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그 광대들은 어디로 갔을까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방년 21세, 꽃다운 나이. 안성 고을의 이름난 여사당 바우덕이 젊디젊은 나이에 죽었다. 미색이 아름다워 양귀비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그녀였지만 죽음의 신만은 뿌리칠 수 없었는가 보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안성 청룡사 개울에 뿌렸다. 뭇남자들치고 바우덕이 한 번 만나는 게 소원 아닌 자가 없었다. 바우덕이는 소고에 특히 능했다. 남사당패는 개다리패, 오명선패,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안성 원육덕패, 이원보패 같은 패거리 이름만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그 중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던 청룡사 사당하면 늘 떠오르는 인물이 바우덕이다.
그의 남편 역시 남사당이었다. 바우덕이가 죽을 당시, 그의 남편은 나이 마흔두 살의 장년. 떠꺼머리 수총각으로 이십 년 세월을 보내다가 느지막이 얻은 부인이었다. 어린 아내가 죽자 그는 매일같이 바우덕이와 놀던 바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아내 때문에 실성했다고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그는 바위에 올라가서는 나발을 불고 장고를 치거나, 때로는 노래를 불렀고 울기도 했다. 몇 년을 그렇게 하다가 어느날 그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가 올라섰던 바위를 나팔을 불었던 바위라는 뜻으로 나팔바위(혹자는 울바위, 떵뚱바위라고도 부름)라 불렀다. 바우덕이는 100여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으나 사람들이 그를 빗대어 지은 노래만큼은 지금도 안성땅에 전해지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오늘날에는 한갓 작은 암자에 불과한 청룡사를 찾았다. 절에서 받은 신표를 들고 수많은 '바우덕이' 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안성장터는 물론이고 전국을 떠돌면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본산. 한겨울에는 그들이 돌아와 시끌벅적했을 그곳 청룡사. 정처없이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동가식 서가숙하며 떠돌던 사당패가 겨울이면 되돌아와 청룡사에서 아기도 낳고 연희도 가르치고 휴식도 취하면서 이듬해 봄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래서 청룡사는 온갖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장 빨리 들을 수 있던 '정보통신의 메카' 이기도 했고, 광대들의 고달픈 사연들이 맴돌다 쉬는 '성지' 이기도 했다. 청룡사 마당에 서면 그 옛날 살판, 어름판을 놀고 버나(접시돌리기)하던 장소가 여긴가 하여 늘 감회가 새롭다. 나는 여러 번 사람들을 이끌고 청룡사를 방문하였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쇠락한 절 풍경에 실망하는 표정인데, 정작 이곳이 한국불교사의 거목 나옹화상의 주석처였음을 모르는 탓이다. 나는 청룡사를 찾는 이들에게 서슴없이 그곳을 '광대들의 메카' 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이즈, 이경규, 신은경, 안성기, 서태지, 김원준, 김건모...... 그들에게 반드시 한 번쯤은 찾아가야 할 '순례 메카' 로 권하고 싶다. 하다못해 탤런트, 영화배우, 가수, 코미디언 등의 협회에서 나서서 기념비라도 세워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와 브레히트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떠돌면서 춤과 노래, 곡예를 무기 삼아 살아가던 무리들. 이름하여 유랑예인집단. 상세한 자료가 변변치 않을뿐더러, 일제 식민지가 시작되면서 급격히 단절되어 그들의 실체 규명이 어렵다. 사당패, 솟대쟁이패, 대광대패, 초란이패, 걸립패, 중매구패, 광대패, 굿중패, 각설이패, 얘기장사, 남사당패 등 그 이름은 여러 가지이나 유랑예인집단의 구체적인 실체는 제대로 드러나질 않는다. 천민집단이었던 이들에 대해서 문자쓰는 양반들이 기록을 남겨줄 리 없었다. 그러나 예인집단이야말로 어느 시대에서나 서민들과 함께 애환을 나눠온 당대의 '대중스타' 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각광받는 스타들의 선조격이 아니겠는가.
