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남근과 여근의 풍속사
남근을 깎아 여신에게 바치며
깊고 푸른 바다, 동해. 백두대간을 옆에 끼고 동해바다가 누워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동해바다를 향하여 야무진 향나무로 깎은 남자의 성기가 아홉 개씩이나 굴비 꿰이듯 새끼줄로 엮여져 있는 게 아닌가? 일 년 내내 출렁이는 물결과 해풍 따라 남근이 꺼떡거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삼척시 원덕면 신남리에 가면 해랑당이 있는데 거기에는 남근을 모셔두어 뭇사람의 발걸음을 잡아끈다. 아담한 포구 마을 산기슭에는 '큰당'이라 불리우는 서낭당이 있고, 바다로 혀를 내민 곶부리에는 '작은당'이라 불리우는 해랑당이 있어 연 2회 마을제를 올린다.
옛날 옛적의 일이다. 마을 젊은이들이 배를 타고서 하얗게 생긴 백섬으로 나갔다. 섬에서 조개를 잡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었고, 젊은이들은 급히 귀환했다. 그러나 동네 처녀 한 명이 미처 배를 타지 못했고, 급기야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을에서 하나 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바다에만 나가면 풍랑이 이는 이유가 뭡니까?" "처녀애를 서낭으로 모시고, 남근을 바치도록 하시오." "남근이라뇨?" "해마다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서 처녀애를 달래보시오."
답답하다 못해 찾아간 무당의 입에서 처녀의 원귀를 달래주라는 공수가 내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원귀를 처녀귀신이라고 했던가. 그로부터 마을의 당은 해랑당이 되었고 예쁜 처녀애를 그림으로 그려서 여서낭으로 봉안하였다. 해마다 남근을 깎아서 정성을 드리니 그로부터 아무탈이 없었다. 남근을 바친 뒤로는 고기도 잘 잡히고 해상 사고도 없다고 한다. 해랑당의 남근은 향나무를 적절하게 깎아서 흰색과 붉은 무늬가 조화를 이룬다. 주먹에 곽 찰 정도로 굵고 시원하게 깎았기 때문에 자신의 물건이 유난히 작은 남자는 콤플렉스를 느낄 정도다. 남근에는 붉은 황토흙을 칠해서 실물과 같은 피부색을 낸다. 할아버지 한 분은 자귀 하나로 나뭇밥을 일으키면서 척척 깎아내는데, 수십 년간 남근 깎는 전문가로 불리웠을 정도로 솜씨가 보통을 넘는다. 남근 깎기에 관한 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다.
해랑당의 남근 신앙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옳을까. 해랑당의 죽은 처녀에게 남근을 바치는 의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통적인 죽음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귀신 중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이 처녀귀신이다. 속설에 처녀귀신은 손각시, 혹은 왕신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몽달귀는 총각이 죽어서 된 귀신으로 삼태귀신이라고도 부른다. 상사병이 들어서 죽은 귀신, 특히 나이를 먹어 장가를 들 나이에 억울한 일로 죽은 총각귀신이나 그와 유사한 처녀귀신은 원한이 깊어 혼령이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원귀가 되어 떠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망자혼사 굿처럼 죽은 처녀 총각을 맺어주는 사후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랑당의 여서낭은 해마다 여러 개의 남근을 받고 있으니, 죽어서나마 남자 복은 많은 셈이다. 원귀에게 바치는 의례가 아니더라도 여신에게 남근을 올리는 신앙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사례를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서울 지방 곳곳에 부근당이 잇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으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부근이라 함은 네 벽마다 나무로 만든 많은 음경을 걸어놓은 것을 말함이니 음탕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였다. 남근을 깎아서 곳곳에 걸어 두었다니! 하지만 유교가 세력을 떨치면서 중도에 남근은 사라지고 부군신이 슬쩍 자리를 꿰어찬 셈이다.
