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충절과 의리의 대명사 성삼문 (1/2)
성삼문은 당대의 석학이요 촉망받던 관료였지만 자신의 영화를 뒤로하고 의리와 충절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만고의 충신이었다. 그의 불요불굴의 정신과 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세조 이후 암묵적으로 추모되었으며 결국은 충신의 표본으로 인정되었다. 부당한 권력을 거부하고 원상 회복을 주도하여 자신이 배운 학문과 신념을 실천하였으며 꺾이지 않는 기개와 지조를 지켜서 올바른 선비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개인의 이익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세태 속에서 자신을 던져서라도 바른 길을 찾아가려 했던 그는 죽어서도 영원히 살아있는 참된 지식인의 표상이 되었다.
혹자는 비명의 죽음으로 인해 아까운 재능을 사장시키는 것은 역사에 기여하지 못하는 행위라고 사시적인 시각으로 비판하는 경향도 있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변해도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의 충절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짧은 생애로 인하여 당시대에 실물적 기여는 없었다 해도 영원히 변치않는 정신적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기 때문에 역사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간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그나마 바른 길을 가지 못했을 때 부끄러움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한다. 성삼문은 훈민정음 창제에 일익을 담당한 것 등 실제적 업적도 찾아보면 상당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꺾이지 않은 지조와 신념과 행동이 일치된 삶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그를 추모하는 것이다.
집현전 학사가 되다
성삼문은 조선 3대 왕인 태종 18년(1418년)에 홍주(현 홍성)에 있던 외가에서 무관인 성승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해는 세종이 태종에게 양위를 받아 등극한 해이기도 하여 성삼문은 태어날 때부터 세종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된 셈이다. 그의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근보이고 호를 매죽헌이라고 했다.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하늘에서부터 "낳았느냐?"고 묻는 환청을 세번이나 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지었다. 성격은 쾌활 명랑하였고 익살스러운 면이 있어 실없는 말도 곧잘 하면서 행동거지에 맺힌 데가 없는 담백한 성품이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견실하고 범할 수 없는 기상이 가득하여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그였지만 주위에서 함부로 대하지를 못했다 한다. 18살 때인 세종 17년(1435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3년 뒤인 21살 때 훗날 거사 동지로서 생사를 같이한 하위지와 함께 식년시 정과에 합격하였다.
이 후 집현전 학사로 선발된 그는 25살(1442년)때 우수한 인재의 학문연구를 지원하는 사가독서 제도에 의하여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에 있던 진관사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번잡한 현실에서 멀리 떠나 조용한 산사에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라는 일종의 장기 휴가이자 정책정 배려인 셈이었다. 집현전 학사로 선발되었다는 사실도 출세가 보장된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수재로 인정 받았으니 그의 앞날은 탄탄하게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으로서 세종에 의하여 실질적 연구기관으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세종대에는 그 의미가 자못 중요했다. 집현전은 겸직으로 영전사와 대제학이 최고 관리자들이었지만 실제 직무는 전임직인 녹관이 담당하였다. 이 녹관을 일명 학사라고 불렀으며 10명의 경연관과 10명의 서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로 왕과 세자를 위한 학문의 진강과 사령의 제찬, 중국 고제에 대한 연구, 역사서를 비롯한 기타 서적 편찬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비록 학문 연구 기관으로 설립되었지만 군주와 상시 대면하여 자문을 담당하면서 자연히 정치적 기구로 변모하게 되었다. 정학일치의 시대 사조는 높은 경지의 학문 실력을 쌓은 집현전 학사들을 현실 정치에 참여시키는 환경이 되었던 것이다. 근무는 매우 엄격하여 다른 관청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였으며 밤에도 항상 윤번으로 숙직하여 왕과 세자의 학문상 자문과 토론의 상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최대 학문 연구기관이자 강력한 언론기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집현전이었지만 세조대에 이르러 단종 복위 운동의 주모자와 반대파들이 집현전에서 대거 나오면서 폐지되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 이러한 집현전에 세종은 물론 학문을 부왕만큼이나 좋아했던 세자 향(문종)도 자주 출입했다. 세자는 특히 성삼문을 좋아하여 그가 숙직을 서는 날이면 종종 찾아와 밤이 늦도록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집현전 연구의 최대 성과는 역시 훈민정음 창제이다. 일찍이 세종은 정음청을 두고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최항 등에게 우리글을 연구하여 찬정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다방면으로 연구를 거듭하던 그들은 때마침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이 요동으로 귀양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음운을 정확히 알기 위해 성삼문과 신숙주가 무려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고심 노력한 끝에 마침내 세종 28년(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공포하였다. 그 후 성삼문은 세종 29년(1447년)에 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하여 동국정운을 제진하는 작업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세종 31년(1449년)에는 명나라에서 예겸이라는 사신이 왔었는데, 시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어서 마땅히 대응하여 접대할 적임자가 없자 성삼문, 신숙주 등이 한운도 물을 겸 만나게 되었다. 성삼문과 신숙주를 만나본 예겸은 두 사람의 재능과 학문에 심취하여 형제의 의를 맺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예겸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성삼문 등을 극구 칭찬하여 4년 뒤에는 그 제자인 장영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가 스승이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성삼문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죽은 후라서 몹시 애석해 했다고 한다.
