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프로이트 - 김정일
1장 진료실에서 쓴 프로이트 심리학
성의 억압과 인간 문명의 발달
사춘기의 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중고생의 성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소 해 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성장에 따라 성에 대한 관심도 달라질 텐데, 학생은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는 단계이며, 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성에 대해서 감추려고만 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의 발달은 성의 억압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활발하고 무분별한 성을 억압함으로써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돌려서 문명이 발달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저는 간단히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태고 때 인간이 처음 집단을 이루며 살 때는 성이 참으로 무차별했을 것입니다. 근친상간이 성행하고 성 때문에 친족이나 동족을 살해하는 일도 빈번했겠지요. 그래서 원시인 주에 연장자들은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아무래도 귀찮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기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래서 자식이 부모와 섹스하면 안 된다든지 형제 자매끼리 섹스하면 안 된다든지 하는 규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규칙은 처음에는 가족에서 시작되어 점점 친족, 부족으로까지 넓혀졌겠지요. 지금도 남아 있는 원시 종족들은 그들의 계율에 따라서 간통한 자들에게는 엄격하게 벌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규칙을 어긴 자에게는 단호하게 엄벌을 내렸고, 이는 인간의 마음에 초자아로 내재화되어 이를 통해 인간은 점점 커다란 집단으로 커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동물보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집단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효율적인 성의 억압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아마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성의 억압이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은 생명을 이어가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억압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억압으로 눌려졌다면 오히려 인간이라는 종은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겠지요. 대낮에, 의식의 세계에서 활발한 성은 집단의 이익을 피해 어둠으로, 무의식의 세계로 그 자리를 옮겼습니다. 빛 가운데 활발한 것은 위험한 것이지만 어둠 속에서는 용납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성은 동물과는 달리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밤에 하거나, 낮에 해도 남들이 못 보게 커튼을 치거나 깜깜하게 해놓고 섹스를 하곤하지요. 이 같은 강한 성적 억압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그 대가로 지불한 것이 바로 발정기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시시때때로 이성을 그리워합니다. 억압된 성이 항상 비집고 올라오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의 억압은 연장자들에게 더 필요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과 성에 대한 억압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소년기, 특히 중고등학생 때는 성적 충용이 가장 왕성한 시기입니다. 보통 남자는 10대에, 여자는 30대에 가장 왕성하다고들 하지만 앞으로 남녀 평등이 가속화되면 꼭 그러할지는 의문입니다. 젊고 싱싱할 때 자기같이 싱싱한 존재를 만들고 싶은 게 생명의 본성일 테니까요. 그래서 청소년에 대한 성적 억압 이데올로기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억압 이데올로기는 일단 성을 지배하고 있는 어른들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이니까요. 그래서 청소년들은 자기들의 강한 성적 본능을 한편으로는 억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나름대로 반란을 꾀하면서 포르노 테이프나 다른 성적 일탈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의 성을 이해하고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는 일단 어른들이 자기 입장에서 벗어나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억압만 요구하지 말고 성교육도 솔직하게 하고, 그들의 성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돌릴 수 있는 놀이 문화, 문화적인 승화의 방식도 만이 개발해야 합니다. 그들의 반란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자기와 사회를 해치지 않도록...
삶의 본능
죽음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리비도는 그것과 밸런스가 잡히도록 확대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리비도는 에로스 또는 삶의 본능이라 불리고, 생존의 모든 본능과 본능적 성동인 그 자체를 포괄하게 되었다. -(정신 분석의 이해), D.스태퍼트-클라크 저, 이일철 역, 정음사, 1981, p.199.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감독의 힘인가, 배우의 힘인가! 장선우 감독의 (꽃잎)의 두 주인공, 엄마(이영란 분)와 딸(이정현 분)의 연기는 나의 심금을 울리고 또 울린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 비록 녹음이 서툴러서 대사가 울리는 옥의 티가 있었지만 이정현이 보여 주는 연기는 거의 완벽했다. 미치광이 연기를 저렇게 미친 여자를 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저런 생생한 연기를 해낼 수 있을까? 거기에 또 진한 무게를 더해 주는 엄마 이영란의 연기란... 내가 보기에 그 두 모녀는 신들린 듯이 연기를 했고, 둘의 연기는 (꽃잎)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둘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으니까... 아마 나는 그 둘을 보기 위해서라도 (꽃잎)을 찾고 또 찾을 것 같다. 베테랑 배우 문성근은 마지막에 순간순간 드러나는 깨끗한 이미지가 오히려 사실감을 떨어뜨렸지만 그 둘만은 정말 위대한 여성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는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줄곧 나를 사로잡았다. 미친 소녀! 소녀는 철저히 정상을 거부하고 악착같이 비정상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소녀는 조금이라도 편안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고통을 주면 줄수록 거기에 머물렀고, 사랑과 따뜻함이 주어지면 어김없이 달아났다. 소녀는 고통을 향해 뛰고 또 뛸 뿐이다.
