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 이원용
변신을 거듭한 천재 화가 피카소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스페인의 화가로 본명은 루이지 피카소 안달루시아 지방의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1901년에 파리로 가서 로트레크(H. T. Lautrec)의 영향을 받았다. 1907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려 큐비즘을 창시했고, 1920년경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로 돌아갔지만, 1925년경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아 특이한 변형에 의한 조소족 표현을 시도해 '변형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후 각종 표현 방법을 받아들여 자유스런 조형을 구사했다. 1937년에는 반전적인 대작 '게르니카'를 발표했으며 파리의 레지스탕스 운동의 투사들과 사귀면서, 전후에는 공산당에 입대했다. 석판화, 조각, 도기 등도 제작했으며 20세기 현대 미술의 최고봉으로서 미술은 물론 다방면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이후의 대혁명'을 이룩한 화가
피키소는 20세기 초에 큐비즘(Cubism)이라 불리는, 지금까지와는 전연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하여 서양의 미술사에서 이를 '르네상스 이후의 대혁명'이라고 말하는 미술사가도 있다. 그러한 방법의 한 예를 들면, 옆 얼굴과 정면에서 본 얼굴을 동일한 화면에 동시에 그려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이나 코 또는 입같은 것을 익살스럽게 배치하는 등의 방법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피카소 이전에는 전연 볼 수 없었던 기법의 그림이다. 그런가 하면 인체를 조각조각으로 떼어서 그리는 등 피카소만의 독특한 수법으로 창조해 냈다. 이런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그렇듯 대담하게 그릴 수 있는 재능 또는 용기에 탄복하게 된다. 실제로 독특한 발상이나 묘사법에서 피카소에 필적할 만한 화가는 없다. 이렇듯 파격적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피카소가 천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가지 제약들에 얽매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보통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는 사람은 천재하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화가를 대하고 하면 어떻든 피카소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천재 피카소'라고 자주 불리는데, 이는 아무도 시도해 본 일이 없는 경지를 개척해, 사람들에게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열어 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약 80년에 이르는 그의 생애를 바라볼 때, 우선 느끼게 되는 것이, 이미 이루어 놓은 스타일에 안주함이 없이 변신을 한 것이다. 그러한 그의 솜씨나 '청색 시대'와 큐비즘의 시대에 이어 콜라주(초현실주의의 한 수법으로 신문 광고 사진 등을 잘라내어 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수법) 시대 식으로 스타일을 변화시킨 '변모하는 화가'라 불리게 된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완성된 자신의 스타일 그대로 똑같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많지만, 피카소는 스타일의 반복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는 그와 같이 변모하는 일에 사로잡힌 것일까. 그런데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이에 필요한 어떤 연구와 공부가 수반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존재라 불리는 화가가 어떤 공부를 했을까. 도대체 그와 같은 공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 문제는 일반인들이 매우 흥미롭게 생각할 것이라 여겨진다. 어떻게 하면 화가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하는 것보다 재능이 한층 중요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가도 사실 그 나름대로 공부를 해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피카소는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스타일을 부정하는 화가
피카소의 초기의 작품을 볼 때 반드시 느끼게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가 이미 10대 때 화가로서의 완전한 기술과 관찰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14세 때 그렸다고 하는 '맨발의 소녀'라는 그림이 있다. 벽을 배경으로 하고 앉아 있는 소녀가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소녀의 검은 눈동자가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고는 놓아 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적절하고 정확한 터치에 겸해 마주잡은 손이나 우람한 발의 표정이 인간의 존재감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훌륭한 그림은 어떤 것인지 간단히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사람의 뇌리에 깊고 강하게 새겨지는 것이 명화의 조건이라면, 이 그림은 바로 이에 해당되는 명화라 할 수 있다. 피카소가 변모하는 일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초기의 작품들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으로 미숙한 점이 한 곳도 없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스타일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도 어린애와 같은 그림은 단 한 번도 그린 일이 없다고 한다. 그와 같이 조기 완성의 화가한테 남아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즉 똑같은 스타일을 가지고 계속 그려 나가든가, 아니면 계속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내든가. 이렇듯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는 데는 화가 자신의 개성이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의 경우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미 흥미가 없다. 자신의 작품을 흉내낼 정도라면 차라리 남의 작품을 흉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떻든 간에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대단히 좋아한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로서 피카소에 대한 훌륭한 전기를 집필한 롤랜드 펜로스가 한 말이 있다. 