운명의 계유정난
세종과 문종은 특히 성삼문을 총애하여서 세종 말년에 지병 치료차 온양 온천에 거동할 때도 성삼문을 반드시 수행하도록 하였고 문종도 세자 시절부터 그를 각별히 가까이하였다. 문종은 학문을 즐겼으며 등극한 후에도 부왕 못지 않게 선치를 베풀었으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것이 탈이었다. 그래서 그의 높은 학문과 덕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재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39살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종은 죽기 얼마 전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이때 왕은 어린 세자 홍위(단종)를 무릎에 앉히고는 등을 쓰다듬으며 훗날을 간곡히 당부했다. 당시에 이미 문종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어린 아들의 앞날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린 세자를 안전하게 보필하기로 다짐했는데, 훗날 그 중에서 신숙주만이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세종 또한 맏손자인 홍위를 무척 사랑하여, 홍위를 세손에 책봉하고는 성삼문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불러서 어린 손자의 앞날을 부탁한적이 있었다. 이렇듯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걱정하며 집현전 학사들에게 장래를 부탁한 홍위가 바로 비운의 왕 단종이다. 문종은 운명하기 전에도 정승들인 황보인 정분, 김종서에게 세자를 잘 보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눈을 감을 정도로 어린 아들의 앞날을 염려했다. 이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걱정을 뒤로하고 문종이 죽자 세자 홍위가 12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를 이었는데, 그의 앞에는 태산 같은 숙부들이 10명이 넘게 버티고 있었다. 또 왕실 직계 어른으로 어린 왕이 장성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해줄 인물이 없었던 것도 그의 불행이었다.
세종은 왕비 심씨에게서 낳은 8명의 아들이 있었고 후궁에게서도 10명의 왕자를 두었다. 그런데 정비 소생 왕자들은 맏아들 문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성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이 가장 걸출했다. 왕이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다 보니 세상은 이들 유력한 대군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은 안평대군 주위에는 문인과 관료들이 몰려들었고, 수양대군에게는 주로 무사들과 소외 계층이 모여들었다. 당시 모든 정사는 문종의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이 처리하고, 왕은 형식적인 사후 승인을 하는 데 그쳤는데 자연히 의정부 수장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왕실 측근 세력들과 중간 관료층은 이것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에 따른 사은사로 명나라에 자기가 직접 가겠다고 청하고 나섰다. 이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무엇보다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수양은 평소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선발하여 동행하였는데 그 인연으로 신숙주는 집현전 동료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사은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이 무계정사를 세워서 장사패를 모으고 경성에도 무기도 몰래 한성으로 반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챈 수양은 거사를 서둘렀다. 결국 수양대군은 정국의 축이며 실권자인 김종서를 제거한 다음 왕명을 빙자하여 중신들을 입궐케 하여 반대파와 장애가 될 만한 인물을 모조리 주살하고는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로 유배시킨 후에 사사하는 것으로 권력 장악 계획을 마무리 지었다. 수양은 이 정변에 대하여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사태가 급박하여 왕명을 얻지 못하고 자신이 나서서 이를 토벌할 수 밖에 없었다며 정변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수양은 정난 후 자신이 영의정 부사, 이조,형조 판서, 내외병마 도통사를 겸직하여 인사 행정에서 병권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공을 찬양하는 교서를 집현전에서 작성하여 발표하게 하고 정변에 참가한 동조자들은 안평대군의 반란을 미연에 막은 공으로 자기와 함께 정난 공신에 봉하게 하여 친위 헤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때 공신록에 오른 인물은 수양을 포함해서 36명이었는데 성삼문도 집현전 관리로서 직숙의 공이 있다 하여 3등 공신에 올랐다. 당시 공신녹권을 받은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축하연을 열었지만 성삼문만은 끝까지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공도 없이 공신 대열에 끼였다고 하며 공신록에서 빼줄 것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가 수양이 일으킨 정변에 대해 반감까지는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이다.
