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금줄과 왼새끼의 비밀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하여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내의 출산이 다가왔다면, 태어날 아기와 산모를 위해 무엇을 필수품으로 준비해 두겠는가. 이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더니, '산부인과에서 알아서 해주는데 따로 준비가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보게 했다. 태어날 때, 출생지가 집이 아니고 병원인 학생? 전원 모두가 손을 들었다. 우리집 아이도 호적등본에 '잠실동 XX산부인과'로 출생지가 기록되어 있다. 내 또래를 둘러보면, 병원에서 태어난 친구들은 매우 드물다. 병원에 가야 할 만큼 산모가 위급하다거나, 유달리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 아니고서야 산파나 집안 어른이 집에서 아기를 받았다. 어릴 적 어른들이 출산 준비로 분주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예전에는 무엇을 준비했을가. 미역, 가위, 실, 대야 그리고 다스한 물... 그것들 말고도 남자들은 반드시 깨끗한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두어야 했다. 아울러 숯, 청솔가지, 붉은 고추를 마련했다. 다른 것은 여성들이 알아서 해주더라도 새끼줄 준비만큼은 전적으로 남자들 몫이다.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문간에 두르는 새끼줄을 금줄, 혹은 인줄, 검줄이라고 부른다. 빈부격차, 신부고하, 지방차이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출생과 더불어 금줄과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신세대들은 금줄을 구경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들이오, 딸이오.'하고 따져 물을 것도 없다, 대문에 내걸린 새끼줄이 말해준다. 빨간 고추가 걸리면 아들, 솔가지만 걸리면 딸이었으니 금줄은 그야말로 탄생의 상징과 기호였다. 금줄의 역할은 무엇보다 잡인 출입 금하기다. 아기가 보고 싶은 친인척일지라도 삼칠일(21일)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산모는 삼칠일 동안 미역국을 먹으면서 조신하게 몸조리를 하였고, 삼칠일이 지나야 비로소 해방되었다. 금줄을 '닫힘과 열림'의 경계선이었고, 산모와 아기는 닫힌 성역 속에서 그 안전을 보장받았던 셈이다.
전라도 남원의 보절면 괴양리에서는 해마다 백중날 소동굿놀이를 한다. 그중 삼신놀이를 보자. 아낙들이 삼신고사상을 차리고 나와 무동을 탄 아이들의 복을 빌어준다. 일년 농사가 풍요롭게 되길 기원하는 마을축제다. 그런데 아낙들과 삼신고사상 사이에는 금줄이 늘어져 있다. 한편은 흥겨운 놀이공간이고 다른 한편은 신성한 제의공간이니 놀이 한마당 속에서조차 성과 속을 차단한다. 조금만 나이가 든 세대라면 다 아는 이같은 금줄문화도 금줄없이 태어난 세대들에게는 보지도 못하고 말로만 듣던 '흘러간 문화'다. 그러나 전래된 풍습 대다수가 급격한 쇠퇴, 소멸의 길을 걸었는데 금줄문화만은 아직도 시골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20세기 마지막까지 버티게 만들었을까. 그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금줄문화와 철조망문화
우리의 민족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상징을 있는 대로 꼽아보자. 고려청자, 이조백자, 팔만대장경, 아멜레종, 금속활자, 판소리, 탈춤... . 이들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문화상징들이지만 정작 금줄같이 '원초적인 상징물'은 연구가 부진한 상태에 있다. 금줄은 유교 문화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우리 문화인데도 말이다. 금줄이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기에 그처럼 오래동안 한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을가. 금줄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글자 그대로 '금'은 금지의 뜻을 지닌다는 시각이다. 갓난아기 집에 늘어뜨린 금줄은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데 목적을 둔다. 당산제나 마을굿을 위해 동네 입구나 제관의 집, 당집에 쳐두었던 금줄도 신성구역과 일상구역을 구분하고 잡신의 침입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들 금줄은 일정시간이 지나면 바로 걷어낸다. 두 번째 시각은 금줄을 '금'이 아니라 '검'으로 보는 견해다. 일제시대 국학자 이능화는 금줄을 '감줄'로 간주하면서, '감'은 검, 곰, 한과 같은 고대어와 상통하는 신성어라고 추정하였다. 역사민속학의 개조격인 손진태(1900~?)도 '검줄문화'라고 했다. 이 경우 대표적인 예가 장승, 탑, 당수나무 등에 감아둔 금줄이다. 이 금줄은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두는데, 감아둔 대상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라 하겠다. 두 번째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금줄문화는 한민족의 형성 당시부터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유교무화나 불교문화 어디를 찾아보아도 우리식의 금줄은 없다. 금줄은 유교나 불교문화와는 전혀 상관 없이 '홀로서기'로 이어져 왔다.
