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도깨비, 벽사상징의 원형질
민중성을 획득한 도깨비 이야기
<용재총화>를 쓴 성현의 외숙인 안부윤이 젊었을 적 이야기다. 파리한 말을 타고 어린 종 하나를 데리고 서원 별장으로 가는데 10리쯤 가자 캄캄한 밤이 되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없더니 동쪽 현성 쪽에서 횃불이 비치고 떠들썩하여 유렵하는 것 같았다. 그 기세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좌우를 삥 두른 것이 5리나 되는데 빈틈없이 모두 도깨비불이었다. 공이 진퇴유곡 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직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7-8리를 나아가니 도깨비불이 모두 흩어졌다. 하늘은 흐려 비가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는데, 길은 더욱 험해졌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귀신이 도망간 것을 기뻐하여 공포심이 진정되었다. 다시 한 고개를 넘어 산기슭을 돌아 내려가는데 앞서 보던 도깨비불이 겹겹이 앞길을 막았다. 공은 계책도 없이 칼을 뽑아 크게 소리치며 돌입하니, 그 불이 일시에 모두 흩어지더니 우거진 풀숲으로 들어가면서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었다. 공은 별장에 도착하여서도 마음이 초조하여 창에 의지한 채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비복들은 솔불을 켜놓고 앉아서 길쌈을 하고 있었다. 공은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함을 보고 큰소리로, "이 귀신이 또 왔구나"하며 칼을 들고 치니, 좌우에 있던 그릇들이 모두 깨지고 비복은 겨우 위험을 면하였다.
이 도깨비불 이야기를 보면 성현이 살던 16세기 초반에도 도깨비 이야기 구조는 오늘날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산길 모퉁이, 날이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도깨비가 출현하는 것도 지금과 같다. <용재총화>의 도깨비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도깨비 이야기는 널리 퍼져 민중 속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권력자의 무덤이나 사찰 같은 귀족문화를 치장하던 도깨비들이 어느 시기엔가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내려온 것 같다. 도깨비 이야기의 첫 문헌 정착이기도 한 <삼국유사> 진평왕조를 보면, 비형이라는 도깨비 두목이 하룻밤 사이에 신원사 도량에 큰 다리를 놓아, 귀교란 다리 이름이 붙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청송군 부남면 화장동에도 '도깨비 다리'라는 신비한 돌다리가 있다. 중국설 화집인 <유양잡조>에는 도깨비 방망이류 설화가 신라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도깨비 이야기가 후대에 널리 퍼지고 발전한 결과이다. 민중의 입과 입을 통해 이러저러한 내용이 첨가되어 도깨비 이야기는 날로 풍성해진다. 역사적 상상력이 허락된다면, 대략 조선 후기 민중의식이 솟구치던 시절, 장승 따위가 나름의 정형성을 획득하고 이른바 민중적 예술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여러 장르의 서사적 구조가 정착되면서 도깨비도 새롭게 태어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오늘날 도깨비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들도 연원은 멀리 고대사회로 이어짐이 분명하나, 지금 같은 기름진 토양을 확보한 것은 역시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가 아닌가 한다.
그럼 도깨비 이야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도깨비 방망이'는 대단한 효력이 있어 가히 요술 방망이라 할 만하다. '도깨비 잔치'는 흥겨운 신명의 흐드러짐이 엿보인다. '도깨비가 오실 만한 날'이라면 무언가 흐릿하고 스산한 날이다. "도깨비불에 홀린다"는 뜻에는 시골 밤길에 떠도는 불빛이 연상된다. 김종대 박사는 도깨비 이야기 3백여 편을 분석하여 도깨비 방망이 얻기, 도깨비를 이용해 부자 되기, 도깨비와 대결하기, 도깨비에게 홀리기, 도깨비를 보기, 도깨비 은인 되기, 도깨비가 암시하기, 기타 유형을 여덟 가지로 분석, 정리했다. 하지만 이야기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 곤란할 정도다. 도깨비는 출발 자체가 벽사수호신이었기에 여느 사악한 잡귀와는 다르다. 도깨비는 어떤 귀신일까. 주자는 말하기를, "이르러 펴는 것은 신이 되고, 돌이켜 돌아가는 것은 귀가 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은 <담헌서>에서"하늘을 신이라 하고, 땅을 지라 하고, 사람을 귀라 하나 그 실은 하나다"라고 하였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과 죽은 사람의 혼백도 하나로 보았다. 귀신을 이기의 영능으로 보았기에 신은 이가 아님이 명백한데도 이로서만 귀신을 말함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홍대용이 지적한 바대로 이만을 가지고 귀신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홍대용이 살던 시절에는 아직 이익이 생존하고 있어 실을 숭상하고 용을 힘쓰는 많은 이들이 이익을 따르고 있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귀는 음의 영이고, 신은 양의 영이라고 보았다. 이익도 음양이 하나이기 때문에 귀와 신도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도깨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추측컨대 큰물이 져서 산이 무너지고 언덕이 없어졌다는 그 시대에 사람과 귀신이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면 사람을 해치는 도깨비도 많았을 것이다. 그 중 제일은 사람에게 걱정되는 것은 이매 망량이란 것인 바, 공자도 이르기를, "나무와 돌로서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이 기와 망량이다"라고 하였다. 대제 이 망량이란 따위는 나무로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이 많다.
