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새 시대를 열어간 선도자 이성계 (2/3)
고려의 외교 실패
고려 말 원의 쇠약기에 주원장이 한족의 국가인 명을 창건하자, 그 동안 지나친 원의 내정 간섭에 불만을 갖고 있던 고려 조정은 배원의 기치를 높이면서 신흥하는 명나라와 친선관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명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계속 돌발하는데, 그 하나가 친명배원주의자 이던 공민왕 시해사건(1374년)이었다. 이는 공민왕 말년의 정신적 파행에 기인한 궁중 내 살인 사건이었지만 중원쟁패 과정에서 원과 막바지 대치를 하고 있던 명 나라로서는 미묘한 시기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고려 조정을 의심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공민왕 시해사건 두 달 뒤인 우왕 원년 11월에 환국하던 명사를 고려 호송관이 살해하고 북원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간에는 극도의 긴장이 조성되고 말았다. 고려는 명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면서도 불원과의 관계도 계속 유지하여 명의 압력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가진 명은 더욱 고려를 압박하였다. 이에 따라 배원 일색이던 고려 조정도 친원과 향명 세력으로 갈라져서 대립하게 되었고 명의 지나친 조공 요구와 압력이 거세지자 점차 명나라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고려에서 이처럼 배명 분위기가 높아지는 시기에 명은 한술 더 떠서 철령 이북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며 한층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나왔다. 철령 이북은 원래 고려의 땅으로서 원이 강점하고 있던 것을 공민왕 때 겨우 회수한 것이므로 고려의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명에 교섭 사절을 보내는 한편, 명의 자세가 확고한 것을 확인하자 결국 철령 위 설치의 전진 기지인 요동(정료위)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양국의 관계가 무력 충돌 당계로까지 치달아가는 과정에서 명에 대한 고려의 대처에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첫번째가 외교 능력의 미흡성이다.
외교 사절의 살해는 오늘날에도 전면전을 고려할 만큼의 중대 사안인데, 하물며 국제 관계에 대한 규범이 아직 정립되지 않고 무력 쟁탈이 당연시되던 그 시절에 피해 당사국의 보복적 조치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강대국일 경우 강경하고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대비했어야 했다. 또한 살해 주범이 사신을 호송하던 고려 관리이고 사건 후 명의 주적인 북원으로 도피한 사실만으로도 고려에 대한 명의 의심과 강경한 조치는 예견되고도 남았다. 따라서 명분상으로도 불리한 사안이고 힘이 지배하던 시대임을 고려하면 고려 조정은 더 충분한 매염과 외교적 해결에 진력했어야 했다. 더욱이 명사가 살해된 곳인 개주참이 고려가 회복한 고토였는데 이 지역이 일국의 사신이 살해될 정도로 치안이 부재한 상태였음을 은근히 공박한 일면도 있었다. 즉, 요동에서 철령까지를 힘의 공백 지역으로 몰아세워 자신들이 70개의 참을 세워 통치하겠다는 것이므로 고려는 명분과 현실에서 모두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연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실제로 복속시킬 의도가 확고하였겠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공식적으로 통고 절차를 거쳤으므로 확실한 실행 의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후 고려가 회복한 땅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 명의 자세로 비추어 볼 때 당시의 명의 태도는 고려 조정 길들이기의 일환일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요동 이동 지역을 오랑캐의 땅으로 치부하여 중원으로의 편입에 대한 뜻이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당시는 북원과의 막바지 대치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지만 고려와의 무력 충돌도 내심 원하지는 않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려가 외교적 방법을 십분 이용했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당시의 국제 관계에서 힘의 이동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 고려 조정의 무능함이다. 당시 원의 세력은 명에게 계속 밀려 북쪽의 척박한 지역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고려는 원의 패망을 예견하지 못하고 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명의 의심을 더욱 사게 되었다. 이는 일견 원을 통해 명을 견제해 보려는 중립외교의 자세로 보여지지만, 이미 원은 지는 해였으므로 일찍이 이를 간파하여 명과의 관계 정립을 외교 정책의 주축으로 삼았어야 했다.
