, 이모, 삼촌, 외삼촌 등의 범위였다. 이래서 반보기라고 해서 시집간 새색시끼리 중간 정도 되는 지점에서 만나는 풍습도 생겨났다. 고려 시대에는 사대부의 부녀가 집 밖 출입을 하는 데 아무 탈이 없었다. 심지어 궐문에까지 나아갔으니 외출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와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 여성에 대한 비하는 이혼관례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조선 시대에는 '조강지처'를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것이 사회적 관례였다. 이혼법에 해당되는 성문화된 법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버리는' 폐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었을 뿐, 남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여자를 쫓아낼 수 있었다.
양반계급이 이혼출처하여 여자를 내쫓으려면 꽤나 까다로워서 임금께 상세히 아뢰어 명을 청해야 했다. 상민층에게는 사정파의, 할급휴서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사정파의란 부부간에 만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 결별 이유를 밝히고 그 사정을 밝히는 것이다. 할급휴서란 이혼문서가 따로 없으니 이혼할 때에 지아비가 아내에게, 또는 아내가 지아비에게 윗옷깃의 한 자락을 가위로 잘라주는 불문법이었다. 그 밖에는 이혼은 아니더라도 소박을 주는 방식도 있었다. 아내가 지아비를 마다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내소박, 지아비가 아내를 돌보지 않음은 외소박이라 하였다. 홀로 된 여자의 거취도 문제였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 시대에 인간으로서 가장 못할 짓을 한 것이 바로 과부 재가금지가 아닌가 한다. 더욱이 젊어서 청상과부가 된 여자들이 한을 생각해 보라! 과부의 재가금지는 고려 말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고려말의 신유학파는 과부 재가금지를 법령으로 정비하였다. 벼슬을 한 사람의 처로서 과부가 된 자는 3년 동안 재혼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법이 일반 서민에게까지 미쳤다고 볼 수 없다. 조선에 이르면 개가한 자의 자손에게는 현직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자손대대로 벼슬을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강화된다. 태종 6년 사헌부 대사헌 허응 등이 시무 7조를 올린 적이 있다. 대소양반의 정처로서 세 지아비를 섬긴 자는 자녀안에 올려 부도를 바로잡자고 건의한다. 성종 8년에는 부녀의 재가를 막는 명을 내리어 재가한 집안 자손의 벼슬 천거를 금지시키는 내용을 율령으로 선포한다. 이렇게 날로 강화되니 애초에는 사대부 집에서만 실시하던 재가금지가 서민층에까지 풍미하게 된다. 그 결과 빈궁하고 의탁할 길이 없는 여자들까지 재가금지에 묶여서 고난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과부 중 가장 '억울한 과부'는 혼약만 하고서 성례도 못한 채 신랑감이 죽어서 평생 수절을 해야 했던 '마당과부'였다. 청상과부보다 더 억울한 처녀과부였던 셈이다. 혼례청이 차려진 마당에도 서보지 못했으니 그 한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으랴. <해동야서>를 보면, 시전 상인었던 시아버지가 처녀과부가 된 며느리에게 개가를 권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음양의 이치를 널리 깨닫고 있던 상인은 며느리로 하여금 권생이란 선비와 성관계를 맺게 한다. 상인은 권생이란 남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자식이 열다섯에 혼인해서 미처 합궁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저 애가 금년 나이 스물넷으로 명색이 성혼은 했다지만 아직 음양의 이치를 모르는지라, 항상 제 심중에 측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릇 천지간에 사는 만물이 제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모두 음양의 이치를 알고 있는데, 저 애만 유독 모르는 고로 내 매양 개가하기를 권하였습죠만, 저 아이 말이 만약 딴 데로 살러 가면 늙은 이 몸이 의지 할 데가 없다고 끝내 듣지 않는군요."
정을 통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여주인공을 자살에 이르게 함으로써 소설은 당대의 봉건성 탈피에서 일보 전진에 머물고 마는 제한성을 보여준다. 작가인들 여주인공을 자살시키고 싶었겠는가. 갈등하는 '마당과부'의 방황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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