'근'을 '군'으로 바꿀 정도로 성신앙의 흐름을 바꾸려고 했던 지배층의 완강한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오늘날 서울, 경기 지방에 산재된 부군당에는 남근은 사라지고 엄숙한 신만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박물관의 무속실 유리관에 안치된 원효로 부군신이 아리따운 여신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해의 해랑당처럼 남근을 깎아서 여신에게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바위와 좆바위의 역사적 만남
그러나 말이다. 우리에게 남근신앙이 유별났던 것은 어쩌면 '사회적 강제'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의 유교적 덕목이 요구하던 남아선호 풍습이 남근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는지.... . 누구든 칠거지악을 알고 있으리라.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대를 잇지 못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소박을 맞거나, 첩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무엇 하나. 남자아이를 낳아야 사람이지, 오죽하면 일곱 번째 공주를 강물에 띄워버린 바리공주 이야기가 대표적 무속신화로 정착되겠는가. 아들 못 낳는 것이 어디 여자만의 책임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소재는 항상 여성들에게 돌아갔다. 그런 실정이니 남아선호 풍습은 오히려 남근 숭배를 더욱 촉진시켰다. 나는 그 조선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폭발적으로 포교되는 남근신앙시대
엄숙하고 교조적이기까지 한 도덕적 덕목에 덧붙여 가부장적 남아선호사상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남근 숭배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다. 많은 여인들이 절을 찾아 불공을 드렸다. 그러다가 아예 마을 미륵을 섬김으로써 절에 갈 필요조차 없어졌다. 미륵이 동네 한가운데로 스며들어오는 데에는 남아선호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중화된 미륵의 본디 모습 자체가 워낙 다양한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가 남근과 결합되었다. 미륵과 남근, 이 역시 조화 속의 부조화인가, 아니면 부조화 속의 조화인가.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미륵신앙은 하나의 구원처였다. 원래 미륵신앙은 조선 후기 변혁운동의 확산과 맞물려 있었다. 우리나라판 '메시아'를 간구하는 민중적 염운에서 민중들은 당대를 '미륵의 시대'로 만들어갔다. 미륵이 당래하생하여 중생을 구제해주기를 간구하였기에 민중들은 자연바위마다 미륵바위란 별칭을 부여한다. 그것이 남아선호사상과 결합, '남자의 물건과 비슷한' 바위마다 역시 미륵바위란 이름을 붙이게 된다.
미륵바위에 부과된 1차 과제는 아기를 낳게 해주는 역할이었다. 칠거지악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한 지경에서 좆바위와 미륵바위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반드시 미륵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남근을 세워두고 해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감았다. 여근과 달리 남근의 경우, 돌부리가 길게 올라와 있어서 줄을 감기에 편리한 탓도 있다. 남근에게 올리는 최대의 선물로 집단적 제의를 바쳤다. 단순한 '자지바위'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동체적 운명을 짊어진 성적 상징물로 자리잡게 된 셈이다.
공갈바위에 돌을 던지며
남근이 강조된 시대였다고 하여 여근이 무시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듯한 남근이 있으니 그럴듯한 여근이 없겠는가. 동해바다 해랑당 남근에 견줄 만한 수준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충청도 제천땅 무도리의 공알바위를 들고 싶다. 마을 입구 길가에 직경 5자 크기의 원형으로 된 자연석 바위가 옴폭 패이고, 그 속에 직경 3자 크기의 난형 바위가 볼록하게 솟았으니 영락없이 여자의 음부 그 자체다. 인공으로 그렇게 만들라고 해도 쉽게 만들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무도리를 두 번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건녀편 논둑의 바위에 서서 돌 세 개를 공알바위에 던졌다. 재주가 없던지 번번이 실패하였다. 던진 돌이 들어가있으면 첫아들을 낳는다는 믿음이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첫딸을 낳았다. 믿거나 말거나 주민들은 이 속신을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다. 또 이 공알바위의 구멍을 작대기로 쑤시면 동네 처녀가 바람이 난다고 전해진다. 여성의 음부를 작대기로 쑤시는 행위는 가 자체로 남녀 상관을 뜻한다. '계집과 아궁이불은 쑤석기리면 탈난다'는 속담도 여기서 나왔다. 이 마을에서는 연 1회 바위에 제를 올려 마을 처녀들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남자물건'하고 '여자물건'을 모신 마을들은 찾아가 보았으니 이번에는 둘 다 모신 마을을 찾아가 보자. 전라도 정읍땅 원백암에 가면, 1개의 자연마을에서 무려 12당산을 모시고 있다. 당산은 당산나무, 당산돌, 장승 따위로 이루어지는데 남근과 여근도 한몫을 차지한다.