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이슬람 신비주의
3) 수피와 종단
수피종단의 회원은 이슬람 전세계에서 적게는 1/3 많게는 1/2을 차지한다. 특히 수단에서는 70%를 육박하고 있다. 수피들은 알라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데 커다란 중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혀를 입안의 경구개에 대고 ‘A-lllll-aaaa-h'라고 발음한다. 이 단어를 발음하는 동안 마음 속에서 잡념들을 추방해야 한다. 디크르를 하는 동안 한 사람의 성인에 집중하는 것도 무방하다. 알라의 발음하는 속도는 다양해서 빠르게 할 수도 있고, 심장박동의 속도와 맞춰도 된다. 이것이 곧 알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방법이다. 이런 수행에는 분명히 신비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알라의 반복이 알라의 신적영광 속에 완전히 몰입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들이 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격렬하게, 그리고 일종의 황홀경으로 끌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시와 음악에 심취한 것은 8세기부터이다. 쿠란에 ‘가능하면 자주 알라를 기억하라.’라는 말이 있어 이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많이 반복했던 말은 이슬람 신앙고백의 첫째 항인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였다. 음악과 디크르가 동시에 쓰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율법을 무시한 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10세기 초에는 초심자를 위한 엄격한 규정들이 마련되었는데, 초창기에 스승과 학생이 자유롭게 토론하던 것은 차차 없어지고 학교라는 제도적인 틀 속에 행동과 사고가 엄격하게 감독을 받는 것으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이제 초심자들은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자기 스승 세이크(shaykh)에게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철저히 복종하게 되었다. 신비주의는 지배층이나 일반대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정통 이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제 수피 세이크들은 다른 권력자들처럼 찬양의 대상이 되었고, 귀족가문과 통혼하며 때로는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거나 관리하게 되었다. 13세기부터 세이크에 대한 숭배라고는 할 수 없어도 존경을 강조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그들이 신성한 지혜를 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또 그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떠맡기는 경향도 강했다. 10세기까지 수피들은 세이크 집이나 모스크에서 모여 정신적 훈련이나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 뒤에는 회합을 위한 별도의 장소를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이 곳을 주민이나 여행하는 동료의 거처 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자선행위가 정통 이슬람에서 흔히 간과되었던 데 비하여 스피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같은 수도원은 세이크나 그의 가족의 소유가 많았으나 가끔 수피종단을 위해 부유층이 기탁한 것도 있고, 12세기 이후에는 군주나 그의 부인이 기증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원 유지비용은 자발적인 헌금이나 마을의 희사금으로 충당되기도 하고 세이크가 죽으면 수도원이나 그 근처에 묻었다. 또, 기존의 묘지 근처에 새로운 수도원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수피종단은 대체로 공동묘지를 소유하여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은 그 곳에 와 복을 빌기도 하고 권력자는 묘지를 보수하거나 헌납함으로써 명예를 얻으려고 했다. 수피종단과 연관된 수도원이나 묘지들은 이슬람 출현 이전부터 있던 성지나 사당을 대체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이슬람에 있어서 성인숭배는 죽은 사람이 신의 벗이기 때문에 그에게가서 간절히 빌면 그를 통해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다. 수피들이 종단(Tawaif, 따이파의 복수)을 형성하기 시작한 때는 13세기 리파이 종단을 든다. 이 조직의 시작은 아흐마드 알 리파이의 숙부가 시작하고 리파이 자신과 그 조카에게 계승된 활동으로 소급되지만, 그의 후손들이 각 지부를 관할하면서 종단으로 발전하였다. 교육과정을 마친 수피는 후계자(카리파, Khalifah) 또는 대리인(나입,Naib)이라 불리게 되었고, 지부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새 회원을 확보하게 했다. 신참자는 규정에 있는 대로 일정 기간 은둔과 수행을 해야 하며, 창단자의 가족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종단이 가족적인 연대에 의해 결합된 것은 아니다. 