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미녀들의 신화 - 김남석
제1장 사랑은 전설이 되어
죽어서도 아름다운 미의 대명사, 그레이스 켈리
"나는 작은, 이름없는 꾳에 묻혀 잠들고 싶다."
스크린의 여왕에서 실제 여왕의 자리까지 차지한 그레이스 켈리.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태양의 나라 모나코의 황태자였다. 배우로서 가장 인기가 있을 때 과감하게 배우 생활을 끝내고 300개가 넘는 왕궁의 안방마님이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현대판 신데렐라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만 예기치 않은 자동차 사고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남긴 채 아스라이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비록 그녀는 갔어도 그녀가 남긴 아름다움은 오늘까지도 퇴색되지 않은 채 전해 오고 있다.
인생의 방향 전환
모나코의 황태자 레니에는 칸느 영화제가 열리던 어느날 그레이스를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보아 온 여자 중에서 그녀만큼 기품 있고 우아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실 왕비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아름다움 뒤에는 위엄도 있어야 하고 지식과 지혜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했다. 그런 여자만이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수 있는 거라면 수 많은 아름다운 여성 가운데 그레이스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뛰어나게 아름다웠지만 우아함에서 부족하고, 마릴린 먼로는 기품이 없었고. 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열연을 보였던 오드리 헵번은 깜찍하지만 위엄이 없었다. 할리우드에서 이 모든 것을 갖춘 여성을 꼽는다면 그레이스밖에 없었다. 자격은 곧 기회를 불렀다. 1995년 칸느 영화제 때 그레이스는 모나코 왕궁을 방문했고, 그녀의 인생은 그대로 방향 전환을 하게된다. "저는 파리 마치 기자입니다. 모나코 왕궁에서 그레이스 켈리양과 레니에공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데요." "모나코는 참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정말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그레이스 켈리는 함께 사진을 찍을 사람이 독신인 줄도 몰랐고 또 왕궁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지만 흔쾌히 승낙을 하였다. 모나코는 칸느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왕궁에 도착하자 이미 연락을 받은 레니에가 나와 손님들을 안내했다. 방이 300개나 되는 왕궁 내부와 정원 그리고 작은 동물원까지 그레이스를 안내하면서 그는 정성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카메라 셔터가 눈부시게 터졌지만 레니에는 평소처럼 얼굴에 아무런 표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레니에가 그레이스에게 반해 어떤 말이라도 나올까 싶었지만 그저 자신의 집을 찾아온 먼 나의 손님을 맞이하는 정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모나코 왕궁에 갔다 온 후에도 그레이스는 레니에와 아무런 스캔들이 없었다. 모두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 그레이스 켈리는 <백조>의 촬영에 들어가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백조>는 우연하게도 한 나라의 왕자를 사랑해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그레이스는 필라델피아의 부모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나코의 레니에가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여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레이스 켈리는 다소 흥분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이유로?" "미국에 오시는 목적은 건강진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공식적인 방문이라 언론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레이스는 흔쾌히 승낙했다. 지난번 모나코 왕궁에서 사진도 함께 찍은 인연도 있었고, 한 나라의 왕자가 직접 자신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오겠다는데 거절할 명분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레이스 켈리도 모나코 왕궁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독신이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니 한마디로 백조가 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그해 마지막 날에 레니에는 파니에서 춤을 추며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
"그레이스, 나의 궁전은 혼자 지내기엔 너무 넓어요."
그레이스는 레이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남편이 그레이스 켈리 부군이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결혼한다면 남편의 성을 따르고 싶습니다."
모나코 왕비로 불리고 싶다는 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우회적인 말로 결혼을 청하고 승낙을 한 것이었다. 결혼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그레이스 켈리는 그 동안 교제를 해 오던 유부남 오레그 카시나에게 전화로 짤막하게 알렸다.
"신문에서 읽기 전에 내 입으로 말하고 싶어요. 저 레니에 3세의 부인이 되기로 승낙했어요."
이것이 그레이스 켈리가 마지막으로 미국 사회에서 로맨스를 불태운 남자에게 했던 작별의 말이었다. 망명한 러시아 귀족의 손자로 파리에서 태어난 오레그는 로마와 뉴욕에 가게를 갖고 있는 유명한 드레스 디자이너였다. 그레이스는 그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이혼 경력이 있는데다 플레이보이로 소문이 나 있어 부러울 것이 없는 그레이스 켈리 집안에서 반대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그레이스 켈리 집안은 부자였다. 아버지는 필라델피아 건축 회사의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모델 출신인 미인이었다. 그레이스의 백부는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극작가였다. 그로 인해 그레이스 켈리는 돈 떄문에 아무 영화에나 출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배역과 영화만 선택해서 몰두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출연한 11편의 영화가 모두 성공을 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세기의 결혼
1956년 4월, 모나코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레이스 켈리와 부모는 여객선을 타고 모나코로 향했다. 일행 모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전야제에 뒤이어 결혼식은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두 차례에 걸쳐 거행되었다. 법률상의 결혼식과 종교상의 결혼식이었다. 르네상스식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레이스와 나폴레옹 시대를 연상시키는 훈장을 단 레니에공의 결혼은 바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감상하며 사람들은 밤새 춤을 추었다. 모두들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축복하고 있었다. 세기의 결혼으로 불린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공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하객들이 몰려들었다. 호텔마다 만원이었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취재하기 위해 각국에서는 2,000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왕족이 있는 영국은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우리 영국은 발레단을 보내겠소." "우리 프랑스도 발레단을 보내겠습니다."