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의 남근은 일명 자지바위라고 부르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나는 이 자지바위를 볼때마다 감탄을 연발한다. '전국에서 제일 세련되게 생긴 자지다!' 나는 3년 전 여름 한국역사민속학회 하계답사 대, 답사단 40여 명을 안내하면서 자지바위 앞에 서서 아주 당당히 그렇게 선언 하였다. 처녀애들안 알 듯 모를 듯 웃었고, 나이먹은 축들은 충분히 알만하다는 '사인'을 보냈다. 마을이 굽어보이는 뒷산을 향해 10여 분 오르면 남근에서 마주 보이는 산자락에 후줄근하게 물이 흘러내리는 바위벽이 있으니 여자의 갈라진 그곳과 같다고 하여 농바우, 두덩바위, 보지바위라 부르고 있다. 건넛마을에서 농바우가 바라보이면 동네 처녀가 바람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음풍을 막기 위하여 동구에 남근을 세웠단다. 이렇듯 남근 홀로, 아니면 여근 홀로, 그것도 아니면 남근과 여근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예는 세 마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만 해도 인왕산 국사당 근저리의 암벽들에는 여근암이 수두룩하다. 국사당에서 건너다보이는 이화여자대학교 뒷산에는 비죽바위라 부르는 거대한 남근바위가 불끈 솟구쳐 있다. '독립군'을 잡아두었던 서대문 형무소 자리와 독립문을 사이에 두고 여근과 남근이 마주 보고 있으니 마치 서로를 끌어당기는 형국이다. 이렇듯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남근과 여근들이 흔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도 다양하기만 하다. 자지바위, 보지바위와 같이 조금은 원색적인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가 뭐했던지 여근과 남근, 여근암과 남근암, 성기바위, 처녀바위, 미륵바위, 옥문바위 따위의 비교적 '고상한' 딱지도 붙여주었다. 그러나 좆바위, 씹바위, 공알바위, 씹섬바위, 암탑, 수탑, 좆바위, 자지방구, 소좆바위, 삐죽바위 같은 이름표처럼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한 경우도 많다.
성풍속의 뿌리를 찾아서
이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선사시대로 가자. 동북아시아에 산재한 암각화를 보면, 남녀의 성기나 남녀간에 섹스하는 모습이 다수 그려져 있다. 당대인들은 성에 대한 관념을 매우 솔직 담백하게 증거물로 남겼던 것 같다. 우리의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에도 양다리를 굽혀 춤을 추고 있는 남자상이 있는데 엉덩이에 고리가 달리고 거대한 성기가 돌출되어 있다. 거친 자연풍토, 험악한 생존조건에서 본능적으로 생산력을 희구하였을 선사시대인들에게 성은 대단히 자연스런 생활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당연히 남근과 여근을 암각화 따위로 묘사하는 일은 그들의 일상적 생활이었다. 역사시대로 내려오면 조금은 구체적으로 성의 상징무이 등장한다.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군사 5백명이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여근곡에 진을 쳤다가 모두 죽는 대목이 나온다. 신라 22대 지철로왕은 음경이 커서 배필을 구하지 못해 생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기사는 대략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의 생식기 길이가 1척 5촌이나 되매 마땅한 배필을 구할 수 없었다. 배필을 구하러 다니는 신하들 눈에 개 두 마리가 북만한 큰 똥덩이 한 개를 물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동리 사람더러 물었더니 마을의 재상댁 따님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들어가 숨어서 누은 똥이라고 답하였다. 처녀를 찾아보니 과연 키가 7척 5촌에 이르므로 왕후로 봉하였다. 슈퍼모델인들 북만한 똥을 누을 수 있을까. 섹스의 심벌을 극대화시킨 대표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삼국유사> 강독 때마다 사람들은 지철로왕의 남근을 두고서 저마다 그럴듯한 해석을 해대곤 한다. 하지만 남근이 1척 5촌이나 되었겠는가.
압안지에서 나온 출토품에도 남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용도는 분명치 않으나 귀두가 분명하게 다듬어진 목제 남근이다. 신라시대의 궁녀들이 야심한 밤에 잠 못 이루다가 쓰던 물건을 연못에 버렸을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이, 조선시대 민속품 중에도 궁중의 궁녀들이 '오나니'용으로 쓰던 목각물이 다수 전해지고 있어 신라시대나 조선시대 규중 궁녀들의 '쉽게 처리되지 않는 성욕'의 해결방식을 잘 말해주고 있다. 궁녀인들 욕정이 없을 수 없었으니, 궁궐의 제도적 장치가 주는 압박감 못지 않게 성적 욕구의 발산 의욕도 강했음직하다. 민간에서도 뿔이나 가죽 같은 재료를 써서 남자 성기 모양으로 만든 아녀자들의 노리개인 '각좆'이 있었다. 그래서 '동상전에 각좆 사러 들어간 계집'일나 속담도 생겨났을 정도다. 각좆을 사려고 종로 뒷골목의 잡화상인 동상전에 들어 갔다가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웃기만 했대서 비롯된 속담이다. 신라 토우상에서도 생생한 성신앙 풍경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엄숙하기만 했을 장례식을 치른 후 순장한 무덤의 그릇에 생생한 성풍속이 연출되는 아니러니라니. 노 젓는 삿대 만큼이나 크게 묘사된 뱃사공의 '물건', 대표같이 큰 '물건'을 가슴에 품고 서 있는 남자... . 거대 남근의 '괴력'을 과시 하거나 숭배하는 듯한 인상을 던져준다.