사실 장르 구분과 연예인 범주가 세분화된 현대와, 예술. 놀이. 연예 자체가 미분화된 전통시대의 예인 개념을 그대로 일치시키기는 쉽지 않다. 전통사회에는 예인집단이 세습적인 천민집단으로 존재했다면, 오늘날에는 전 계층적으로 연예인 공급이 이루어질뿐더러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기는 해도 민중속에서 함께 살아온 예인의 세계관만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법. 더욱이 예능훈련, 레퍼토리, 사회적 기능 따위 등을 비교하면 유랑예인집단은 오히려 오늘의 스타들보다도 더 전문적이고 대중적이지 않았을까. 나는 유랑예인을 생각하면 늘 코메디아 델라르테와 브레히트가 떠오른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이 완성되기까지,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나름의 역할을 한 것 같다. 브레히트는 그의 대펴적인 서사연극론 <반 아리스토텔레스극에 대하여>에서 서사극의 기본 모델로 '가두장면' 을 제시한다. 자연스럽고 초보적인 서사극의 대표적 예로서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나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한 사건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도 가두극이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7 ~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의 연극사에 영향을 준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어원 그대로 '희극' 과 '기술' 의 결합이다. 이 집단에 속하는 자들은 배타적 집단을 형성, 자기들끼리만 결혼했고, 거기서 출생한 아이는 어려서부터 저절로 부모들 품에서 연기술을 배웠다. 유럽의 길거리와 광장을 떠돌던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예술이야 말로 어쩌면 현대 연극이 상실한 가장 매력적인 개방적 요소를 두루 지닌 우수한 연극 전통일 것이다. 브레히트가 이들 가두극 전통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창의적인 서사극 전통을 재발견하였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배우의 풍부한 상상력, 발랄한 기지, 즉흥적인 재능, 말과 동작의 세련된 구사와 발표력은 바로 극의 생명이었다. 이들의 기발한 극술과 가면, 의상들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오페라. 발레. 묵극. 인형극. 심지어는 그림자 놀이나 서커스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유랑예인들도 집단 내 결혼을 많이 했으며, 어려서부터 무동을 타면서 자라난 아이들이 커서 기예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기량을 갖춘 전문적 예술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브레히트 같은 혜안을 가진 '큰 광대' 를 못만난 탓일까. 전통예술에서 현대예술로 넘어오면서 그만 족적이 끊기고 말았다.
나는 늘 만나는 무대예술인들에게 이렇게 '한탄조' 로 이야기하곤 한다. 조서 후기의 풍부한 유랑예인 전통이 고스란히 현대로 이어졌더라면, 우리 예술의 심도가 얼마나 더 깊고 풍부해졌을까! 민족연극사, 민족음악사, 민족무용사, 심지어는 코미디언의 역사, 서커스의 역사, 매춘이나 남색의 역사에서도 유랑예인집단은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19세기 초 이들이 사라지자 그 빈 공간을 일본에서 들어온 대중오락물들이 차지한다. 민중들은 남사당패의 꼭두각시극에서 즐거움을 택하기보다, 축음기에서 들려오는 엔까소리에 열광했다. 아니 일제 당국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잃었던 한수산의 소설 <부초>가 떠오른다. 현대판 유랑집단인 곡마단의 애환이 잘 그려진 소설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개천가에 천막을 치고 사람을 불러모으던 곡마단의 나팔소리에 저마다 흥분하여 몰려가던 추억이 새롭다. 그러나 곡마단은 어디까지나 일제로부터 유입된 곡예이다. 곡마단이 민중의 애환이 서린 집단이기는 해도 서커스를 연출하던 솟대쟁이패 전통과는 무관하다. 일제시대를 풍미했던 곡마단, 신파극단, 해방 이후 전국을 누볐던 여성가극단...... 이들은 유랑예인집단이 사라진 틈새를 비집고 새롭게 등장한 집단들이었다. 일제가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예인집단은 그힘을 잃고, 신식 악기와 신식 노래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북한이 교예를 발전시켜 유랑예술의 일맥이나마 이어가고 있음은 뜻깊게 생각된다. 교예는 북한사회에만 있는 독특한 예술형식이자 군중오락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서구식 서커스가 퍼져 잇으나 유독 북한사회는 교예라는 명칭으로 글자 그대로 '교' 와 '예' 를 결합한 예술형식을 강조하고 있다. 훗날 통일시대의 남북문화 통합과정에서 되살렸음직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거사에서 사당으로