도깨비는 실제로 '괴상한 짓'을 많이 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인간에게 해코지만 하는 미물은 아니다. 허깨비가 몹쓸 환상이라면 도깨비는 쓸 만한 환상이다. 쓸 만한 환상은 꿈을 불러일으키고, 그 꿈은 문화를 다채롭게 한다. 꿈을 불러일으키는 도깨비가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었던 조선 시대에는 구전문학도 르네상스를 맞았음을 상기해 보라. 도깨비는 아무때나 출몰하지는 않는다. '낮도깨비'란 속담이 있듯 정상적인 도깨비라면 밤에 나타나야 한다는 규정성도 지닌다. 밤은 성스러움이고, 음지이며, 습한 것이다. 바위나 나무 같은 자연물이 도깨비로 둔갑하여 사람을 홀린다. 한낮에는 숨이 있다가 해가 지면 슬그머니 걸어나와 길손을 유인한다. <용재 총화>를 보면 도깨비가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의 전형성을 잘 드러내준다.
도깨비는 아예 형체가 없기도 하다. <어우야담>에 도깨비집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가 무너진 후, 송도에 빈집이 있었는데 도깨비가 나온다 하여 아무도 그 집에 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상인이 그 집을 싸게 샀다. 절구질을 할 때마다 벽에서 소리가 나기에 벽을 허물어 안을 보니 온갖 금은 보화가 있었다. 글도 있었는데, 고려의 환관들이 난을 만나서 보화를 감추고 벽을 이중으로 했다는 것이다. 벽의 일부가 비었으니 울리는 소리가 나서 도깨비 소리로 여긴 것이다. 이처럼 도깨비는 형체 없이 소리나 빛으로만 출몰하기도 한다. 지금도 흉갓집으로 알려진 도깨비집이 신문 지상에까지 화제로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가 아닌가. 또한 도깨비는 변신에 능하다. 옛사람들은 손때 묻은 빗자루나 부지깽이, 절구공이 등이 도깨비로 변할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 김학선은 설화를 분석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물건 도깨비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밝혔다. 사발 도깨비, 종지 도깨비, 쟁반 도깨비, 망치 도깨비, 낫 도깨비, 꽹과리 도깨비, 징 도깨비, 부지깽이 도깨비, 솥 도깨비, 주걱 도깨비, 도리깨 도깨비, 멍석 도깨비, 짚신 도깨비, 나막신 도깨비, 달걀 도깨비, 방울 도깨비, 갓 도깨비, 메주 도깨비...... 왜 하필이면 손때 묻은 빗자루 따위일까. 사람의 손때가 묻었다는 것은 사람의 기가 물건에 전해져 영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도깨비가 될 수 있으니 일종의 변신인 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러한 물건들은 반드시 태워 없애는 습관이 있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도깨비의 발생을 논하면서, 물건에 영력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주물신앙과는 판이하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도깨비로 생성되는 과정을 중시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 판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인 셈이다. 이 점을 보면 어떤 인간 중심적 사고가 돋보이는 것 같다.
도깨비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고는 도깨비가 멍청한 짓을 자주 한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똑똑한 체하다가 당하고 마는 도깨비, 아니면 약은 꾀로 도깨비를 이용하다가 당하고 마는 사람, 도깨비가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허점을 드러낸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적이다.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하고, 미녀를 탐하고, 수수팥떡을 좋아하고, 시기와 질투도 있고 멍청하기도 하다. 우리들 인간사의 파노라마와 다를 바 없다. 마실을 다녀오다가 도깨비와 밤새워 씨름을 겨루었는데 날이 새고 보니 애꿎은 빗자루 몽둥이를 껴안고 씨름 벌이고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 돈을 빌려주었더니 매일 돈을 갚으러 와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혹부리와 도깨비 방망이를 바꾼 이야기 등 도깨비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일본이나 중국의 귀신과는 달리 결코 잔인하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도깨비를 위한 집단적 의례
도깨비는 이야기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의 굿으로도 전승되었다. 진도에 가 보면 도깨비굿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권에 소개한 바 있다. 마을에 어려움이 닥치면 여자들이 나서서 도깨비굿을 행한다.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든다거나 전염병이 들어 액운이 닥쳐오면 여성들 특유의 주술을 통하여 액을 물리치고자 한다. 마을 남자들이 방안에 틀어박혀서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 동안에 가면을 쓴 마을 여자들이 긴 장대에 여자들의 월경서답을 내걸어 휘젓고 다닌다. 은밀한 부분을 공개하여 악귀에 대항하고자 하는 벽사의례의 한 전형이다. 남도에서는 매년 2월 초하룻날 도깨비굿을 쳐서 도깨비를 가두어 두었다가 농사철이 지난 다음인 중구날에 다시 도깨비를 풀어주는 도깨비제를 행하게 된다. 도깨비굿이 벌어지면 동네가 한 바탕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이처럼 도깨비는 주술의 대상으로서, 인간에게 해코지를 해서는 아니되는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는 것이다.