그는 이어 "대부분의 화가들이 자신의 생애에 가장 좋은 작품으로서 만족할 게 틀림없는 정도의 그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피카소는 14세 때 벌써 일생의 최고 걸작을 완성시켜 놓았다는 말이다. 등산가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갓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단번에 세계 최고봉을 정복해 버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등산가는 더 높은 산이 또 어디에 없을까. 그런 산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정복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이 그렇듯 높은 산을 만들어 놓고 싶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미술의 세계에서 피카소가 도전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피카소는 그야말로 변신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가 가장 피하고 싶어한 것은,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는 일이었다.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으로 모든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피카소는 회화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쪽에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딘지 모르게 전에 누군가가 그린 작품과 비슷한 점, 즉 닮은 점이 있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피카소의 작품으로 일반인들이 대체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그의 데생이며, 그 밖의 것으로는 '청색 시대'에서 '장밀 빛깔의 시대'까지의 초기의 작품이다. 그의 그림이 파리에서 팔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작품부터였으며 화상들은 파카소에게 그와 똑같은 스타일의 그림을 계속 그려 줄 것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피카소는 이를 완전히 배반하여 큐비즘이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해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의 그림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화가는 절대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 화가에게 있어 최악의 적은 스타일이다." 변신하는 일에 사로잡혀 변신하는 모습을 작품으로 계속 표현한 그의 생애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하나의 놀이에 염증을 느낀 어린이가 계속해서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내는 모양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어떤 놀이가 가장 즐거웠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고 계속 놀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카소는 긴 생애를 통해 그것을 충분히 즐긴 것은 아닐는지. 그는 화가라는 점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각, 도예, 금속 세공으로부터 무대 장식은 물론 시도 썼으며 드라마도 써서 상연하는 등 무불통지의 대활약을 벌였다. 이렇듯 그가 계속해서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낸 것, 혹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앞서도 말한 것처럼 한마디로 14세에 이미 평생의 걸작을 완성시켰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는 14세까지 어떠한 공부를 했기에 평생의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한 것일까?
어릴 적부터 화가인 아버지를 흉내내
피카소는 말을 하기 이전에 그림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했으며, 말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한 말이 '연필'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연필과 종이를 주게 되면, 몇 시간이고 싫증을 느끼는 일없이 나선 무늬와 같은 것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붓가는 대로 마구 내갈긴 것으로, 그런 정도면 피카소가 아니더라도 모든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동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그림을 배우던 학교의 미술 선생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언제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피카소는 그 때 아버지의 흉내를 내어 마구 그림 같은 것을 그렸던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란 공부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위대한 예술가의 특징의 하나다"라고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인 몰리에르(J. P. Moliere)가 말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물론이고 세상에서 천재라 지칭되는 사람들 전부가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 천재가 된 것이다. 하긴 공부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공부를 하는 경우는 있을 것이다. 이것은 효과적인 학습법이기도 하다. 즉 자연스럽게 지식이나 기술을 흡수하는 방법이다. 피카소의 경우가 그렇듯 이상적으로 행해진 것 같다. 흔히 자식을 보게 되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어린이는 부모를 반영하고 있다. 어린이처럼 학습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의 경우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무런 생각없이 그러한 아버지의 흉내를 냈을 뿐이다.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최초의 공부였으며 평생에 걸쳐 계속되는 학습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게 내버려두었다. 독본을 읽고 쓰는 일과 산수 같은 다른 학과는 어떻게 하든 전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알파벳의 순서를 몰라도 탓하지 않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그림만 열심히 그리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늘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교과서의 여백이나 공책 같은 것은 그가 그린 그림으로 온통 뒤덮이곤 했다. 일반적인 부모처럼, 학교 공부도 좀 해야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말조차도 피카소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 있든 늘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피카소 소년 시절이었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것을 의식함이 없이 그림 공부를 했으므로 한층 더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 후 일가가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는 무척 가난하게 생활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피카소는 그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으며, 그의 인생에서 그림을 떼어 놓으면 아무것도 없다 할 정도였다. 도대체가 그림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공부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르칠 게 없는 학생
