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매향의 비밀문서를 찾아라
삼일포 매향비는 어디에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 금강산 삼일포에 강릉도 존무사(관찰사) 김천호를 비롯하여 강릉부사 박흥수, 판관 김관보 등 동해안 일대의 지방관리들이 승려 지여와 함께 모였다. 의관 정제하고 먼길 마다않고 식전부터 모인 것을 보면,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 법하였다. 석수장이 하나가 지게에 비문 하나를 지고서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김천호는 아무 말 없이 넌지시 배를 가리켰다. 비문이 먼저 배에 실렸다. 그리고 김천호를 비롯하여 박흥수 등이 차례로 배에 올랐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지여가 날짜 하나는 참으로 잘 잡았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으나 좌중은 묵묵무답. 아무도 응답할 분위기는 아닌 모양이다. 배는 서서히 노저어 갔다.
"단서암에 배를 대게."
김천호는 단호히 말했다. 삼일포 호수 안에 있는 네 개의 섬 중에서 단서암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단서암을 선택한 이유는 남달랐다. 단서암에는 신라 화랑들이 삼일포를 다녀간 기념으로 썼다는, '술랑 일행이 남석을 다녀가다'라는 여섯 글자가 남아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미륵의 당래하생을 서원하면서 은밀하게 찾아들던 비밀스런 곳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곳이기에 지게에 지고 온 매향비를 세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호수가 가로막고 미륵도들이 성스럽게 여기고 있는 곳이니, 누근들 이 매향비를 함부로 옮기지는 못하리라' 하면서.
위 글은 일제시대 삼일포에서 발견된 삼일포 매향비의 40행 369자를 풀어서 매향비 세우던 광경을 추리해본 것이다. 당시 강원도 각 포구마다 향나무를 베어 물 속에 넣은 뒤 그 증표로서 삼일포에 매향비를 세웠다. 매향비가 건립된 1309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349년 가을, 이곡이 그 삼일포를 다시 찾았다. <죽부인전>의 작가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올라가 있는 이곡은 <동문선>에 전해지는 <동유기>에 이렇게 썼다.
초4일에 일찍 일어나 삼일포에 이르렀다. 포는 성북 5리쯤에 있는데, 배에 올라 서남쪽 조그만 섬에 이르니, 덩글한 큰 돌이 있다. 그 꼭대기에 돌벽장이 있고, 그 안에 석불이 있으니, 세칭 미륵당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곡이 찾아갔을 당시에는 매향비뿐 아니라 석불도 있었고 미륵당도 있어, 미륵신앙의 '메카'였음이 틀림없다. 그뒤로도 매향비를 직접 보았다는 기록은 곳곳에 있다. 배를 옮겨 대고 사선정 남쪽의 작은 바위 봉우리에 오르니 짤막한 갈이 있는 데 마멸되어 글자를 볼 수가 없었다. 이를 세상에 전하기를 '미륵 매향비'라고 한다.
농암 김창협(1651~1708년)이 1671년 여름에 금강산에 갔다가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호수의 섬에 들려 남긴 글이다. 박종(1735~1793년)이 1767년 경주 구경을 떠났다가 삼일포에도 들려서 쓴 기록인 <동경기행>에도 참향비라고 하여 향을 묻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단서암에 올라 침향비를 보고는 배를 타고 오른쪽 언덕에 이르러 걸어서 솔숲을 빠져나와 돌아보니, 중은 노를 저어 돌아가고 있는데 풍경이 한적하기로는 그만이다. 이처럼 삼일포 매향비는 후대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던 비석으로 조선시대 사람들만 해도 누구나 매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위당 정인보(1893~1950년) 선생이 금강산을 다녀오며 기술한 증언이 있다. 관동 해안에 향 묻은 곳이 많으니, 이는 불사라, 미륵하생할 때같이 용화회에 나게 해달라는 발원이라 한다. 호수 위에 매향비가 있었으므로 근재의 단갈사제의 시어가 이를 이름이다. - 조선일보 1933.8.3~9.7 연재
매향비가 세워지던 충선왕 원년이면 고려가 저물어가던 시기가 아닌가. 숫처녀와 내시를 바치는 등 원나라의 횡포에 나라가 어지러웠고 불교의 타락상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시 불교가 보여주었던 그릇된 행실을 새삼 탓해서 무엇하랴. 그러한 시대에 동해바다 변방에서 지방관리들에 의하여 매향의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당시 민중의 염원을 형식적이나마 풀어주려는 노력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삼일포 매향비는 1926년에 일본인 등전량책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 뒤 막상 매향비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단지 그가 탁본한 비문만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어떤 경로로 이 매향비가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높이 60cm, 가로 30cm, 세로 23cm에 불과한 작은 비였으니 집어 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모두 함께 그 섬으로 가서 옛일을 되새기며 용화회를 기다리던 당대 민중의 서원이나마 느껴볼 일이다.
침향의 비밀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스런 서원이 담겨져 있는 매향비란 무엇일까. 매향비른 글자 그대로, 향을 묻고 미륵 오기를 기원하면서 세운 비문이다.
