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 이원용
불가능에 도전한 전략가 나폴레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 혁명기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훗날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재위 1804년~1814년, 1815년)로 즉위한다. 또한, 라인 동맹의 보호자 겸 이탈리아의 왕이기도 하였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1769~1821)
프랑스의 황제.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 계의 지주인 보나파르트 집안 출신으로, 포병 사관이 되어 자코뱅당을 지지하는 소책자를 발표한 끝에 체포되었으나, 1795년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진압해 재기했으며, 총재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수완을 발휘했다. 1799년 이집트 원정으로부터 귀국 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집정이 되어 군사 독재의 단서를 열었다. 그 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정복해 왕당파 및 공화파를 탄압했고 1804년에는 황제가 되었다(제1제정). 그 사이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고 교육 제도를 개혁했으며 종교 협약 등을 시행했다. 전 유럽의 제패를 기도하며 대륙 봉쇄령을 발하는 등 영국에 대항했으나 스페인 원정에 실패하고 해방 전쟁에 패해 14년에는 퇴위했다. 그 후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재기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 다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불가능이란 어리석은 자의 사전에나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고 말했다든가 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사람에게는 이런 유의 일화나 전설 같은 것이 으레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말을 믿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방해 하루에 3시간만 자려고 노력하는 예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 나폴레옹은 하루에 7시간 정도 잤으며, 그러고서도 오후가 되면 가끔씩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말은 누가 발설한 것일까. 모르긴 해도 아마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잘하는 전기 작가가 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당사자인 나폴레옹이 하루에 3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수면을 필요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영웅도 평범한 사람과 똑같이 밤에는 충분히 잠을 잤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폴레옹의 특기할 만한 점은 적은 시간을 잤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특기로서 포탄이 날아오는 싸움터에서도 의자에 앉아 태연히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하루에 3시간만 잤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이 만들어 낸 이야기지만 불을 때지 않으면 연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그가 하루에 18시간이나 일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일벌레였다는 것이 그런 일화를 낳게 한 근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부지런히 일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차분히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고 또한 어떤 일에도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을 계획하기 전에 항상 오랫동안 잘 생각하여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예측하기 때문이다. 천분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저녁 식사 때나 극장에 있을 때나 언제고 일을 생각하며 늘 일하고 있다. 밤이라도 잠이 깨면 일을 한다. 나는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말은, '일을 해내는 능력이란 주어진 일을 즉각 처리하는 능력이다'라는 말이 된다. 이 정도가 되려면 여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폴레옹이 맹렬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그의 부하들이 비명을 질렀을 정도로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독특하게 보였으며 이상하다고 할까, 어떻든 보통이 아니라는 뜻의 형용사를 몇 개 겹쳐 봐도 부족한 인물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 바 있지만, 나폴레옹과 관련된 일화로,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말을 그가 실지로 했던 것이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정찰에서 돌아온 장교가 나폴레옹에게 고하기를, "이 산길을 돌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말했던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나는 그런 말은 모르는데." 이어 그는 "불가능하다는 말은 프랑스어에는 없어." 혹은 "불가능이란 소심한 자의 환영에 불과하며, 비겁한 자의 도피처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확실히 나폴레옹의 생애는 '불가능한 일'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한 군인이나 정치가가 꽁무니를 뺄 때, 그는 전진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 때, 그는 알프스의 험난한 바위산에 길을 뚫어가며 군대를 전진시켰다.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어떻든 그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까지도 경탄케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언젠가 나폴레옹을 만난 괴테가, "이 사람이야말로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나폴레옹의 전투를 상세히 기록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러시아의 군인을 비롯해 귀족들을 상당수 등장시켜, 나폴레옹 숭배가 온 유럽에 퍼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 대한 책을 펼쳐보게 되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천재 나폴레옹'이라는 문구이다. 나폴레옹이 어째서 천재인지 규명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나폴레옹은 분명히 천재라고 믿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어째서, 또 왜 천재란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밑에서 참모로 일한 탈레랑이 한 말을 들어 보면 알게 된다.