본부에서 떨어져 나가 새로운 분파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것은 종단에서 가르치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적인 대립이 생겨 새로운 분파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1500년을 전후하여 아르다빌 종단의 본부가 시아파 혁명의 기치를 내걸자 지부와 제자들이 본부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분파로 독립해 버렸다. 또, 세이크의 후손들이 반드시 동일한 종단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여성을 위한 수도원이 있기도 하지만, 여성만으로 구성된 종단은 없었다. 남성들이 위주가 되어 있어서 여성들이 기성종단에 스승이나 제자의 자격으로 참여할 때는 커튼으로 격리되어 떨어져 앉았다. 수피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규정으로 묶여 있어 그 규정은 종단과 세이크에 따라 달랐다. 종단에서 정해진 규정에는 보통 신참자가 먹는 음식, 신을 생각할 때 취해야 할 몸가짐, 외어야 할 주문, 음악을 사용해서 행하는 의식의 조건들, 사용하는 악기, 춤 출 때 입는 옷, 타인의 초대에 응할 때의 조건, 수도원 출입시 지켜야 할 것,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 일상생활에서 의식주 해결하는 방법 등이 들어 있었다. 이런 규정은 종단마다 달랐다. 수피들의 주문은 수피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는데 주문에 사용되는 단어들의 차이에 따라 종단의 성격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음악과 무도는 하나의 의식으로 혼영일체가 되어 신을 찬양하고 내적인 지고의 경험에 도달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자신이 예언자임을 나타내는 징표로서 기적을 행했지만 수피들 가운데 성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기적의 능력을 비밀로 하다가 점차 공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 하면 수피의 생애는 수많은 기적의 일화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일부 수피는 자기 몸 속에 작용하는 신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몸을 칼로 찌르거나 불 구덩이에 들어가기도 하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마술적 행위가 몽고인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몽골 침입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 기독교가 예수님에게 신성을 부여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신으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노력했다. 무함마드 자신도 평범한 인간임을 강조했고 무슬림은 무함마드나 다른 어떠한 예언자에게 기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피즘이 시작된 이후 예언자 무함마드는 언제나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로 여겨졌고(심판의 날에 알라를 믿고 이슬람을 믿는다고 해야 천국에 간다고 함), 예언자의 사랑은 신의 사랑의 일부이며, 결국 그가 최후의 심판의 날에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그의 육체는 죽어 없어졌지만 영혼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성인의 특성이 예언자의 특성을 모태로 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성인의 특성을 하위개념으로 보았다. 성인의 숭배가 높아질수록 예언자의 지위는 그만큼 더 높아졌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결국 그는 우주적인 구도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예언자적 특성을 지닌 존재로 승화되었다. 쿠란에 의하면 알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무슬림 입장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에게 들어가는 문과 같은 존재였다. 쿠란 33:56 ‘알라와 천사들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축복했으니 믿는 자들아! 예언자에게 축복을 드리고 존경의 인사를 드려라.’에서 알라가 예언자에게 축복을 주었으니 ‘신께서 우리의 예언자를 축복해 주셨고 그에게 구원을 부탁했다’는 주문이 수피들 사이에 번지게 되었다. 오로지 알라와 무함마드에게 주의를 집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이 말이 반복되었다. 수피들은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알라와 합일을 이루고 꿈이나 사후에서뿐만 아니라 생전에 예언자를 목도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열망은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강렬하였다. 메니나는 무함마드의 시신이 묻힌 곳으로 말리키 학파의 본산으로 자랑하게 되었고, 예언자 숭배는 북아프리카 서부에서 예언자 후손인 알리파에 의해 더욱 장려되었다. 19세기 창립된 사누시 종단에서는 예언자와의 합일이 지고한 종교적 목표가 되었다. 무함마드의 생일은 1200년을 전후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발전하였고, 곧 이슬람 전역으로 확대되어 13세기에는 마그립까지 퍼지게 되었다.