피카소는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즉 그의 아버지는 비둘기의 다리를 핀으로 꽂아 놓고, 그 비둘기 다리를 세밀하게 사생토록 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충분히 긍정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사생을 시킨 것이다. 또한 사람의 손을 그리게 해, 이것이야말로 화가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부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실제로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손이 표정도 풍부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모두가 아버지의 그림에 대한 교육의 흔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한 가지 말해 둬야 할 것은 미술 학교에서의 그의 성적이 언제나 가장 우수했다는 점이다. 피카소의 부모는 그림말고도 자식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피카소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군인이 된다면 틀림없이 장군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신부가 된다면 반드시 로마 교황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식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워 오지 않더라도 이미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의 능력을 아무리 크게 평가해도 지나치는 일이 없으며 그러한 부모야말로 자녀가 지니고 있는 능력을 극대화해주는 훌륭한 부모라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어린이가 어느 정도의 잠재 능력을 소유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크게 평가해도 나쁠 것이 없는데도, 어느 한계 안에서 밖에서 자녀를 볼 수 없다면 진짜로 우둔한 부모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피카소의 어머니는 이상적인 어머니였다. 한편 아버지는 언제고 자신을 흉내내어 그림만 그리고 있는 아들의 재능에 주목해, 피카소의 최초인 동시에 유일한 교사로서 그림 그리기를 초보에서부터 지도했다. 피카소가 10세 때, 아버지가 교사로 일하고 있는 미술 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가 맡고 있는 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도 아들을 가르치는 식이어서,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듯 아버지에 의한 교육은 계속되었는데, 아버지가 특히 중요시한 것은 데생으로서, 데생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림 물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은 피카소는 뒷날 "나만큼 데생 연습을 많이 한 화가는 없을 것이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피카소가 13세 때, 드디어 학생이 스승을 뛰어넘는 날이 오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보다 비둘기 그림을 더 잘 그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화필과 그림 물감을 피카소에게 주면서, 그 다음부터는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이제는 가르칠 것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에도 있어 흥미롭다. 다빈치가 15세경,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베로키오(Andrea del Verocchio)의 공방에 입문했는데, 어느 때인가 베로키오가 제직중인 그림에 천사를 그리도록 다빈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지인 다빈치가 그 천사의 그림을 자기보다 멋지게 완성시켜 놓은 것을 보고 스승은 두 번 다시 화필을 손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의 예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제자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스승으로서의 중요한 능력의 하나라 하겠다. 그러한 능력이 없는 스승은 부질없이 제자의 재능에 간섭만 하고는 뛰어난 재능의 싹을 꺾어 버리기 쉽다. 피카소나 다빈치는 다 같이 물러설 때를 알고 스승을 둔 해운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피카소의 경우는 스승의 평가대로라고 할까, 아니면 그 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할까, 14세에 평생의 걸작이라고 하는 작품을 그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피카소의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다
누군가가 피카소를 보고, "당신은 화가로서 어떠한 공부를 해왔습니까?" 하고 묻게 되면, 피카소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려 왔습니다." 피카소뿐만 아니고 일반적으로 화가는 어떤 공부를 할까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대답을 다시 한 번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지없이 진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화가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므로, 화가에게 있어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공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하루의 대부분을 무엇을 하고 지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 인간은 좋든 나쁘든 뭔가가 되어가는 것이다. 철이 들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을 위해 바쳐 온 그는 14세 때 평생의 걸작을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거의 쉬는 일이 없이 계속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공부하는 비결은 오직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자기 생애에 2만 점이 넘은 그림을 남겼는데, 그만한 수량은 미술사상의 온갖 예술가들의 작업량을 능가하는 것으로 이보다 많은 수량의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는 아직까지도 없다. 