나폴레옹은 정말로 드물게 볼 수 있는 천재이다. 정력을 비롯해서 상상력이라든가 지력이나 실천력에 있어서 천재였다. 그의 생애는 지난 천년을 통해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을 천년에 한 번 나타나는 천재라고 표현했다. 지나친 표현인지도 모르지만 책모와 독설로 이름이 높았던 그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을 보면, 역시 나폴레옹은 보통 천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연전 연승의 전술가
나폴레옹을 천재라고 한다면, 그가 어떤 천재였는지 궁금하다. 따라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그가 전쟁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사실이다.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기 작가라든가 역사학자들도 다 같이 천재적이었다는 수식어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쓰고 있다. 확실히 나폴레옹의 군대가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역사적인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흔히 '6일 동안에 6전 연승'이라든가 '12개월에 한 차례의 승리'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것은 당시의 전쟁 기록으로 보아도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연승 기록이다. 알렉산더 대왕 이래의 군사적인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BC 4세기에 마케도니아로부터 인도에 걸친 큰 제국을 이룩했는데, 그때부터라고 친다면, 나폴레옹은 2,000년에 한 번 나타난 군사적인 천재라는 말이 된다. 그는 26세 때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된 이래 46세까지 20년 동안 싸움터를 뛰어다녔다. 말하자면 46세 때 워털루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될 때까지 내내 전쟁터에서만 생활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 어느 정도의 전투를 한 것일까. 나폴레옹은 이 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세인트헬레나 섬에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60차례나 전투를 했지만, 일찍이 첫 번째 전투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말고는 한 가지도 따로 배운 것이 없다.
첫 번째 전투라고 하면 바로 이탈리아를 원정했을 때의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은 그 당시 3만 8,000명의 군사로 8만이나 되는 적군을 격파했던 것이다. 실제로 배 이상이나 되는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봐서도 소문대로 그가 전쟁의 천재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이란 간단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주어진 여러 지점에 어느 정도의 병력을 투입하는가를 계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즉 그는 언제나 그 지점에 적의 병력수보다 많은 군사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그 지점에 투입되는 적의 병력수를 정확히 예측하기 않으면 안 된다. 적의 병력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적보다도 많은 아군을 투입하기만 하면 분명히 그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전법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라든가 무기에 그렇게 큰 차이만 없다면 전쟁의 승패란 병력의 수에 의해 결정이 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전투의 논리다. 말할 것도 없이 승패는 전투가 행해지는 지점에서의 병력의 차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전투에서 전군이 한꺼번에 전투에 참가하는 일을 드물다. 따라서 계산한 그대로 군대를 집결시키고 이동시킬 수만 있다면 배 이상이 되는 적도 무지를 수가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에 함께 참가한 어떤 병사의 종군기만 봐도 그 말이 이해가 된다. 그 종군기에는 그렇듯 놀라운 승리는 천재인 나폴레옹의 멋진 부대 이동 솜씨 덕분이었다고 씌어져 있다. 나폴레옹이 얼마나 정확하게 계산을 해서 그 계산대로 군대를 이동시켰는가를 잘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정확하게 병력을 집중시키는 기동력은 전쟁에 비행기가 등장하기 이전인 제 1차 세계 대전 때까지는 기본적인 전술이었는데, 군사 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전술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를 실전에 적용시킨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나폴레옹과 함께 사관 학교에서 공부한 군인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나폴레옹만이 그와 같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공부를 했기에 그와 같은 천재가 된 것일까?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했을 때의 성적은 어떠했는가? 그 때에도 과연 두각을 나타내어 성적이 월등히 뛰어났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2년이 소요되는 과정을 1년으로 끝낸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의 성적은 58명 중에서 42 등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미래의 천재를 예측할 만한 성적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나폴레옹이 장차 그렇듯 빛나는 인물로 등장하리라고는 전연 예상할 수가 없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천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전쟁에서는 천재란 상황 속에서 사색할 줄 아는 자이다. " 다시 말하면 현장 훈련이라는 말이 된다.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방법을 배운다는 말이다. 이런 터득을 나폴레옹은 전광석화와 같이 신속하게 해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순간적인 학습이라는 이야기이며, 최초의 학습장인 싸움터에서 모든 것을 익혔으면, 여태껏 아무도 몰랐던 방법을 찾아내어 이를 현장에서 실천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방면에 걸쳐 야심
이탈리아 원정 다음으로 추진한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원정군의 사령관이라기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나라의 통치자라는 인상은 부각시키며 행정 전반에 걸쳐 능력을 발휘했다. 이집트 원정에서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당시의 프랑스 혁명 정부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원대한 야망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야망이란 이집트에서 인도에 걸친 그야말로 2,000년 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큰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집트 원정을 그러한 구상을 위한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방면에 걸쳐 야망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다방면의 일을 이룩하려고 하는 내적인 욕구가 강하다는 것으로서, 그러한 욕구는 무엇이든지 성취해 보겠다는, 말하자면 일해 보겠다는 의욕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을 위해서 보냈지만, 그의 재능은 싸움터에서만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평화에 대응하는 능력에도 뛰어났으며, 이는 전쟁 사이사이에 생기는 평화시에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알게 되면 증명이 된다.