우리나라 불교사의 수수께끼? 바위에 글씨로 새겨진 비밀문서? 미륵세상을 찾아가는 해법... .
이 모든 의문의 열쇠가 매향비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라가 좁다보니 비밀스런 것이 별반 없는데 반하여, 매향비는 우리들의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더해주는 탐구대상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매향비문을 보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현장을 찾아나선다면 실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삼일포 매향비문에는 삼척현 맹방촌에 향나무 15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맹방촌은 오늘날의 동해안 맹방해수욕장에 해당되며, 산봉우리가 아름답게 솟고 백사장이 좋아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삼일포 매향비에서 지적한 맹방에 가면 지금도 매향의례에 대한 촌로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매향비는 모조리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다년간 매향의례를 연구해온 공주대학교 이해준 박물관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교수는 예의 말투로 이렇게 되물었다.
"주 선생, 기지시 줄다리기 알지?" "느닷없이 왠 기지시?" "기지시 줄다리기에서 비녀목을 매년 물에 담가두었다가 쓰는 이유를 알겠어? 그게 바로 침향을 재활용한 것이여."
바닷물이나 개펄에 오랜 세월 향나무를 담가서 침향이 되면, 강철같이 단단해져서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 충남 당진의 기지시 줄다리기에서 해마다 비녀목을 수렁에 담가두었다가 꺼내 쓰는 이유도 같은 이치다. 수천 명이 줄을 당겨도 암줄과 숫줄을 이어주는 비녀목이 부러지는 경우는 없었다.
향 자체의 비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찰에서 피우는 향은 늘 그을음이 생기므로 해마다 불상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침향은 그을음이 없어 귀하게 친다. 침향은 약재로도 쓰인다. 부적에 영험이 있다고 믿듯이, 어떤 과학성보다는 침향 성분의 신성성에 기대어 고급 약재로 인정된 것 같다. 침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는 사리함에서 잘 드러난다. 겉은 금동으로 감싸져 있고, 안에는 옥함이 있다. 그리고 옥함을 열면 사리와 직접 닿는 부분은 침향으로 되어 있다. 명품이라고 부를 만한 목재 불상 중에도 그 딱딱한 침향을 파서 조각한 것들이 다수 있다. 침향을 예사롭지 않게 대했던 옛 사람들의 경외심이 배어나온다.
개펄에 묻어둔 향목은 침향이 되면 물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이무기가 천 년이 되면 용으로 승천하듯이, 단순한 향목도 침향이 되면 '승천'한다. 미륵하생을 기다리는 민중들에게 침향의 상승은 바로 새로운 세상의 떠오름이 아니었을까. 매향비는 강물과 바닷물이 함수하는 개고랑에서 미륵을 기다리며 집단적으로 서원하던 당대 민중들의 장엄, 그 자체를 웅변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침향만 가지고는 '왜 바닷가의 민중들이 주로 매향을 했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도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매향비, 혹은 민중의 염원
서해바다 당진땅 안국사지에는 거대한 배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향을 묻었다는 기록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당진에서 조금 내려온 서산 해미읍성에서도 세종 9년(1427년) 지역민이 주동이 되어 미륵당래를 기원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진 해미 매향비가 발견되었다. 고창 선운사 일대에도 매향처가 있는데 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갯벌 속에서 향나무가 나왔다고 한다. 마침 이곳 출신 서정주 시인은 <천년을 가늠한 간절한 소원 - 선운사 침향>이라는 짧은 글에서, 산골을 흘러내리는 육수가 바다에서 산협을 기어올라오는 조수와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을 집어넣어 가라앉혀 두면 그게 침향이 된다는 것인데, 시간으로는 이건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에 그 향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 적어도 200~300년, 길게는 천 년 넘게 집어넣어 두어야만 향이 된다고 하니, 이것을 여기 집어넣던 이들은 자기가 살아서는 물론, 자기 아들이나 손자에게 써내 쓰게 하려고 이걸 이런 데 물 속에 집어넣어 둔 것은 절대로 아니다. - 조선일보 1977년 7월 16일자
실제로 인천강에서 건진 향목을 구해다가 선운사 대법회에서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바로 그 인천강은 이름난 풍천장어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전국에 이름을 떨치던 풍천장어는 사라지고 없으나, 그 옛날 풍천장어들은 침향된 향나무에서 뿜어내는 향내를 맡으며 자랐으니 남다른 향미를 가졌던 것일까. 고창 바로 밑인 영광의 법성포에서도 매향비가 발견되었다. 더 밑으로 내려가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영암군의 엄길리에 가면 쇠바위라 부르는 작은 바위산이 들판에 우뚝 솟아 있다. 우뚝한 바위들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바위 형태가 흡사 여성의 '그것'처럼 움푹 들어갔고 가운데는 나무가 웃자라고 있다. 바위가 갈라진 틈새로 덤불이 우거져서 접근을 가로막았다. 600여 년이 넘는 세월, 잘 보존되어 온 연유를 거제서야 깨달았다. 막상 육안으로 보면 쉽게 보이지 않으나 탁본 결과 암벽의 한쪽 벽에 총 18행 129자가 음각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충목왕 원년(1344년)의 기록이다. 