물론 그렇듯 방대한 양은 그가 92세까지 장수를 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더 탄복할 만한 사실은 그가 고령이 되어서도 그와 같은 제작력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예로, 1969년 1년 동안에 그린 그림의 전시회가 있었는데, 이미 팔린 것을 제외하고도 165점이나 되는 작품이 전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그 대부분이 대작이었으며, 동시에 1969년이라고 하면 그의 나이 88세 때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직도 그릴 그림이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피카소는 그리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14세 때 바르셀로나에 있는 예술 학교 입학 때의 일로 1개월 기간이 주어진 입학 시험 과제의 그림을 불과 하루 만에 완성시켰는데, 그것도 이미 입학해 있는 선배의 작품보다 훨씬 뛰어난 그림이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쯤은 14세에 평생의 걸작품을 그려 낸 화가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게 틀림없다. 언젠가 주위에서 조각가인 로댕이 보고, "당신은 천재야"라는 말을 하자, "천재라고? 그런 것은 없어. 오직 공부가 있는 뿐이야"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피카소가 말한다면, "공부? 그런 것은 없어.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야"라고 말했을 지돌 모른다. 분명히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의미로는, 피카소는 평생을 두고 한 번도 공부한 일이 없다. 말하자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본인이 본인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화가 피카소의 매일매일은 공부였음에 틀림없다. 피카소야말로 '오직 공부가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는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내 인생에서 해온 모든 것은 현재를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늘 현재를 위해서이며 그러한 현재를 지속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해왔다. 나는 탐구심이란 것을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표현해야 할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 과거고 미래고 생각하지 않고 표현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가 말하는 공부는, 미래에 대걸작을 완성시키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시도한 스타일의 변화는 뭔가 어떤 이상을 향한 발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변신을 '발전'하고는 전연 관계가 없다. 그의 공부란 이를테면 미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매일매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는 소년 때부터 90세가 지날 때까지 항상 표현해야 할 무엇인가를 발견해 그것을 계속 표현했는데,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호흡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을 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도 일시적으로 일을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54세 때의 일로 약 20개월에 걸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중지했는데,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 소송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했기 때움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평생 동안 여러 명의 애인이 있었으며, 그런 일이 작품이나 공부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70세가 지나서 젊은 애인이 그의 곁을 떠나자 마음에 상처를 입어 일을 중지한 때도 있었던 것이다. 약 반 년 동안의 일이기 했지만. 아무래도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여성의 존재가 공부에 방해가 되었던 모양이다.
미술관을 학교로
피카소는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남의 작품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남의 그림을 보는 것도 중요한 공부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18세 때 스페인에서는 가장 우수한 마드리드의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의 감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카데미의 교사는 나의 대해서 잘 몰랐으므르 착각을 하고 나에게 그림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는 거의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13세 때 아버지에게서, "이젠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을 앞에서 언급했지만, 교사에게 초보적인 미술 지도를 받는 일은, 이미 그 시점에서 끝낸 후였으므로, 그 이후는 자기 혼자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림을 많이 그림과 동시에 남의 그림을 많이 보는 일이었다. 마드리드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 등 스페인 화가의 작품 외에 유럽 각국의 명화를 소장하고 있는 프라도 미술관이라고 하는 훌륭한 미술관이 있다. 피카소는 자주 이 미술관을 찾아갔으며 거기서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미술관이야말로 피카소에게는 학교가 다를 바 없었다.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그는 그 후에도 몇 번인가 스페인과 파리를 왕복했으며 마침내는 파리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부터 파리 그 자체가 그에게는 학교나 다름없었다. 파리의 미술관이라든가 화랑에서 고흐나 로트레크의 그림을 처음으로 보게 되어, 그런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남의 작품을 연구해 남의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한 공부의 하나였던 것이다. 독창적인 것처럼 보이는 피카소의 작품도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보면, 남의 작품과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유명한 '게르니카'에 대해서 몇 가지 점이 지적되고 있다.