당시 나폴레옹은 29세였다. 그 나이 때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에 도착했지만 왕국을 계승한 대왕하고 비교할 수는 없고, 즉 일개 포병 소위에서 승진한 나폴레옹이므로 그다지 뒤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으로 처음 한때는 모두 하나같이 자기보다 연상인 부하 장교들에게 명령해야 하는 일로 고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곳에서 그가 발휘한 통치자로서의 수완은 군사적인 천재와는 또 다른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조제법 제정을 위한 부동산 조사를 비롯해 통반 의회의 설치, 행정관의 임명 및 경찰의 창설과 도로라든가 학교, 병원, 미술관 등의 건설 등, 말하자면 한 나라를 만들려는 것처럼 시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이 그런 모든 것을 시행하고 관리할 만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하여 이집트와 나폴레옹의 관계에서 잊어서는 안 돌 일은, 그의 이집트 원정과 동시에 '이집트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이 시작된 점이다. 여러 방면의 학자 200명을 이집트까지 데리고 간 것을 보면, 그가 이집트를 전쟁뿐만 아니라 학문의 대상으로서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중,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다 알고 있는 나폴레옹의 말이 생각난다. 피라미드 앞에서 병사들의 사기가 고취하기 위해 "4,000년의 역사가 당신들을 굽어보고 있다." 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나폴레옹은 이어 "이 세 개의 피라미드로 높이 3미터, 폭 30센티미터의 벽을 만든다면 프랑스 전국토를 둘러칠 수가 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아무래도 프랑스로부터 이끌고 간 수학자들이 계산한 것을 그대로 주워듣고서 한 말 같다. 그는 또 이집트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중의 하나로 '로제타 스톤'이라는 것이 있다. 당시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던 작은 돌이었지만, 이것은 후에 샹폴리옹이라는 프랑스의 이집트학자가 해독했다. 어쨌든 이로부터 '이집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오늘날 세계의 학문의 역사 속에 기록된 중요한 항목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커다란 제국은 건설해 새로운 국가로서 통치하고 또한 학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바로 2,000년 전에 알렉산더 대왕이 한 일과 똑같은 것이었다. 즉 알렉산더 대왕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 교사로 모시고 여러 가지 학문을 공부했으며 한편으로는 인도를 향해 원정차 출발했을 때 많은 학자들과 동행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땅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스승에게 보고했다. 그 중의 한 예를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일강의 원류가 인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더스 강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온 알렉산더 대왕의 보고를 듣고는, 스승이었지만 자신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던 낡은 지리관을 정정하게 만들었다. 역사책을 훑어보면 알렉산더 대왕은 계속해서 정복해 나간 땅에 새로운 국가를 세워, 그들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 너그러운 종교 정책을 취했는데 그런 점에서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취한 종교 정책이 알렉산더 대왕의 것을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지배자가 된 후부터 현재까지 그 이름이 전해져 오고 있는 "나폴레옹 법전" 이라는 민법을 제정했으며, 오늘날의 파리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도시 계획안을 만들었으며, 또한 도로망을 건설했다. 말하자면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새로운 프랑스라는 나라를 만들어 군인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전쟁이든 평화든, 나폴레옹을 움직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야심이었다.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야심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주요한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다. 그로 하여금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한 것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호기심 같은 것이 아니라 대제국을 건설하겠다고 하는 야심이었던 것이다.
