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선과 악
현대서양은 ‘점진적인 신앙의 부패’로 정신적인 공백기를 맞고 있다고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종교가 쇠퇴하면서 현대 서구사회가 우주를 방법론적으로 탐험하려고 한다. 과학적인 접근의 결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의 자신에게, 그리고 그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을 이해하고 개선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접근이 아닌 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권력과 과학은 상승하고 있으나 윤리와 종교는 하락하고 있다. 더구나 유럽문화가 뿌리 채 썩고 있다고 말한다. 서양과 달리 아랍세계는 우주가 아직도 알라의 의지에 따라 예정된 궤도를 달리고 있고, 알라가 세상을 자유로이 인도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인간운명을 예정한다고 말한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알라에게 복종할 뿐이다. 무슬림의 예정론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 시작의 때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 쿠란에 근거하여 확고히 고정된 교리로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쿠란 54장 49절 ‘보라, 우리가 치수를 재어 모든 것을 창조했다. ’ 쿠란 87장 2절에서 3절은 ‘창조하시고 질서를 세우셨다. 운명을 정하시고 인도하셨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알라의 뜻에 종속되고 통제받는다. 인간이 올바르게 걷고자 해도 알라의 뜻이 아니면 올바르게 걷겠다던 인간의 의지는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방황케 하고 올바르게 인도하셨다. 이런 구절에 깔려 있는 이슬람 교리들은 이슬람 내에서도 많은 철학적 토론, 분석, 그리고 논쟁을 낳았다.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러한 내용들이 간소화되고 일반화되었다. 즉, 어떤 사람이든, 또 무엇을 하든,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직접 알라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러한 결정론적인 견해는 무함마드가 살았던 시대에도 고대 유대 즉 기독교인의 유산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전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더욱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본래의 결정론을 상당히 수정하였다. 예정론의 두 기둥, 선택의 교리와 유기의 교리는 인간의 참여없이 모두 창세 전에 일어난 하나님 자신에 의해 결정된 하나님의 결의인데, 이 결정대로 예정된 자는 구원을 받고 유기로 작정된 자는 결국 망한다는 교리이다. 이러한 예정론은 예전부터 수많은 반대에 부딪쳐왔는데, 첫째는 예정론이 운명론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1936년 칼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정된 자이고, 1942년에 발표된 그의 예정론은 은총의 총화로,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영원 전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의 죄를 담당하고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예정론의 핵심은 복음이고, 복음의 총화가 예정론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이와 달리 절대적인 의지가 아직도 냉혹한 법안에서 작동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된다. 사실 어떤 무슬림들은 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한다. 둘 다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객관적인 척도가 없다. “알라가 선이라고 부른 것은 선이고, 선을 행한 자가 덕이 있는 자이다. 비슷하게 알라가 악이라 칭한 것은 악이고 악을 행한 자는 죄인이다. ” 알라는 거의 전횡적으로 각 개인의 성격을 결정하낟. 이것은 오늘날까지 아랍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마을 사람들과 민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믿음이다. 개인 스스로 또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도 인간에게 준 하나님의 성품은 바꿀 수 없다. 신이 준 인간의 인격은 그의 생애를 통해 잔존하며 그가 살아가는 데 어느 일정한 방식을 그에게 운면지워 진다. 어느 개인의 인생에서 나타나는 사건들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이슬람의 예정론은 이미 규정된 운명만이 강조되는 기계적인 예정론인 것이다. 인간은 선택할 여지가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는 자신이 벌을 받을 뿐이다. 각 사람은 그의 것에 해당하는 운명(몫)을 받는다. 인간 자신은 어쨌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큰 일은 물론 작은 일까지도 인간은 절대적으로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 심지어 그의 행동이나 그가 행할 방법까지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 그러한 생각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같지 못했다는 것과, 나아가서는 그의 도덕성과 행위에 개인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이집트에서 에드워드 윌리암 레인(E. W. Lane)은 매우 유사한 관찰을 했는데 무슬림은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믿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무슬림이 예정론에 대한 믿음에서 다음과 같은 것에 마음이 기울어 있는 것을 보았다. 불확실성에 대한 고뇌와 괴로운 사건 뒤에 따라오는 현저할 정도의 체념과 인내로 인한 한숨 섞인 슬픔이었다. ‘알라 카림(하나님은 관대하다)’이란 외침 속에 여인들은 그들의 슬픔을 과격한 울음으로 해소하고, 예정론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무슬림은 그의 미래의 행동과 미래 사건에 대하여 짐짓 가정도 못한다. 그는 “만일 신의 뜻이라면(인샤알라)”이란 말을 빼놓고는 미래에 그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든지 어떤 상황을 기대하든지 어떤 상황을 기대하든지 어떤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집트인들은 샤으반달 15일째 되는 밤에는 그 다음 해의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예정론에 대한 아랍인들의 믿음에서 하나님이 동시에 어느 곳에나 있다고 하는 믿음과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의 표명은 그들이 어느 경우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가능하다. 오늘날까지 아립인들은 어떤 일을 할 때나 어떤 말을 할 때, 또 어떤 얘기를 들을 때 비쓰밀라(아라 이름으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알 함두릴라(아라를 찬양한다) 등의 표현을 쓴다. 미래에 관한 모든 것 즉 무언가 하려고 계획한 것, 어떤 희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에는 ‘인샤알라(하나님이 원한다면)’를 쓴다. 놀랍거나 흥분되는 것을 보았거나 들었을 때 보통 쓰이는 감탄은 ‘왈라히(맹세컨대)’등이 있다. 