단종 복위 거사의 실패
성삼문은 단종 2년(1454년)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가 곧이어 조 참의로 승진되었으며, 그 다음해에는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선위사로 의주에 파견되었다가 공교롭게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윤 6월에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 단종이 가시방석 같은 보위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자 그 달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여 예방승지의 직무상 성삼문이 국새를 갖다 바쳐야 했다. 왕명에 의하여 옥새를 품에 안고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면서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을 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뜻있는 사람들의 비분강개에도 불구하고 선위의 절차는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근정전에서 수양대군의 등극식이 치러졌다. 이렇게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바로 조선 7대 왕인 세조였다. 세조는 즉위하여 영의정에 정인지, 좌의정에 한확을 임명한 후 내정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세조는 모든 공사는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에서 직접 국왕에게 보고하게 하였으며 언관들의 기능도 약화시켜 버렸다. 또한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좌익 공신에 봉하여 충성을 유도하고 지방 관리들도 심복으로 교체하는 한편 그것도 못 미더워 분대어사까지 파견하여 감시하였다. 그러나 비록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그 행위는 당시 사회규범이던 유교 윤리관에 비추어 보면 대의명분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으며 선대왕의 유지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성삼문을 위시한 유신들은 의리와 정분으로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은인 자중하며 단종 복위의 때를 노리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세조 2년(1456년)에 조선의 새왕이 등극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명나라로부터 고명 사절이 왔었는데 6월 2일 이들에 대한 환송연이 창덕궁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 마침 성삼문의 아버지 도총관 성승과 유응부가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으로 내정되어 그날 거사를 실행하기로 작정하였다. 연회석상에서 왕의 호위무사로 선정되어 유일하게 무기를 소지하게 된 두 사람이 세조와 세자를 처단하는 것을 신호로 일시에 각자 정한 소임에 따라 한 자리에 모인 공신 세력들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처음부터 무산되고 말았다.
세조가 도승지 한명회의 건의에 따라 별운검을 폐지하고 몸이 약한 세자도 연회석상에 참석하지 않도록 조처한 것이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성승과 유응부는 무장을 갖추고 행사장에 입장하려고 하자,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명회가 별운검 폐지를 통보하며 입장을 제지하였다. 이에 성승과 유응부는 분기 탱천하여 한명회부터 주살하려고 하였지만 한명회 옆에 있던 성삼문과 박팽년이 황망히 그들을 말렸다. 세자도 참석하지 않았고 별운검으로 행사장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한명회만 죽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인이었던 유응부는 완강했다. 세자가 없다 하더라도 세조와 그의 추종 세력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들을 모두 처단하고 세자는 상왕의 명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체포하면 된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거사 세력들이 이구동성으로 만류하여 유응부도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연기하는 데 동의하였는데, 여기에서 거사모의가 누설되는 결정적인 틈이 생기고 말았다. 거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에 불안해진 김질이라는 인물이 모의 사실을 자신의 장인인 집현전 대제학 정창손에게 고변하여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정창손은 사위인 김질로부터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를 전해 듣고 곧바로 대궐로 들어가 이 사실을 밀고하였으며, 그날로 성삼문을 위시한 모의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다음날 세조가 천국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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