금줄은 우리 잠재의식의 밑뿌리에 자리잡고 있는 독특한 의례문화다. 새끼를 꼬고, 줄을 걸쳐놓는 행위 하나하나조차 엄숙한 의례다. 보잘 것 없는 한낱 새끼줄, 한 토막의 새끼줄에 의례의 엄숙함을 싣고 있다. 나는 금줄을 바라보면, 늘 휴전선 철조망이 생각난다. 우리의 선조들은 신성구역을 선포하는 금줄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누구나 승복하고 따르는 공동체의식의 소산이다. 따라서 금줄에는 부정적인 강제가 없다. 이에 반해 철조망은 얼마나 삭막한가. '접근하면 안 돼'하는 무언의 강요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그 철망의 가시에 돋아 있다. 우리 시대의 이런 억압은 철조망에서 그치지 않는다. '잔디밭에 들어 가지 마시오', '미성년자는 들어가지 마시오', '30대 이상은 출입금지', '보도진도 더 이상 들어가지 마시오' 따위의 팻말이 붙은 금지투성이다. 금줄문화를 만들면서 신성성까지 부여했던 의연한 전통은 사라지고, 고압전기가 흐르고 있으니 접근금지 따위의 살벌함이 강조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시인 신동엽이 '온갖 쇠붙이는 가고 흙덩이만 남으라'고 절규하듯 외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과 북을 갈라 놓고 인간과 인간을 단절시키는 그 철조망을 거두어내고 금줄을 빙둘러 민족굿 한마당을 벌일 날은 그 언제일지... .
남방에서 올라온 왼새끼의 비밀
금줄은 단순히 새끼줄이 범상한 줄로 바뀌는 의식적 비약이다. 이 비약의 비밀은 왼새끼에 있다. 정상적인 새끼가 오른쪽이라면, 금줄은 모두 왼새끼다. 왜 하필 왼새끼여야만 할까. '인간의 공간'에는 정상적인 오른쪽 새끼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들의 공간'에는 비정상적인 왼쪽새끼가 필요하다. 왼쪽과 오른쪽, 정상은 늘 오른쪽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오른쪽으로만 새끼를 꼬다가, 제의공간을 상징하는 금줄로 가면 왼쪽의 세계를 펼친다. 잡신이 그곳을 범하려다가 일상적이지 않는 왼새끼의 '도발적 시위'에 놀라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제의공간은 그 순결성을 지키게 된다. 부정을 막아주는 금기와 신성성, 양쪽이 다 그 왼새끼 소에 들어 있는 의미이다. 새끼줄만 금줄로 쓰였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짚이 귀한 섬에서는 칡덩굴로 금줄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이것조차도 왼새끼로 엮었다. 그렇다면, 새끼줄문화는 도작문화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쌀농사가 시작되면서 볏짚이 생겨났고, 볏짚에서 새끼줄이 생겼을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만약에 도작문화에서 새끼줄이 생겨났다면, 우리와 같이 쌀을 먹고 살아온 인근 민족들에게서도 금줄문화가 있는가. 그렇다, 금줄은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에 가면 우리와 똑같이 짚으로 만든 금줄문화가 있다. 여기서 하나의 단서가 풀리지 않을까. 비교문화사적으로 볼 때 우리의 금줄문화는 오키나와, 일본 남부의 금줄과 더불어 바로 도작문화의 소산임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시베리아 사하(Saha) 공화국에 갔을 때 보았던 금줄은 말총으로 만들었고 서낭당처럼 오색천을 붙들어매 놓았다. 몽골에서는 털로된 줄을 늘어놓는다. 유목민족인 탓이다. 새끼줄로 금줄을 늘어놓는 문화권은 도작문화권인 남방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국한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의 금줄도 왼새끼일까.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왼새끼다. 단순히 짚으로 꼰 새끼줄을 활용한다는 공통점 말고도 왼새끼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추가되었다. 이제 논의를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보자. 왜 우리나라까지만 이런 새끼줄로 된 금줄 문화가 나타났을까. 우리나라가 왼새끼로 꼰 금줄문화의 북방한계선이 아니었을가. 손진태의 주장은 이 부분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고 있다.