서민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은 다음 표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수확을 거두신다. 하나님은 안내하시는 분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운명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나님에게 되돌아간다. 하나님이 계신다. 인간은 제안하고 하나님이 정하신다.” 하나님이 아랍인의 마음속에 언제나 있다는 것과 가장 작은 일상적인 일이나 행동이라도 하나님의 개인적 결정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느다. 다시 쿠란 87:2~3장의 내용을 보자. “창조하시고 같게 만드시고(조화) 정해진 양대로 정하시고 인도하신다.” 여기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위 네 가지 사실에 따른다. 창조, 조화, 운명을 정함, 올바른 길로 인도 등이다. 모든 피조물은 조화를 위해 창조되었고 이 조화를 정해진 운명에 따라 신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든 사물은 자기 고유의 발달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사물의 운명은 다른 사물의 운명과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은 신이 행하는 선악에 대한 절대적인 능력이다. 이슬람 운명론은 나중에 발생된 것인데, 이슬람이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신은 인간에게 일정한 권능을 주어 창조했고, 인간은 일저한 규범 내에서 이 권능을 행사함으로써 선과 악이 파생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은 인간에게 언어능력을 주었는데 인간은 이 언어능력을 인간에게 선하게 또는 해롭게 쓸 수 있다. 또, 동일한 행위가 한쪽에게는 미덕이 될 수 있디만 다른 쪽에는 해로운 것이 될 수 있다. 쿠란은 인간이 신에게서 위임받은 재능과 능력을 일정한 한계적 범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다른 피조물들이 일저한 제한규범에 구속되는 이치와 같다. 이 제한된 규범이 ‘정해진 운명’이란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이 살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설정했다. 인간이 부여받은 모든 힘과 재능은 일정한 규범과 제약에 의해 제한된 상황하에서만 적절히 행사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재능은 신의 속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속성은 불완전하고 일정한 제약하에서만 작용된다. 신은 만물을 널리 보고 들을 수 있다. 물론 인간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보고 듣는 능력은 신의 전능함과는 비교도 안 된다. 인간의 속성은 무한하고 완전한 신의 속성에서 아주 초보적이고 극히 미미한 일부분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행위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속성 아래 놓이고 된다. 인간의 지식, 사물에 대한 힘의 행사 또는 사물과 관련된 의지의 표현은 일정한 기준을 갖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한계와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와 종속관계는 인간의 여러 속성과 신의 속성과의 관계와 같다. 그는 제한된 법칙 내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데 각 경우마다 상이하고 다양한 선택환경이 존재한다. 사실은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의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하기고 하고 모든 경우에 행해진 것에 일률적인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아랍인 의식구조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이슬람은 종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와도 밀접하고 다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이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곧 이슬람이라는 생각을 아랍인들은 가지고 있고, 이슬람은 인류와 함께 있었으므로 인간은 이슬람의 테두리 안에 생활해야 옳은 길을 걷는다고 무슬림은 말한다. 종교로서으 이슬람은 앞선 종교인 유대교나 기독교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예언자 무함마드가 제시한 것이므로 인간행위의 최종지표라고 아랍 무슬림들은 생각한다. 인간행위의 최종지표란 이슬람의 테두리 속에 산다는 것이며, 인간이 정해진 운명 속에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의 정면관이며, 아립인 의식 속의 운명론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이 신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며, 어떤 것이라도 신의 지배를 받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까다르(Qadar)이다. 신이 정한 자연법칙에 따라 우주만물이 운동을 하는 규범을 절대불변이고, 질서정연한 것이다. 따라서, 이 규범질서에 인위적으로 역행한다는 것은 최후 심판의 날에 지옥에 던져질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신이 정한 법규에 따라 삶을 누려햐 한다는 것이 아랍 무슬림의 의식구조이다. 인간이 행해야 할 일정한 행동이란 마치 별들이 각각 그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것처럼 인간도 신이 마련한 초월적 규범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의식 속에 아랍인의 운명관이 자리잡는다. 신은 인간 각자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믿고 있다. “개인 그 자신이나 어떤 외적요소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한 인간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어떤 일이 한 인간의 생활과정에 발생하는 일은 처음부터 신에 의해 결정지어졌다.”라는 운명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인간 스스로가 노력하여 어떤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욕망은 별로 없다.
이런 운명관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자기의 행위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사회적 접촉은 극히 평범한 것이라도 신의 이름으로 행한다. 책임은 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모든 것을 신과 결부시킨다. 개인의 운명은 영겁의 옛날부터 하늘에 있는 명판에 기입되었다고 한다. 성별, 수명, 즉 사주팔자가 정해져 있으며,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써 팔자를 고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떨어질 자도 신의 의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예정하고 있으며, 예정하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실현하며, 신이 예정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고 아랍인은 생각한다. 모든 행위의 결과를 신에게 돌리는 아랍인의 태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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