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쿠란의 수집 및 보존
쿠란 제 96장의 계시로 아랍인에게는 본격적인 문자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무함마드 초기 '알라의 말'은 길다랗고 넓은 대추야자잎이나 매끄러운 돌, 가죽조각이나 헝겊조각, 두터운 대추야자 밑동줄기, 동물의 어깨뼈를 건조시킨 넓다란 뼈, 낙타 등 위에 놓여 낙타 탈 때 쓰이는 나무, 짐승의 갈비뼈 등에 기록되었다. 이 때 교우들은 '알라의 말'을 암기하고 마음에 새기는 데 힘썼고, 무함마드에게는 일부 쿠란절에 대한 파기와 첨가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알라의 말'이 한곳에 모아 기록되지 못했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에 대한 배교와 일부 아랍부족의 자카트 지불거부 등 일련의 매우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이들 배교자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출병 시켰다. 이 때가 무함마드 사후 1년쯤(이슬람력 12년)되었는데, 이 당시 야마마(아라비아 반도의 중앙에 위치함) 전투에서 70여명의 쿠란 암송가들이 전사하였다. 오마르 이븐 알 캇땁이 이 소식을 접하여 아부 바크르에게 전하면서 쿠란 동경사들의 전가가 낳아지면 '알라의 말'을 잃어버릴까 염려된다고 밝혔다. 그는 '알라의 말'을 모아 기록하여 보존해 줄 것을 촉구했다. 아부 바크르는 오마르의 견해에 동의를 표하고 무함마드의 서기였던 자이드 이븐 싸비트, Zayd b. Thabit, 45 A.H. (이슬람력)를 불렀다. 자이드는 자국조각, 대추야자 나무줄기, 낙타의 어깨뼈, 얇은 흰돌, 파피루스 조각 등에 쓰는 '알라의 말'을 한데 모았다. 그는 '알라의 말'을 모은 쿠란원본을 아부 바크르에게 맡겼고 아부 바크르에게서, 오마르 그리고 오마르의 딸이며 무함마드의 미망인이었던 아프싸(Hafsah)에게 전해졌으며 하프싸는 오스만 때까지 이를 잘 보관하였다. 자이드가 모았던 쿠란원본 이외에 다른 수집본들이 있었는데, 이 수집본들을 소지한 쿠란 독경사들이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대도시에 퍼져 이들 대도시에서는 도시마다 독특한 독경법이 생겨나게 되었다. 가령 바쓰라 사람들은 아부 무싸 알아쉬아리('Abu Musa Al'Ash'arl, 44 A.H.)의 독경법을 따랐고, 쿠파 사람들은 압둘라히 이븐마쓰우드('Ibn Mas'ud, 32 A.H.)의 독경법을 따랐으며, 홈쓰 사람들은 알미끄다드 이븐 아므로(Al Miqdad b. 'Amr)또는 무아드 이븐 자발(Mu'adhb. Jabel)의 독경법을, 다른 시리아 사람들은 우바이 이븐 카압('Ubayy b. Kla'b)의 독경법을 따랐다. 수집본 사이에는 차이가 많았는데 그 예로 메디나에서 계시된 듯한 대략 150절의 내용이 아부 무싸의 수집본에는 있었으나 오스만본에서는 빠졌다. 이 같은 내용에 관한 차이 이외에도 낱말의 차이도 있었다. 개경장 6절의 /?ihdina/를 이븐 마쓰우드 수집본에서는 /?arshidna/로 기록되었고, 쿠란 2장 22절의 /firas/를 우바이 수집본에서는 /bisat/로 기록되었다. 또 이븐 마쓰우드와 우바이 수집본은 오스만본과 쿠란 각 장의 순서에 있어서 상당히 달랐다. 이 같은 차이는 오스만 시절에 파당의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이슬람력 25년에 샴 지역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이 합병하여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원정에 나섰다. 이 때 원정군에 참전한 후다이파이븐 알 야만(Hudhayfah b. al yaman, A.H.)은 아르메니아 정벌에서 시리아에서 온 군사들과 함께,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이라크에서 온 군사들과 함께 싸웠는데, 그들은 쿠란 독경법에 대하여 서로 달랐다. 시리아 사람들은 그들의 독경법이 다른 독경법보다 낫다고 하고, 쿠파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것은 쿠파와 바쓰라와 홈쓰의 수집본이 각각 그 차이를 드러냈다는 증거이다. 어이없고 화가 난 후다이파는 싸이드 이븐알 아쓰)Sa'id b. al 'As, 58 A.H.)와 상의한 후 이 문제를 오스만에게 보고하면서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그들 성서에 다라 나뉘어졌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까 염려되므로 곧 조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스만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고 쿠란을 암송하는 교우들 중, 자이드 이븐 싸비트, 싸이드 이븐 알 아쓰, 압둘라히 이븐 알주바이르('Abduiiah b. ai Zubayr, 73 A.H.), 압둘 라흐만 이븐 알 하리쓰 ('Abd al Rahman.b.al Harith, 43 A.H.)를 불러 쿠란사본(Mushaf)을 베껴 줄 것을 지시했다. 교우들은 쿠란사본을 베끼는 데 있어서 다음 사항을 지켰다.
첫째, 아부 바크르 시대에 자이드 이븐 싸비트가 수집한 쿠란원본을 쿠란정경의 기본으로 삼았다. 대도시의 수집본이 있었음에도 이들 수집본이 오스만본 필사 때 자료로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오스만이 하프싸에게 '오마르에게서 받은 쿠란원본을 빌려 주시오. 우리가 베낀 후에 원본을 돌려드리리다.'라고 하여 하프싸가 그에게 쿠란원본을 보내 주었다고 한다. 둘째, 오스만은 세 사람의 쿠라이시 교우에게 '여러분이 쿠란의 어느 부분에 있어서 자이드 이븐 싸비트와 의견이 다르면 쿠란은 쿠라이시 말로 계시되었으므로 쿠라이시말로 쓰시오.'라고 했으나 역사에는 그들이 오로지 하나의 낱말에만 차이가 있었다고 전한다. 쿠란 제2장 248절에 tabut를 자이드는 tabuh라고 했으나, 세 쿠라이시 교우는 tabut라고 하여 오스만에게 보고했더니 그가 tabut로 쓰라고 하였다. 셋째, 서기들은 오스만과 무하지룬(메디나로 이주한 사람)이었던 저명한 교우들, 그리고 안싸르(메디나에서 무하지룬을 도운 사람)의 감수에 따라 쿠란을 필사하였으나 크란 독경법은 베끼지 않았다. 물론, 쿠란 각장의 내용과 각장의 순서도 아부 바크르 수집본 때와 같았으나 일부 낱말의 정서법만이 달랐다. 필사작업이 끝나자 오스만은 사본 하나를 간직하고 4개의 사본을, 메카, 바쓰라, 쿠파, 샴 지역으로 보냈고 메디나에도 사본 하나가 남았다. 그리고 이 사본 이외의 것은 불사르도록 하였다. 이 때까지도 오스만본에는 점과 부호가 없어 하나의 글자가 여러 음으로 읽혀지기도 하였다. 이슬람력 50년까지도 15개 글자로 28개의 음소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일부 사본에서는 자음이나 낱말이 첨가되거나 삭제되어 다른 사본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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