"피카소는 독창적이지 않다. 그는 언제나 앵그르라든가 로트레크와 같은 옛날의 대가들의 작품을 옆에 놓고 있다."고 주장하는 예술 평론가도 있는데 그러한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림의 세계 뿐만 아니라 문학이든 철학이든 또는 음악에서도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의 영향의 산물이며, 남에게서 빌려온 성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경우도 그렇지만, 독창성이나 개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오늘날의 교육 풍조 속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흉내를 내는 능력이나 어떤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많이 흉내를 내고 많은 것을 기억하는 길뿐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피카소의 스타일의 변화도 흉내라고 하면 좋지 않은 표현일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그와 같은 동화 능력 또는 차용 능력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탄생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큐비즘은 누구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피카소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회화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것처럼 획기적인 것이라 말하고 있다.
확실히 하나의 대상을 동시에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보고, 그것을 동일한 평면에 그려 넣는다는 큐비즘은,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해 본 일이 없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흉내가 있었으며 차용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큐비즘의 양식을 조각에서 차용한 것 같다. 어떤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은 그 능력을 혹사하는 일이다. 그와 친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이를 자유로이 재현할 수가 있었으며,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이용했다고 한다. 이 역시도 화가로서는 훌륭한 학습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큐비즘 양식의 최초의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1907년의 작품인데, 그는 그 2년 전부터 조각 작품을 제작했으며 스페인의 고대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큐비즘이란 큐브 그림을 그린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입체를 어떻게 하면 평면에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내내 해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조각을 흉내내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소상을 형성하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피카소는 무엇이든지 차용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70세 때 제작한 '원숭이 부자'라고 하는 약간 재미있는 조각이 있는데, 원숭이의 얼굴 부분에 장난감 자동차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장난감 자동차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장난감 자동차는 완전히 원숭이의 얼굴이 되어 있다. 장난감 자동차가 원숭이의 얼굴을 닮을 발견한 데 그의 독창성이 있다. 그 밖에도 바구니라든가 수도꼭지, 자전거의 핸들(이것은 황소의 뿔이 되었다) 등을 이용한 독특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는데, 하나같이 그의 차용 능력의 예리함을 나타내는 작품들이었다.
모방 훈련
어떤 미술 평론가가 피카소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피카소는 창조력도 뛰어나지만 그의 작품 전부에서 표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독창적으로 보이는 것도 전문가의 눈에도 이를 특별히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당당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간단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차용한 것도 많다. 그런 것 중의 한 예가 있는데, 그것은 1951년에 그린 '한국의 학살'이라는 그림이다. 6.25한국 동란에서 힌트를 얻어 구상한 작품으로 나체로 서 있는 여인들의 군상과 여기에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구도가 고야의 '5월 3일의 처형'이라는 작품과 똑같은 것이다. 피카소가 고야의 그림을 흉내내어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피카소는 고야의 그 그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차용해 온 것이다.
차용이라든가 흉내가 지나치게 되면 그대로 베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사 또한 피카소로서는 중요한 일의 하나였던 것이다.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남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피카소가 18세경에 그린 그림으로 벨라스케스의 '펠리페(Felipe) 4세상'을 모사한 것이 있는데,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복사판처럼 똑같다. 17세기의 프랑스 화가인 푸생(N. Poussin)의 작품을 모사한 '푸생에 의한 바카날르'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를 모사하면서 피카소는, "이는 자기 훈련이며 수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피카소 나름의 독특한 점은 이렇듯 모사를 습작으로 끝내지 않고 원화를 연상시키면서 피카소의 독자적인 세계를 표현한 작품으로 승화시켜 나간 점에 있다. 그 좋은 예가 '르누아르에 의한 시슬레 부처의 상'이라고 하는 데생이다. 부인이 남편의 팔에 두 손을 걸고 있으며, 남편은 아내의 귓가에서 무엇인가를 소근대고 있는 그런 정경을 그린 것인데, 원화의 모델인 부인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의 간략화된 선은 원화의 요점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피카소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모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모델을 재현시켜 그것을 그리려고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하나의 원화를 기본으로 하여 많은 연작을 그리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예를 들면, 마네의 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는 자그마치 140점이나 되는 연작이 있다. 이 경우에는 모사라고는 하지만 피카소의 독특한 큐비즘의 수법으로 그려진 것으로 인물상은 상당히 변형이 되어 있어 마네의 그림 그 자체를 모사할 생각이었다면 그렇듯 많이 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마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도 피카소가 보고 있었던 것은 마네의 그림이 아니라, 마네의 그림을 통해서 보이는 이미지, 즉 풀밭 위에 앉아 있는 남자들과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것을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해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 마네의 모사의 결정판을 그리겠다는 의도는 없었으며, 하나의 소재에 대해서 자신의 창작의 샘이 어느 정도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오직 하나의 소재를 기본으로 100점 이상을 모사했다는 것은 대단히 변화무쌍한 재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카소가 이 연작을 그린 것은 79세 때의 일이었다. 피로를 모르는 끝없는 창작 의욕이며 훈련인 동시에 공부였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만이 그림은 아니다.