서해안에서는 도깨비참봉 혹은 물참봉이라는 도깨비에게 고사를 지낸다. 주로 선착장 주변에 살면서 어민들을 도와준다고 하는데 형체가 알려진 바는 없다. 고기 싣고 오는 갯가의 뱃머리에 사는 까닭에 갯가의 나물을 참봉나무로 정해두고 간단한 고사를 올려준다. 바다의 큰 신에게는 일 년에 한두 차례 큰 뱃고사를 하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지만 참봉을 풀어먹이지 못하면 심술이 나서 온갖훼방을 놓는다는 것이다. 대개 밥덩이나 떡 같은 제물 약간을 물가에 뿌려서 참봉을 달래준다. 현재는 거의 사라졌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해안 일대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도깨비 참봉 고사이다.
조기 떼 우는 소리에 밤잠을 못 이루었다는 칠산 앞바다 위도에 가면 띠뱃놀이를 볼 수 있다. 풍어제를 끝낸 칠산어민들이 짚배를 만들어 제물을 싣고 도깨비 여럿을 선원으로 태워 보낸다. 망망대해로 나간 이들 도깨비 선원들은 어부들의 뱃일도 도와주고 조기 떼도 몰아준다. 학자에 따라서는 도깨비가 아니라 수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도깨비영감, 도깨비참봉이 집안을 지켜주거나 물고기를 몰아다준단다. 도깨비가 집안의 수호신인 일월조상, 어선의 선신, 부신, 대장간의 신, 마을 당신 등으로 등장한다. 특히 제주도 도깨비는 부신으로 멸치와 갈치를 몰아다 주는 풍어신이 되고 있다. 도깨비가 수수떡과 수수밥을 좋아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것들을 차려 놓고 도깨비를 풀어먹인다.
반면에 제주도 도깨비는 변덕도 심하고 사람들에게 골탕도 잘 먹인다. 심지어 병을 일으키게까지 한다. 영감놀이는 도깨비신이 범접하여 일어난 병을 치료하는 굿이다. 이 굿은 병을 고치는 의례로써 행할 뿐 아니라 어선을 새로 지어 선왕을 모셔 앉힐 경우나 마을신에 대한 당굿으로서도 행한다. 도깨비의 변덕을 달래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감굿은 밤에 행하는데 제주도 무당인 심방이 신을 청하면 영감신으로 분장한 심방이 등장하여 연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어두운 밤에 얼굴을 가린 도깨비들이 횃불을 들고 나오는, 참으로 재미있는 연극 한 토막인 셈이다. 이처럼 도깨비는 굿판, 연극판에서도 전승되어 왔다. 의례로 표현된다는 말은 의례에 동참하는 대다수 성원들의 암묵적 합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조선 후기에는 의례에 도깨비가 주인공으로 등장, 집단적 벽사상징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의례에 등장한 도깨비들은 벽사적 기능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다 서민적이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컴퓨터 그래픽에서 왜색 도깨비를 몰아내자
오늘날에도 도깨비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고 창작하여 널리 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도깨비 방망이가 열쇠 마스코트로 나오는 등 도깨비는 여전히 생활 속에 살아 있다. 심지어 상품광고에도 등장하고 현대화가는 그림의 소재로 즐겨 이용한다. 도깨비가 우리 문화의 대중적인 상징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도깨비는 천년의 시공을 건너 불현듯 도깨비불같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들의 상상, 허구, 이미지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 그러나 말이다. 일본의 오니(혼)가 우리 도깨비로 둔갑하여 동화책과 텔레비전을 장식한다. 아이들은 오니를 우리 도깨비로 착각한다. 이렇게 된 연유는 일제 식민지 시절에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잘못 배운 지식을 그대로 전수시켜준 데 1차적인 책임이 있다. 도깨비까지 왜색이라니! 일본의 요괴와 우리의 도깨비를 자꾸 연관짓는 것보다는 장주근 교수(경기대)가 <배서낭과 도깨비>란 글에서 지적했듯이 오키나와 요괴인 기지무나아를 비교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기지무나아라는 말 자체는 오키나와의 사투리로 나무의 정령이란 뜻이다. 더펄머리의 동자형으로 고목에서 살기도 하고, 고기잡이의 운을 빌어주고 고기를 몰아다주며, 밤중에 자는 사람을 타고 앉아 장난을 치기도 하고, 부르면 달려와서 밤길에 불을 밝혀주고, 씨름을 좋아하여 밤에 사람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등 우리 도깨비와 상당히 흡사하다. 우리 20세기 말의 사람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도깨비를 도깨비 역사에 추가시켰다. 21세기에는 도깨비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21세기의 도깨비들이 우리 사회의 모든 악을 물리치는 상징물이 되길 빌며 왜색 도깨비의 추방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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