조선 후기 유랑예인만이 연예인의 조상격은 아니다. <삼국사기>, '악지' 에 전하는 오기(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의 다섯 재주), 조구려 수산리벽화에 등장하는 재주꾼, 후대로 내려와 고려시대의 괴뢰패(꼭두패), 또한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춤꾼, 악공 등 이 바로 그 원조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창우, 기생, 무당, 판소리꾼, 심지어 마을의 '아마추어' 적인 탈춤꾼, 풍물꾼도 포함된다. 특히 소학지희라는 말을 낳게 한 창우가 중요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봇물 터지듯 생겨난 유랑예인집단처럼 조직적 결집력과 전문성을 아우르면서 서민대중을 직접 상대했던 민중적인 연예인집단은 없었다. 왜 조선 후기에서야 이런 유랑예인집단이 급증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그같은 집단들이 없었을까. 아무래도 사당패가 가장 오래된 집단이니 사당패를 추적해보면 그 해답이 나올 성싶다. 사당패의 원래 명칭은 거사패였다. 언제, 어느 시기에, 어떤 이유로 명칭이 바뀌었을까. 불교에서는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불도를 닦는 재가의 비승비속 무리를 거사라 부른다. 반면에 속가에서 불교를 믿는 여자는 사당이라고 했다. 조선 전기 거사패 출현은 억불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승려와 절의 감축으로 인하여 재가에 떠도는 무리가 급속히 증가한 탓이다. 거사는 생업을 버리고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사주. 관상. 손금보기, 떠돌이 장사치 노릇을 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남녀가 한곳에 뒤섞여 징과 북을 울리며 안 하는 짓이 없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전신재 교수(한림대)는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아주 일목요연하게 거사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집단이다. - 승려를 비롯하여 관리. 군인. 노비 등이 이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모두 조직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 서울 및 지방에 존재했다. - 생업을 버리고 부역도 회피했다. - 남녀가 함께 거처하여 남녀관계가 문란했다. - 사찰과 관련이 있다는 연화를 사칭하여 백성의 재물을 탈취했다. - 도성 안에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닌 '사' 를 짓고 불사를 거행했다. - 사기로 시장의 이익을 독점했다. - 사람들을 모아놓고 징과 북을 치며 가무를 했다.
임진. 병자 양난이 끝나자 조선사회는 극도로 어수선해진다. 먹고 살기 힘들어 유랑민이 갑자기 급증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거 예인집단으로 편입된다. 더욱이 기근이 들거나 가렴주구를 일삼던 통치자들의 압제를 피해서 유랑민은 날마다 불어났다. 아이를 굶겨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광대들 뒤를 쫓아가게 해서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하려는 게 당대의 세태였다. 이제까지는 그런 대로 종교성을 지녔던 거사패들은 사당 무리와 함께 다니면서 본격적인 예인의 길로 나선다. 이때 명칭마저 사당패로 바꾸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 교수는 이들 종교세계의 인물들이 당시대적 특수한 사회 사정 때문에 성의 세계에서 속의 무리로 전락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사당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수많은 유랑예인 패거리 중에서 아무래도 가장 오래 된 집단은 사당일 것이다. 유독 사당이란 말이 조선 전기부터 등장할뿐더러, 다른 집단들이 보유한 레퍼토리가 사당패 연희로부터 분화된 것이 많은 탓이다. 사당패는 연예를 파는 사당(여자)과 일종의 '기둥서방' 역할을 하던 거사(남자)로 이루어졌다.
사당과 거사는 참으로 재미있는 관계였다. 마을을 돌아다닐 때, 거사는 사당을 등에 업고 다닐 정도로 대단히 소중히 다루며 세수마저도 거사가 해주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사당과 거사가 동침을 하지만, 객이 있으면 사당을 내놓고 거사가 하인 역할을 맡았다. 창녀촌에서 매춘을 하는 동안에 기둥서방이 망을 보는 꼴이었다. 사당패는 사당벅구춤, 산타령 같은 민요창, 줄타기(재담줄) 등을 중요 레퍼토리로 삼았다. 청룡사의 바우덕이가 가장 잘 놀던 춤도 법고를 들고 추는 사당벅구춤이었다. 그들은 춤과 노래와 재담이 어우러진 예능을 선보였다. 사당패는 고스란히 그대로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대표적인 분화가 남사당패다. 남사당패는 조선후기에 느지막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거사패는 사당패로, 사당패는 남사당패로 전승. 분화되면서 그 맥을 이었다. 오늘날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문화재 보존정책' 에 힘입어 '무형문화재 남사당패' 로 명맥만 잇고 있는 중이다.