피카소는 예술에 있어서 온갖 가능성을 기도했으며, 항상 변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점은 여성에 대해서도 똑같았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서 공부의 최대의 적이었다는 말은 했는지, 동시에 여성은 그에게 있어 창작의 최대의 원천이기도 했다. 여성 편력을 통해 배운 시인 괴테와 똑같이, 피카소 역시도 계속해서 등장하는 여성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이를 작품에 새겨 넣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회화의 스타일도 여성과의 만남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파리로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실연 때문에 자살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파란 색조로 인간의 고독이나 괴로움을 테마로 한 그림만을 계속 그렸다. 그런데 페르디난트 올리비에라는 여성과 만나 동거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장미 빛깔을 밝은 색조가 화면 천체를 채우게 되었다. 피카소의 일생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같이 생활했거나 또는 결혼을 한 여성이 모두 7명 정도가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모텔이 되어 그림 속에 남아 있다. 그녀들의 자신과 그림을 대조해 보면,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 여자가 누구인가를 단번에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아름답게 그려져 있지만, 마지막에는 추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를 보면, 그녀들의 대한 피카소의 마음 상태를 쉽게 읽어 낼 수가 있다.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은 말이나 보기 흉한 모습의 노파로 그려졌으며 개나 두꺼비의 얼굴로 그려진 애인도 있었다. 그런 그림은 이를테면 그녀들에 대한 최후 통첩을 들이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는 태연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로서는 그림 속의 자신이 추방 상태에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괴로움일 것이다."
"나는 멈추어 서지 않는다."라고 말한 피카소의 말이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서는 냉혹한 정도로 실천되고 있는 것을 알고는 피카소에게 반감을 품게 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피카소는 흔히 처음에 지녔던 정렬이 식어 버리면, 상대방을 점점 귀찮게 여기게 되고, 마침내는 증오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보기 흉하게 그릴 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서 살해해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즉 피카소는 인체를 조각조각으로 해체한 것 겉은 그림을 여러 개 그렸다. 이를테면 그러한 그림에 여성에 대한 증오심이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3명의 댄서'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여성의 육체가 잔인하다고 할 정도로 분해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부인에 대한 증오가 표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피카소가 그린 여성상은, 그 당시에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초상화일 뿐 창작된 그림은 하나도 없다"고 피카소를 잘 알고 있는 어떤 화상은 말했다. 이런 예는 얼굴의 원형을 없애고 마치 무슨 기호처럼 변형시켜 그린 여성의 얼굴도 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 예로서 '빨간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는 커다란 나부'라는 작품이 있는데, 크게 입을 벌리고는 이를 드러내어 무엇인가를 물어뜯으려는 듯한 얼굴이 그려져 있어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와 같은 추악성은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 한층 더해,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피카소만큼 여성을 추하게 그린 화가는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그림은 외면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현실적으로 가까운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의 그림도 그렇듯 추악한 모습을 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미술사를 보면 여성을 아름답게 그린 그림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것만이 그림은 아니다'라는 것이 피카소의 생각이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섞여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이다. 물론 그의 작품 중에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하게 나타낸 작품도 있지만, 그가 그림에 있어 새로 시도한 것은 잔인할 정도로 여성을 추하게 그리는 것이었다. 변화무쌍하게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뒤섞여 아무리 그려도 다 그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간의 얼굴이다. 피카소는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얼굴만큼 호소력이 강한 것도 없다. 말하자면 피카소의 변신은 그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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