세 번째로 중요한 실책은 당시 고려가 강대국인 명과의 무력 대결을 불사할 정도로 결코 안정적이지 못하였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당시는 누적된 말기적 증상이 민생을 괴롭히고 있는 가운데 국토의 남부 지역은 왜구가 창궐하고 있었고, 북쪽은 전쟁에 대비한 성을 수축하는 데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구나 왕이 개인적 향락과 전쟁 준비 독려를 이유로 서해도 지방의 출입이 잦아 이를 시중드는 것만도 벅찬 데다 농번기에 전국적으로 군사를 소집하기까지 하자 자연히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우왕은 정벌 반대의 소리가 커지자 강경 무인과 친위 세력 중심으로 정벌 계획을 비밀리에 수립하여 전쟁을 위한 총화 체제가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출병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벌 반대 세력의 중심인 이성계를 군사력이 거의 총동원된 출병의 주요 지휘관으로 삼았던 것이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위화도 회군
어쨌든 우왕 14년(1388년)에 요동 정벌의 북은 드디어 울리게 되었다. 고구려와 발해 이후 중원 공략을 포기했던 이 땅에 사는 민족의 마지막 거병이 시기적으로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민족 정기의 차원에서 볼 때 자존의 발로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현실로서는 무모한 발상일 수도 있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는 이성계의 권력 획득과 조선 창업을 위한 역사적 무대 장치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명의 무리한 공물 요구와 갖가지 트집에 시달리던 고려는 백년 만에 회복한 고토를, 원나라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으므로 자신들이 다시 지배하겠다는 명의 강압에 공분하여 출병을 강행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견지에서는 산적한 내부 불안으로 인해 힘에 겨운 결정이었다는 것을 출병 다시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우왕은 표면적으로 정벌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사냥을 한다며 해주 백사정으로 떠났다. 명에 대해서는 위장 전술일 수 있지만 내부적으로도 당당히 공표할 정도로 의사 결집이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정벌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으면서도 우왕은 전면전에 대비하여 문화찬성사 우현보에게 개경을 지키게 하고 왕실 가족들은 한양 산성에 옮겨 머무르게 하였다. 내부적으로 이미 정벌을 결정하고 개경에서 3월 중순에 평양으로 출발한 우왕은 그 해 4월 1일에 봉주에 이르자, 그 동안 최영 등 강경파들과 암암리에 계획하였던 정벌의 뜻을 이성계 등에게도 통보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현실론을 내세워 반대하였지만, 왕의 입장에서도 이미 출병의 뜻을 세우고 그곳까지 왔는지라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출병은 기정 사실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왕은 곧바로 평양으로 이동하여 전국의 군사를 집결케 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도록 하여 진군의 채비를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정벌군의 지휘부로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여 평양에서 정벌군을 통독하게 하고, 실 병력 지휘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에 의하여 절제를 받도록 하였다. 이때 최영은 직접 병력을 통솔하여 현지 지휘를 하려고 하였지만, 우왕이 자기 주변에 남아 있기를 권하여 실제 출진하지 않았는데 그 후의 사태 진전을 보면 이것이 결정적 실수였다. 이때 총병력은 군사가 좌우군 합쳐 3만 8830명, 겸속이 1만 1534명으로 5만 명이 조금 넘었고 말이 2만 1681필이었는데, 통칭 10만 군이라고 불렀다. 정벌군 병력은 4월 18일에 평양을 떠나 5월 7일에 드디어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게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탈주병이 끊이지 않는 등 정벌군의 사기가 크게 저조하였다고 하는데 조선 창건을 미화하기 위한 의도가 게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의 출병이 강군과 정병으로 잘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압록강 부근에 큰비가 내려 도강을 위한 부교가 떠내려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까지 발생하자 이성계는 다시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내세워 정벌의 무리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 의 견을 묵살하고 내관인 김완을 파견하여 진군을 재촉하기만 하였다.
이렇듯 진군이 압록강에 가로막혀 지체되고 있었고 출병군 상하 모두의 정벌 의지 또한 극도로 미흡한 가운데 진중에서는 불안한 소문이 퍼졌다. 이성계가 이미 친병을 대동하고 동북면으로 철군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소문에 따라 출병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진중 민심까지 뒤숭숭하게 되자, 결국 회군 여부의 최대 변수였던 좌군도통사 조민수마저 회군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 후 출병군 제 장수를 모두 회유한 이성계는 5월 22일에 마침내 군사를 되돌려 역사적인 회군을 하게 되었다. 회군 시작 이틀 뒤에 성주 온천에 가 있던 왕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지자 왕의 일행은 황망히 자주, 평양, 중화를 거쳐 29일 이른 새벽에 허겁지겁 개경으로 환궁하였는데, 이때 왕을 따른 병력은 겨우 50여명에 불과했다. 또, 출발할 때에는 한 달 가까이 걸린 길을 5일만에 돌아왔으니 그때 왕의 낭패감은 눈으로 보는 듯하다.
이성계의 회군 병력도 6월 1일에 개경에 이르러 숭인문 밖 산대암에 진을 친 다음 우군은 유만수가 지휘하여 숭인문 쪽으로, 좌군은 선의문 쪽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최영의 수성군에게 밀려서 성 안으로 진입을 못하자 이성계가 직접 전군을 총지휘하여 마침내 왕궁의 담까지 헐고 들어가서 끝까지 왕을 보위하고 있던 최영을 붙잡아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애초에 수성군은 회군 병력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하여 회군 시점에서 이미 대세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고려 조정이 군사력을 동원하면서 자체 수비 병력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정벌군이 반란군이 되었을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동원 가능한 병력 대다수를 출병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고 보면 무리한 감행이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회군 세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최영은 고봉현으로 귀양을 가고 합포, 충주 등으로 이배 되었다가 참수되었고,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난 후 잠시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창왕과 함께 사사됨으로써 사실상 고려 왕조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결국 위화도 회군은 인간 이성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역사의 결정적 장치일 뿐만 아니라, 한 인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에서 준비되었던 묘한 전환점이었다. 그러한 상황의 연출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몫이며 우리는 그때까지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인간의 모습과 결정적 순간에서의 선택이 그 후의 인생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갈림길에서의 선택은 전인격적인 체취의 발로이자 이해의 가치를 넘어 사건 전후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에 기초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을 결정한 이성계를 후세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즉, 역사적 인물 가운데 생존시의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 받는 사람도 있으나 이성계는 판단의 비범함으로 인하여 더욱 우리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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