대체로 중부와 남부에는 '가로 치는 검줄'이 일반적이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는 '드리우는 검줄'이 보통이다. 그리고 경성 이남에서는 일시적 '검줄'을 쓰나, 개성 이북과 함경도에서는 상시적인 '검줄'을 사용한다. 경기지방을 경계로 이남과 이북의 차별성이 두드러진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금줄은 좌에서 우로 늘어놓는 금줄인데 반하여, 이북지방에서는 기둥에 늘어놓는 금줄임을 일제시대 현장조사를 통하여 보고하고 있다. 이북의 금줄은 아예 송침이라고 하여 솔가지를 끼워둔다. 오늘날로 보면 휴전선이 갈라지는 경계선에서 금줄문화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줄다리기도 마찬가지다. 오키나와에 널리 퍼져 있는 전통적인 줄다리기는 우리의 전통적인 줄다리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남녀로 패를 갈라서 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온다는 믿음에서부터, 짚으로 꼬아서 비녀목을 가로지른 형태에 이르기까지 똑같다. 그 줄다리기 문화도 금줄문화 경계선과 일치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경계선은 쌀농사가 집중된 지역과 일부에서만 쌀농사가 이루어지는 밭농사 지대의 접경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은 남방에서 올라온 금줄문화의 북방한계선이라 할 수 있다.
마을공동체의 힘으로 전화된 금줄의 힘
금줄의 사용영역은 의외로 넓다. 금줄은 마을공동체문화 전체에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다산, 서낭, 당수나무, 탑, 장승, 솟대, 대동샘... . 신성시하는 모든 영역에는 반드시 금줄을 늘어뜨린다. 1994년 음력 섣달 그뭄날, 나는 강원도 두타산 천은사 입구의 내미로리 마을에서 새해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낡은 미속학 조사 노트를 꺼내본다.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마을. 총 107호. 자연마을 평지, 천태동, 방현동, 석탄, 조지전. 석탄과 방현동 사이에 서낭당이 있음. 섣달 그뭄달 점심 무렵, 제관 신인선(63세) 씨는 목욕재계하고 새끼줄을 꼬기 시작함. 왼새끼를 꼬면서 사이사이에 창호지로 길지를 끼워넣음. 자신의 집에 금줄을 늘어놓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함. 점심을 먹고 산으로 올라감. 중턱의 당집은 괴목과 상수리, 느릅나무, 피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음. 당집을 청소하고 당집 입구에 금줄을 걸쳐놓음. 마을로 내여롬. 바깥동네로 나가는 길목에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금줄을 걸쳐놓음. 밤 10시경,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옷을 갈아입음. 밤 12시경, 지게에 제물을 지고 서낭당으로 올라감. 새해가 밝아옴... .
신인선 씨가 1박 2일 동안 제관으로서 행한 중요한 일들 중 금줄치기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신의 집에서부터 마을 입구에 이르기가지 금줄치기는 마을굿의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을굿의 핵심이기도 하다. 마을굿의 제관으로 뽑히고 나서 우선적으로 하는 제의 행위가 바로 금줄치기다. 제당에 가서 금줄을 드리워놓고 황토를 지판다. 제관집에도 금줄을 쳐놓아 외부 출입을 삼가한다. 마을민이 함께 마시는 대동우물의 뚜껑도 닫아두고,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금줄로 막는다. 이렇게 금줄로 마을을 닫아놓으면 한동안 마을 전체가 '멈춰버린 시간'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마을굿이 끝나면서 모든 것은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금줄로 차단되는 성스런 공간, 그 공간에서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제축이 벌어진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그 순간에 금줄은 제의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그러면 일상적인 공동체의 힘과 비일상적인 금줄의 힘이 팽팽히 맞서는 긴장이 흐르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 엄숙한 긴장의 순간에 숨 죽인다. 그래서 금줄치기는 마을굿의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구역을 설정하는 중요한 제의 절차이다.
금줄을 쳐놓으면 아무도 범접할 수 없다고 '터부'한다. 프로이트(S. Freud)는 <토템과 터부 Totem and Taboo>에서 터부가 금재와 제약을 통해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터부의 의미를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터부는 우리들에게 한편으로는 '신성한', '선별된' 무엇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위험한', '금지한', '부정한' 것이다. 터부의 반대말은 폴리네시아어에서 '노아(noa)'인데, 이것의 의미는 '평범한', '늘 범접가능한' 이다. 터부에는 '삼가다'의 개념 같은 것이 들어 있으며, 그 본질도 금지와 제약을 통해 드러난다. '성스러우며 두려운(holy dread)'이라는 복합적 표현이 터부의 의미에 대체로 부합할 것 같다. 금줄치기는 장 담그는 장독대, 부엌 등의 집안 신앙처 곳곳으로도 퍼져나간다. 먼저 장독대를 보자. 된장, 고추장, 간장이 우리 음식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니 장을 담그는 데 금줄이 빠질 수 없다. 심지어 술 담글 때도 술독에 금줄을 쳤다. 장독 둘레에 금줄을 두르고 고추나 한지, 숯을 끼운다. 때로는 한지로 오린 버선본을 거꾸로 붙인다. 왼새끼와 거꾸로 선 버선본같이 비정상적인 '괴력'앞에서 귀신이 범접할 수 잇겠는가. 장독은 단순한 옹기가 아니라 장맛을 내게 해주는 철륭신의 '신전'이니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이름 있는 날' 절기를 다져 가중에서 성주, 칠성 따위의 집안 고사를 올릴 때도 금줄은 빠지지 않았다. 금줄은 기우제에도 등장한다. 금줄에 병을 매달고 병마구리에 버들가지를 꽂아둔다. 불타는 모진 가뭄 때이니 물을 염원하기 위해서는 금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버들가지를 타고 병의 물이 떨어질 때 우제를 진행하게 된다. 함경도에서는 물건을 버릴 때, 왼새끼에 매어서 던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버리는 물건에서 부정탈 수도 있다는 생각 대문에 나온 관습이다.