다양한 레퍼토리, 또 하나의 '르네상스'
우리는 조선 후기가 민간예술의 전성기라고 들어왔다. 그 구체적인 증거품으로 판소리, 탈춤, 민화 따위를 꼽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랑예인집단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보면, 가히 연예예술의 '르네상스' 였음을 알 수 있다. 흥부전의 놀부가 박 타는 대목에는 사당, 거사, 각설이패, 초라니 따위가 쏟아져나온다. 변강쇠전에서는 장승을 베어다 불을 땐 이유로 장승 동티가 나자 옹녀가 초라니패 따위를 불러 시신을 떼어내려 한다. 이같이 조선 후기를 풍미한 판소리에서 유랑예인집단이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이들 예인들이 시대적 총아였다는 증거간 된다.
유랑예인집단의 레퍼토리에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방울던지기 따위의 요술에서부터 고려시대의 꼭두각시극까지, 전승되는 모든 '기예' 가 종합되었다. 대략 풍물, 법고춤, 줄타기, 땅재주, 얼른(요술), 죽방울치기, 비나리, 삼현육각, 판소리, 민요창, 버나 따위를 망라했다. 물론 집단마다 특성에 따라 주력으로 삼는 레퍼토리가 달랐다. 오늘날로 치면 사물놀이, 서커스, 요술, 비나리(고사반), 노래, 춤, 악기연주 등에서 특정한 한두 가지 '주종목' 이 있었다. 오늘날 덤블링을 하면서 재주넘기와 노래. 춤. 악기 연주를 곁들이는 '만능가수' 를 보면 영락없이 조선시대의 유랑예인들을 보는 듯하다. 그러면 예인집단 몇 개만 추려서 그들의 중심 레퍼토리를 살펴보자. '기산풍속도첩' 의 그림으로 보아 솟대쟁이패는 서커스꾼으로 보인다. 솟대쟁이패는 높은 장대를 중심에 세우고 줄을 늘어뜨려 놓고 곡예를 선보였다. 땅재주(공중회전), 얼른(요술), 병신굿, 솟대타기(물구나무서기, 두손걷기, 한손걷기, 고물묻히기 등)를 보여주었다. 최영년은 <해동죽지>(1921년)에서 장대에서 춤을 춘다고 하여 무간장이라 하면서, '한들한들 추는 춤, 사지와 허리가 나긋나긋 열 길 되는 긴 장대 흔들리지도 않는다' 고 뛰어난 재주를 노래하였다.
걸립패는 민간의 풍물굿패가 동네에서 걸립을 다닌 데서 비롯되었다. 애초에는 대동걸림으로 출발하였으되, 기량이 뛰어난 걸립패가 나오면서 차츰 이웃동네로 걸립을 나갔고, 종내는 전문적인 걸립패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유랑걸립패는 무엇보다 비나리를 잘했다. 걸립패와 관계 깊은 패로 중매구패가 있다. 글자 그대로 중이 매구를 치는 패거리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권 1을 보면, '승희를 구경함' 이란 시가 있다. '중의 무리 십수 명이 깃발을 들고 북을 둥둥 울리며, 때때로 마을 안을 들어와 입으로 염불을 외며 발 구르고 춤추면서 속인의 이목을 현혹시켜 미곡을 요구하니, 족히 한 번의 웃음거리가 된다. 시 한수를 지었으니 대개 실상을 기록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왜 사찰에서 속가로 굿패를 내려보냈을까. 아니면, 직접 내려가지 않더라도 절의 신표를 주어 사당패와 공존을 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당시의 어려웠던 사찰 재정에서 찾을 수 있다. 탁발을 다니던 전통이 있는 터에, 아예 전문 광대를 고용하는 방식을 써서 사찰 운영은 물론이고, 불사에 필요한 자금을 구한 셈이다. 예인집단은 그들 나름대로 절의 '신용장' 을 들고 다닐 수 있어 걸립에 도움을 받았고, 비수기에는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예인집단에 각설이패를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여 거지를 예인집단에 넣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 '거지집단' 은 단순히 거지가 아니었다. 각설이의 구성진 장타령은 그 자체로 일품이었고, 조직적 대오를 갖추어 민가와 장터를 나다녔다. 각설이의 장타령은 당대 시대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고, 구성진 목구비로 신명을 돋구었다. 최근까지 전해지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는 식의 노랫말을 누구나 기억하리라.
예인집단에는 얘기장사도 있었다. 그들은 1인의 이야기꾼과 1 ~ 3인의 잽이가 당대 인기소설을 읽어주는 집단이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이야기를 해주는 전문적인 직업 강담사가 존재했고, 우리의 경우는 이들 이야기꾼이 있었는데 판소리의 서사구조를 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예인집단들의 구체적 실상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사당패만큼은 비교적 많은 정보가 전해진다. 제일 늦게 시작된 패거리인 데다가 최근까지도 명맥을 이어온 탓이다. 탈춤의 본디 우리말인 덧뵈기, 줄다리기를 뜻하는 어름판, 곤두박질을 하는 살판, 접시를 돌리는 버나 따위가 기본종목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풍물굿은 기본이었다.