만약에 그레이스 켈리가 왕자를 낳지 못하면 모나코는 프랑에 합병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또한 그레이스 켈리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유럽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으면, 온 세계에서 사절단을 보내 이 결혼식을 축복해 주었다. 군함에 탄 수병들이 모나코를 방문하여 결혼식을 축하하기도 아였다. 모나코 국민은 물론 소많은 관광객들이 한집안 식구처럼 즐거워하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세기의 결혼식을 축복해 주었다. 19일 저녁,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으며 탄생한 이 부부는 레니에의 요트'데오쥬반테'를 타고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결혼식 소동은 일주일씩이나 계속되었다. 모나코로서는 그레이스 켈리를 신부로 맞이한으로써 현실적으로 몇 갑절의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뜨거운 태양과 지중해의 에메랄드빛으로 둘러싸인 꿈 같은 작은 나라. 관광과 카지노의 수입으로 사는 2만 5,000의 구구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낼 필요조차 없이 부유하게 살았다. 게다가 그레이스가 모나코로 시집을 감에 따라 삽시간에 미국인들의 모나코 여행이 급증했다. 이 때문에 모나코는 관광 수입이 부쩍 늘어 국민들은 이래저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황태자의 아내가 된 후, 일절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녀의 팬들로서는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었지만,그녀는 배우로서 가자 인기 절정에 있을 때 과감하게 배우의 일생을 정리한 것이이었다.
"성공이나 명성도 서로 나눠 가질 상대가 없으면 허무할 뿐이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영화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작은 나라의 왕비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며 모나코를 이을 왕자를 낳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이윽고 그레이스 켈리는 차례차례 세 아이를 낳아 모나코를 프랑스에 합병당할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그레이스에게 왕궁 생활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크게 웃을 수도, 누구와 잡담을 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게다가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니에와의 생활은 자유롭게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다소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탄탄하게 다져진 연기 훈련 덕택에 무난하게 왕궁 생활에 적응을 했고 쉽게 왕궁의 법도를 익힐 수 있었다.
"내가 배우 생활에서 익힌 시간을 엄수하는 일, 같은 일을 몇 차례고 되풀이하는 일, 화장하는 방법, 걸음걸이, 남과 접촉하는 방법 등은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한 나라의 왕비로서 만족을 하며 아무탈 없이 지냈다.
이름없는 꽃에 묻혀 잠들고
1957년 1월에 공주 캐롤라인을, 이듬해 알베르도 왕자를, 그리고 65년에 스테파니 공주를 낳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매일 분주하게 살았다. 왕비이면서 한 사람의 아내이고, 또 어머니이면서 300개가 넘는 방이 있는 궁정의 여주인이기도 했던 그녀로서는 바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서너 차례 옷을 바꿔 입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낮에 입는 옷, 만차을 위한 드레스, 발레나 오페라를 관람할 때 입는 옷..... 모나코 왕궁에서 그레이스 켈리의 이야기가 나오면 세계는 귀를 번쩍 뜨고 소식을 전하느라 바빴다. 장녀 캐롤라인이 자라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호텔왕의 아들 테니스 보그와 장 폴 벨몽드 등을 상대로 염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끝내 캐롤라인은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19년이나 연상인 플레이보이와 결혼을 했다가 곧 이혼을 하고 말았다. 세계의 언론은 캐롤라인의 염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흥미거리로 삼았다. 언제부터인가 모나코 왕궁은 스캔들의 원산지로 지목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그레이스 켈리는 더욱 자녀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자식만큼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훗날 모노코를 이끌고 나갈 알베르도 왕자도 심심찮게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고, 차녀인 스테파니도 담배를 피우며 디스코에 열중하였다. 그레이스로서는 세상의 평범한 부모들보다 몇 배 더 머리 아픈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자녀들의 염문은 늘 세계적인 특종감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특종은 그녀의 최후에 찾아왔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고 소식이 모나코 왕궁에서 흘러나왔을 때 세상은 온통 슬픔에 잠겼다.
"1982년 9월 13일, 별장에서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오던 왕비께서는 산길에서 급커브를 돌다가 40미터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곧 몬테카를로 병원으로 운반되었으나 상태가 매우 위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고 소식이 전세계로 빠르게 전해졌다. 모나코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그녀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하며 국민들은 모두 침울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이튿날인 14일 오후 10시 30분에 머나먼 나라로 떠났다. 26년간의 가장 행복한 결혼 생활과 53년 동안 불꽃처럼 타올랐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죽기 전에 그레이스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다.
"난 작은, 이름없는 꽃에 묻혀 잠들고 싶어......."
죽음이 찾아와 눈을 감으면서도 생전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변함리 없었다. 미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녀가 남긴 주옥 같은 영화와 생전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오래도록 잊여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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