우리 모두 왼새끼를 꼬아야 한다
금줄은 줄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줄에 매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의미를 구별할 수 있다. 금줄에 달아매는 것으로고추, 솔가지, 숯 이외에 또 무엇이 있으며, 각각의 기능은 무엇일까. 고추는 남아를 상징할뿐더러, 고추의 붉은색은 늘 악귀를 쫓아내는 벽사를 의미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고추가 들어왔으니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풍습임이 분명하다. 솔은 일종의 '정수기 필터'처럼 정화 작용을 하는 상징물이다. 솔가지가 살아 있는 늘 푸른 생동감, 생명의 상징임은 말할 것도 없다. 평안도에서 송침이라 부른 금줄도 바로 솔가지를 꽂은 줄을 말한다. 이북지방의 송침에서는 태어난 남녀 아이의 성적인 구분을 하지 않는 특징도 보여준다. 금줄에는 한지를 매다는 경우도 많다. 이는 밤에도 한지가 희게 드러나므로 구별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이유이고, 한지가 전통적으로 길지라 부르는 데서 유래한 기복적 성격도 담겨 있다. 나는 한지를 '해피니스 페어퍼'라고 농담조로 풀이하곤 한다. 혹시 길지를 매단 금줄을 볼 기회가 있으면 그 숫자를 세어보라. 왼새끼를 지키듯이 짝수를 피해 1, 3, 5 ,7, 9 식으로 홀수로 매단다. 여기서도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박이나 게껍데기를 매달기도 하였다. 논자에 따라서는 박은 박혁거세 이래의 신성한 상징물로, 게껍데기는 날카로운 게발의 위력이 악귀를 잘라내어 막는다고 보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금줄을 꼴 때부터 지푸라기가 거칠고 날카롭게 삐져나오게 만들어 그 '발톱'을 과시한다. 귀신이 쳐들어오다가 목구멍을 찔릴 판이다.
이제, 금줄의 상징성을 정리해보자. 오키나와에서는 마을경계, 신전 정화, 신축가옥 금기에 쓰인다. 몽골에서는 지역경계 표시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금줄문화는 지역경계(금기)와 신성구역 선포라는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지니고 있다. 두 기능은 막상 동전의 양면 같은 게 아닐까. 가령 우리의 마을굿에서 동구 밖을 금줄로 막는 것은 더 이상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경계표시 역할도 겸하는 탓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이 산업화된 사회에서 금줄이 차지하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원래 금줄은 하나의 성역 표시물이었다. 인간들에게 두려워하라는 성역, 마을을 지켜주던 성역, 간장과 술을 숙성시켜 주던 성역. 그러나 이제 성역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에 인간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성역을 갖기 시작하였다. 화학합성작용으로 간장과 술을 빚게 되었으며, 금줄을 드리우던 황토길 어귀는 자동차 달리는 포장도로가 되었다. '삼신할매' 역할도 산부인과 의사가 떠맡게 되었다. 게다가 아파트 같은 공동주거문화의 확산으로 금줄을 걸 만한 대문 자체가 사라졌다. '문을 열고 산다'는 개념 자체가 우습게 되었다.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립문, 마당의 우물물로 등목을 하는 풍경이 밖에서도 보이는 그러한 문을 우리는 잃고 말았다. 문은 도둑이나 강도를 막기 위한 철저한 방어벽이자 이중 열쇠와 감시경으로 무장한 현대판 성문이 되었다.
하지만 금줄문화의 정신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신앙처럼 자리잡았던 금줄이라는 옛 '성역'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정신적 문화유산을 제대로 가꾸는 일이 아닐까. 우리 모두 아이를 낳거든 금줄을 매달 일이다. 도시의 젊은 남자들은 지금부터라도 새끼꼬기를 배우자. 왼새끼를 꼬아서 탄생의 외경을 배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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