어느 시대나 예인의 생명은 높은 기량이다. 낯익은 각설이패 장타령조차 고도의 반복훈련에 의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공연단장격인 꼭두쇠, 기획의 곰뱅이쇠, 전문 연회자인 뜬쇠, 초입자인 삐리로 이루어진 남사당패 조직을 보면 바로 고난도의 예능훈련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기량연마와 레퍼토리 개발을 추구한 전문 연예인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의 연예인은 말 그대로 이들의 '직계자손' 인 셈이다.
꽃값과 호모 섹슈얼의 원조
사당패나 남사당패는 우리나라 성의 역사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이다. 최근까지 살았던 그들의 후예들이 쉬쉬하는 탓에 그 면모가 잘 드러나질 않지만, 매춘의 역사나 남색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사당패는 연희를 팔아서 먹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는 천민신분으로서 '팔 것'은 모두 팔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육체였다. 해우채란 말은 거기서 생겨났다. 사당은 거사와 부부관계를 맺고 의복, 화장품 기타 일체를 거사로부터 지급 받는 대신에 해우채는 몽땅 거사의 소득이 된다. 해우체란 말은 오늘날 매매춘에서 여자에게 주는 화대(혹은 꽃값)에 해당되는 말은데, '치마를 벗는다'는 해의채에서 비롯되었다. 거사는 사당을 업어 데려다주고 일이 끝나면 다시 업고 왔다. 공존공생의 삶 속에서, 흡사 오늘날의 창녀촌에서 기둥서방과 창녀가 그러하듯이 거사는 사당의 보호자이자 판매자였다. 그래서 양주별산 대놀이 애사당 북놀이에는 이런 노래도 전해지고 있다(일명 여사당자탄가). 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이 내 손은 문고린가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네 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빠네 이 내 배는 나룻밴가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네
이능화가 1926년에 슨 <조선해어화사>에서는, '여사당의 묘기가 절정에 이르게 됐을 때, 청중이 동전을 물고 '돈, 돈'소리를 내면 여사당이 가서 입으로 돈을 받으며 입 맞추는데 또한 묘기이다' 라고 하였다. '50년 전(대략 1875년) 본인이 어렸을 때, 직접 괴산에서 보았다'고까지 증언하고 있다. 한편, 남사당패는 남색사회였다. 그들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면 파트너를 정하였다. 개인적으로 기량을 전수받는 교육체계에서 파트너십은 중요했다. 암동모와 숫동모로 정해진 파트너십은 쉽게 남색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남사당은 농촌으로 공연을 나갔다가 여성을 맞아들이기에는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머슴 등 하층민의 남색 대상이 되어주기도 했으니, 그들의 성행위를 계간이라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호모 섹슈얼'이었다.
그들의 남색행위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양반이나 돈 있는 층은 기생첩을 끼고 살 정도였지만, 하층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억눌린 성적 배출구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한, 남사당들은 그들 스스로의 성적인 문제를 남색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행동양태는 그들이 유랑예인집단이라는 독특한 집단적 속성과 천민이라는 계급적, 사회적 속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보여진다. 이 점은 근래에 상영된 중국 영화 '패왕별희' 에서도 드러나듯이 '경극패'에게도 있었던 남성예인집단만의 특이한 성문화라고 하겠다.
한국 대중연예사의 한 페이지를 들추며
유랑예인집단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 대중연예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 정신만큼은 연연히 이어지고 있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을 한 번 들추어보라. 곳곳에 사당골이란 이름이 나올 것이다. 이들 지역이야 말로 사당패가 정착하였던 근거지였으니, 황해도 구월산 사당골, 강진 정수사 부근의 사당골 따위가 그것이다. 비록 사당은 사라졌어도 이름만은 마을명에 남기고 간 셈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물놀이패의 뿌리도 조선 후기 유랑예인이 아닌가! 그들이 이루어내는 전문예인적인 풍물굿 가락이 바로 유량예인집단의 전문적 굿가락에 그대로 잇닿아 있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이 조선 후기 유랑예인들과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기질 속에는 '유랑예인의 뜨거운 핏줄'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들 예인집단의 어제와 오늘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우리 대중문화의 겉과 속을 옳게 이해하는 첩경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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