신라 토우의 남녀결합을 보면 여자는 엎드리고 남자가 뒤에서 행하는 후굴자세가 일반적이다. 후굴자세가 동물적인 습성임은 모든 인류 성생활사의 첫장에 나와 있는데, 신라의 토기의 토우들이 이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성풍속을 말할 때 흔히들 중국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을 거론한다. 냇가에서 남녀가 목욕한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꽤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남녀가 스스럼이 없었으니 조선시대처럼 '남녀칠세부동석' 따위와는 관계없었던 시대 같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충선왕비 허씨는 7남매를 거느렸으나 왕이 죽자 숙부와 붙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엄격한 도덕윤리의 잣대는 아무래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화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남녀상열지사'가 거론되던 시절의 '뼈대 있는' 양반들 문화는 어떠했던가. 기생첩을 옆에 끼고 시를 주고받거나 공식적 축첩제도에 안주하고, '국가공인 매춘부'인 '별정직 공무원 관기'의 수청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남녀유별의 덕목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립했을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렇다고 춘향이는 과연 양반층이 의도적으로 설정했던 바대로 '열녀 춘향이' 그 자체였던가. 십대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 도령과 방안에서 '노는' 모습에서 차라리 '인간 본능의 통시대성'을 발견하는 게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우리는 여기서 조선시대 성풍속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매우 엄숙하기만 했을 것 같지만, 정작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유전하던 성풍속으 참으로 인간적이기만 했다. 비록 유교적 덕목에 의하여 남근신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손 치더라도, 그들 남근조차도 마을공동체의 공유물로 만드는 민중적 슬기를 보여주었다.
신촌 네거리에 남근을 세워둔다면?
이쯤 되면 우리의 기보상식을 조금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는 유교적 덕목이 사회윤리의 평가 기준이 되었기에 '정숙' 같은 단어만이 연상된다. 그러나 민중들의 삶 속에서 '성과 반란'의 욕구는 분명 역사책의 상식을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의 역설까지 성립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성관념은 성의 과감한 '노출'조차도 사회적인 공동체의 산물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마을 입구에 버젓이 남근이 서 있어도 음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백 년 동안 마을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남근을 세워두고, 그것도 일 년에 한 번씩 줄다리기가 끝나면 옷을 입힌다고 짚을 감아주었다. 오히려 공개되어진 사회적 성 상징물을 묵인하고 있던 건강한 분위기다. 오늘은 어떤가. 만약 선남선녀가 오고 가는 신촌 네거리에 남근을 세워둔다면 '외설시비'로 논란이 거듭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훨씬 도덕적일까. 건강하기만 하였던 사회적 성 상징물이 자본주의적 확대 재생산 과정에서 성의 상품화로 전락되지 않았던가. 물론 중세사회에도 '매매춘'을 통한 성의 상품화는 존재했다. 한량들이 장난으로 만든 춘화전을 보면, 남녀상관의 '포르노'가 여실하게 새겨져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플레이보이>지 같은 옐로 문화는 늘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일제시대의 국학자 이능화는 최초로 기생의 역사를 다룬 <조선해어화사>란 책에서 아예 '갈보종류총괄'이란 장을 독립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관아에 속한 기생, 은근하게 몸을 파는 은군자, 매음 하는 유녀인 탑앙모리, 화랑유녀, 유랑예인집단인 여사당패 등을 대표적인 갈보로 꼽았다. 갈보란 말할 것도 없이 '몸파는 여자'를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은 전통시대 성풍속과 비할 바가 아니다. 급속도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전화되고 있다. 성은 돈과 '교환'되고 있으며 잠깐씩 보여주거나 만지는 것조차 돈으로 환산된다. 그 시대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밑바닥에 있는 성풍속과 같은 시대상이 밝혀저야 한다. 성풍속을 언급하는 것이 마치 '음란한 일'인양 여기는 한 우리는 역사의 진실과 대면하기가 어렵다. 물론 푹스가 저술한 <에로틱의 미술의 역사>에 대해 베를린 지방법원에서 내린 무죄판결문처럼, 성풍속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며, 자료들은 객관적으로 선택된 것'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