그녀를 보면서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났다. 제니가 자리를 떠나자 그는 몇 년 동안 뛰고 또 뛴다. 제니가 자기를 떠날 이유가 없는데도 떠난 것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된 것이다. 사랑의 배반! 받아들이기 힘든 그 현실의 고통 때문에 검프는 뛸 수밖에 없었다. 자기만의 사람을 포기해야 하는 사랑의 본능에 대한 깊은 상처는 그로 하여금 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본능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에 본능의 상처는 무엇보다도 자기부터 아물기를 바란다. 그 앞에서는 현실도 돈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단 본능부터 아물어야 한다. 육체가 완전히 지치고 또 지쳐서 본능의 상처가 가라앉을 즈음, 삶의 본능이 떠오르면서 그는 발을 멈췄다. 그러고는 쉬어야겠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만일 검프가 그대로 끝냈으면 그는 외롭고 우울한 여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니는 돌아왔고 그에게 아이를 안겨준다. 검프 같은 정신 박약아가 아닌 정상적인 아이를... 검프는 홀로 됨에서 벗어나 해맑은 소년의 표정을 회복한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자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남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를 또 어떻게 믿느냐! 차라리 홀로 사는게 낫지...' 아내가 바람을 피우자 일본으로 밀항하여 거지 생활을 하는 남자! 그는 일류 대학, 일류 집안, 일류 적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실을 떨쳐 버리고 달아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미쳤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본능에 깊은 상처를 받았기에 차라리 홀로 살면서 육체적으로 자학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행여 육체적인 고통이 마음의 깊은 상처를 달래 주기를 바라면서... 육체의 고통을 통해 본능의 아픔을 잊어 보려는 몸부림에서... 그러나 육체는 수십억 년 간 내려온 생명의 본능을 달래기가 힘들다. 따라서 본능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육체를 더욱 진하게 자학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자학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이 떠난 다음 끝없이 술을 마셔대며, 결국에는 죽음으로 돌진하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니콜라스 케이지 분)은 이해가 간다. 그는 이미 아내와 자식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았기에 새로 나타난 구원의 여신 세라(엘리자베스 슈 분)의 손길마저 뿌리치고 술과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끔찍한 상처를 보여 주는 현실이 (꽃잎)의 소녀에 있었다. 검프나 벤은 그래도 이성이 남아 있었지만 소녀에게는 그저 아픔밖에 없었다. 진압군의 총격이 가해질 때는 겁에 질려 엄마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지만, 피투성이가 되어 시체더미 속에 던져졌을 때는 삶을 구하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지만, 그후에 남겨진 것은 아픔 또 아픔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 삶의 본능이 무었보다도 앞서 자신의 삶은 구했지만, 죽어가면서 붙잡으려는 엄마 손을 발로 짓밟아 떼놓고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더미에서 뒹굴면서 그녀의 이성은 훼손당할 대로 훼손당했다. 삶의 본능을 제외한 그밖의 본능(사랑의 본능, 가정의 본능, 죽음의 본능)은 무참하게 상처받고 자극받는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면 환각으로 나타나 괴물을 무찌르고 구해 주는, 눈부시게 하얀 천마 탄 왕자님일 뿐이다.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을 지켜 준 데 대한 무의식의, 생명의 축복일 것이다.
그 소녀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한 고통을 받은 환자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말이 너무 많고 쓸데없이 간섭을 잘하고 화를 잘 내서 병동의 골칫덩이였다. 간호사나 남자 직원들의 어떠한 설득이나 신체적 강박에도 변화되지 않났다. 그녀의 과거를 살펴보니, 남편이 자식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후부터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가출해서 길거리를 떠돌면서 부녀보호소, 영세민 정신병원 등을 전전했다. 그녀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플 때마다 떠돌았고, 갇혀 있는 상황이었을 때는 남에게 야단맞는 자학적인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딴 집에 누워 그 마을의 남자들이면 누구나 와서 건드려도 괜찮은 소녀, 어쩌다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 따뜻한 보살핌을 받게 되면 어김없이 박차고 나가는 소녀, 자기를 차고 때리고 하면 악착같이 붙어 있다가 연민을 느껴 사랑을 주려고 하면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는 소녀! 그녀에게는 사랑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야 하고 배신당하는 것은 지옥 같은 고통이었기에, 차라리 그녀 스스로 그 모두를 떠나는 것이다. 소녀는 마치 마음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이 좁은 대한민국 땅을 비척거리며 걷고 또 걷고 있다. 어쩌다 만난 남자 뒤를 '오빠-' '히-'하고 쫓아다니면서... 모진 삶의 본능이 이제 그만 자기를 놓아 주기를 바라면서... 누가 소녀에게 이토록 깊은 상처를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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