시아의 열두 이맘파에서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에게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칼리파와 같은 지위에 추대하고 ‘이맘’이라 불렸다. 이들 이맘은 내면의 학문(계시와 인간의 내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겼고, 신의 친구 또는 성인으로 불렸다. 그들에게 예언자적 특성과 성인의 특성(이맘적 특성)은 각각 종일한 지도자의 외적 내적 기능에 불과한 것이다. 전자는 계시의 선포를 의미하고, 후자는 계시의 뜻을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자는 서로 연속되어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면 성인은 알라로 향하는 길목의 문을 열어 주고 인간의 보호자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이맘에게 많은 영광을 돌리는 시아파 교리는 처음부터 시아파 수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순니파에서 무함마드에 대한 숭배가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시아파에게는 무함마드는 물론 이맘들에 대한 신비적인 숭배가 생겨났다. 그러한 신비주의의 목적은 수피들 자신이 알리와 다른 이맘 들에게 한 걸음 더 근접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으로 계시를 받으려는 데 있다. 라마단달에 어떤 사람은 알리로부터 지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시아파는 열두번째 이맘이 사실 죽은 게 아니라 지구상 어디엔가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가 약속된 정의의 시대를 열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것이 곧 수단의 마흐디 사상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수피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스승을 바꾸거나 여러 명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경우가 보편적이었지만 10세기부터는 한 학생이 교육의 전과정을 한 사람의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나서 단지 자신의 수련에 완벽을 기하고자 다른 스승을 찾았다. 털로 된 옷을 걸친 것도 처음에 세속적인 것에 벗어나 검약과 고행을 상징했지만, 뒤에는 수피즘을 추종하고 있다는 상징물로 그 의미가 바뀌고, 나중에는 그 사람이 특정한 세이크나 특정종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옷의 형태나 색깔이 종단에 따라 서로 다르게 되었고, 학생은 많은 경험과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많은 종류의 옷을 받았다. 16세기 어느 이집트인 수피는 26개의 상이한 종단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13세기 이후 수피즘은 정규 교리수업의 한 과정이 되어 누구에게나 공인받는 학자가 되려면 수피즘을 공부해야 했고, 이런 경향은 15세기가 되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국가에서는 수많은 수피유파를 감독하도록 종정을 두어 다른 세이크들을 감독하게 했다. 수피종단은 다원화하여 모로코의 아흐마드 알 티자니(1815년 사암)는 무함마드에 의해 임명된 ‘성인의 징표’라고 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다른 종단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라고 요구했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정의를 실현해 주기 위해 나타날 존재 즉 마히드를 자처하게 된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인도, 중앙아시아에서 이러한 미혹에 빠져 자신이 이슬람 교리에서 예견된 혁명을 수행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15세기에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의 무함마드 누르바크쉬, 1500년경 자운푸르 출신의 무함마드 역시 스스로 마흐디라고 주장했다. 19세기 동부 수단에서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선언하고 대이집트-영구전쟁을 감행했으나, 1898년 그의 후대 때 무너지고 말았다. 수피들은 식민주의자들을 행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투쟁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 오스만 터키 정복에 다르까와 종단과 티자니 종단이 항거했다. 프랑스 진출에 대해 알제리의 티자니 종단은 지지했으나 모로코와 튀니지의 티자니 종단은 격렬하게 항거했다. 리비아에서는 오스만 터키에 대해 반대한 것은 물론 프랑스에 대해서도 무장운동을 하였다. 1951년 이탈리아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얻은 뒤 국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알 사누시의 후손이었다. 이처럼 수피들은 세속 지배자에게 때로는 우호적이고, 때로는 적대적 이었다. 어떤 군주들은 수피나 성자들의 축복 없이 지배권을 행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피들이 지니는 세속적인 영향력을 경계해서 또는 진정한 신앙의 회복을 위한다는 명분에서 탄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최근 수세기 동안 이란의 시피아 무즈타이드(개인적으로 추론이나 독립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는 수피즘을 거세게 비판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와하비파와 터키의 개혁주의자들도 수피즘을 거세게 공격했다. 수피즘과 쿠르드족의 전통이 결합하여 기이한 종교적 잡종이 생겨나기도 했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산간지역의 야지드 종단은 이슬람에서 악마로 여기는 공작새를 천사로 숭배하기 때문에 악마 숭배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들 자신은 사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토속신앙이 수피적 관념과 결합된 예이다. 현재 15만 명의 추종자가 이라크 모술 근처에 산다. 보통 일반인, 종교인, 지배층으로 나뉘어 있고 풀에는 사단이 들어 있어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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