해남의 맹진 바닷가에 이르면 예로부터 보물 내력을 담은 글자바위가 있다고 믿어온 만대산이 나타난다. 글자바위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으며, 바위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가면 서족 벽면에 희미한 글자가 나타난다. 역시 매향에 대한 기록이다. 하찮은 전설일지라도 유의만 하면 매향비를 찾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다. 남해바다 장흥땅의 삼십포가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세워진 장흥 매향비(1434년)는 가로 세로 높이 각 4m 정도의 정방형 바위에 이렇게 비문이 적혀 있다. '천인이 같이 서원하여 향을 묻었다'라고. 대단히 서투르고 엉성한 글씨. 배운 자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신안 앞바다 암태도에서도 매향비(1405년)가 속속 발견되었다. 목포대학교 암태도 학술조사단에 의해 비석거리라 불리는 개활지에서 발견되었다. 경상도로 접어들어 남해고속도로 부근의 사천군 홍사리에 가면 1970년대에 일직이 발견된 사천 매향비가 있다. 고려 말 우왕 13년(1387년) 사천의 지방민 4,100여 명이 모여 세웠다. 당시 인구수에 비하면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갯고랑에 모여서 미륵하생을 서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의례의 장엄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렇게 동해안만이 아니라 서, 남해안에서도 매향비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전국의 해안 곳곳에서 매향의례가 있었다는 말이다. 매향은 대체로 말단 지방사회를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발원자들이 느끼는 현실적 위기감을 반영한 민간신앙에서 나왔다는 점으로 보면, 어떤 시대적인 위기감이나 전환기에 처한 지방민의 동향, 그 자체였다. 심리적 불안감에서 나온 집단적 제의, 그리고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이 투영된 것이다. 중앙권력이 덜 미치는 바닷가는 늘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이런 어수선한 세월에 평화와 안녕을 담은 절절한 염원을 미륵불에 의탁하여 집단적으로 서원했다. 여기에 용화세계를 꿈꾸던 미륵도들의 비밀결사의례가 결합, 기존의 세계와 질서에 대한 변혁의지까지 담았다. 말단 지방수령들조차 이 대열에 참여했던 것은 그런 민중적 요구가 광범위했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현존 매향비의 태반이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가 남아 있다. 매향비는 흡사 해적들이 남긴 '보물지도'처럼 미륵신앙이나 밀교의 비밀과 맞닿아 있다. 사천 매향비를 제외하고는 비문의 글씨가 워낙 소략하여 전모를 알기가 어려운 데다가 왜 하필 매향으로 그 집단적 염원을 담았을까 하는 점이다.
팔금도의 매향비를 지명수배하며
매향비 자료를 이리저리 구하다가 문헌 하나를 찾게 되었다. <세종실록>(15권)에 보면 세종 4년(1422년) 2월 29일, 침향을 찾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의 전모는 이렇다.
태상왕이 성균 직강 권극화를 보내어 나주의 팔흠도에서 침향을 캐게 하다. 이보다 먼저 극화가 나주 군수로 재임시에 염분을 살피기 위해 팔흠도에 이르렀다. 자그마한 비가 풀 속에 있어, 비명에 대체로 이르기를, '통화 20년, 중과 속인의 향도 300여인이 침수향을 만드는 일로 충현 정남방 백보 지점에 있었는데, 그 기간은 100년까지'라고 하였다. 극화가 그런 내용의 글씨를 써서 올렸으므로 사람을 보냈더니, 마침내 찾지 못하고 돌아오다.
요나라 연호인 통화 20년이면 1002년이며, 고려조로 따지면 익종 5년. 팔흠도는 지금의 신안군 팔금도. 신안 앞바다에서 중과 속인 향도 300명이 무리지어 침향의례를 행하였다. 권극화는 1422년보다 이른 시기에 나주군수를 지낼 적에 매향비를 발견하였으니, 약 400여 년 뒤에 매향비가 풀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발견된 여러 매향비들이 제시하는 연도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000년대에 이미 매향의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결론인데, 문헌상으로는 가장 앞선 시기가 아닌가 한다. 호남 일대 지방관인 권극화가 직접 매향비를 발견하였다고 하니, 세종실록의 기록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매향비는 이제껏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금 팔금도에 간다고 하여 이 매향비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 비문이 파괴되지만 않았다면 섬 어딘가에 여전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팔금도에 갈 일이 있으면, 부디 매향비를 찾아보시길! 미륵에 의탁하여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민중들의 삶의 증거물인 이들 금석문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가 전체상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곳곳에 숨어 있던 매향이 그야말로 '말법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미륵불시대가 오면 그 비밀스런 자태를 드러낼까. 이제 우리들도 매향비에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가득 쏟아부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바닷가에 가서 글씨가 씌어진 비문을 발견하면 누구든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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