'서랍 같은 두뇌'
나폴레옹은 1799년 30세 때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실질적인 프랑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 왕정제를 타도한 혁명으로부터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엄청난 야심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실천은커녕 생각해 낼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보통 야심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미 10대 중반, 즉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 시절부터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사관 학교의 어떤 교관이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말수가 적었으며, 고독을 사랑했고 언제나 고고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극단적으로 자존심이 강했다. 힘차게 대답을 하는 생도였으며 질문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요령 있는 대답을 해냈다. 자존심이 무척 강했으며 모든 것을 원하는 야심가였는데, 어떻든 특별히 눈에 띄는 청년이었다.
에고이스트인데다가 자존심이 강한 야심가라면, 일반적으로 정치가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10대 중반에 이미 모든 것을 원하는 야심가였다면 이는 보통 야심가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될 것 같다. 그런 것이 도움이 되어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반적으로 2년이 소요되는 것을 1년 만에 졸업한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학생 시절의 나폴레옹이 특히 무섭게 공부하는 스타일의 학생도 아니었다. 그가 무섭게 공부하게 된 것은 군대에서 근무하면서부터였으며, 학생 시절의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어느쪽이냐 하면, 어두운 표정과 음울한 성격 그리고 빈약하고 작은 체구 등 그다지 신통한 요소는 거의 갖추고 있지 못했다. 야심가에게는 흔히 어두운 일면이 있는데,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그의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일종의 어두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소년 시절의 나폴레옹은 그 누구하고도 사귀지 않았으며 혼자서 산책하는 것을 즐겼고, 항상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이런 점은 성인이 된 후에도 전연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급에서 제일 꼬마였고, 어른이 된 후에도 키가 평균 이하에 머물러 있었으며, 더구나 너무 여위어 있었으므로 "고양이가 장화를 신은 것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10대 전반을 보낸 유년 학교 시절에 대해서는, 그의 전기에 반드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교정의 한쪽 구석에 모든 학생들에게 한 구획을 할당해 야채나 꽃을 지배케 한 장소가 있었는데, 여러 학생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일이 많았던 나폴레옹은 그 곳에 헛간을 지어 혼자서 거기 파묻혀 책만 읽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령관으로서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폴레옹의 모습이란, 영웅이라는 이미지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26세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에 대해서 어떤 병사가 종군기 속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용모, 태도, 옷차림 어느 것 하나도 매력적인 것이 없다. 당시의 나폴레옹에 대해서 내가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작고 빈약한 체구, 커다란 눈, 여위어 빠진 볼, 어깨까지 흘러 내려온 긴 머리카락.
이 병사의 말에 의하면, 혁명 후 얼마 안 된 그 당시, 군대의 통솔자는 군사적인 능력보다 육체적인 자질, 이를테면 보통보다 잘났거나 우람하거나 한 그런 점에 의해 선발되는데, 나폴레옹은 이 점에서 보면 대단히 열등했으므로 군사적인 능력도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의 전투에서 그는 크게 재능을 발휘해 "소유하고 있는 것 이상의 힘을 우리들로부터 빼낸 것으로 생각된다"고 이 병사는 말하고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얼굴보다 두뇌이다. 나폴레옹의 두뇌는 '서랍 같은 두뇌'등으로 불리어 전쟁에 대한 일뿐만 아니라 법률을 비롯해서 재정 문제, 상업 및 문학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지식이 각각 서랍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잘 정리되어, 언제고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할 수가 있었다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다. 더구나 치밀한 논리의 소유자로서 토론 등에서는 누구에게도 지는 일이 없었으며, 게다가 결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나고 보니 그 누구도 그의 야망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서랍과 같은 머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즉 그는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독서 노트를 만들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책을 읽는 데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책을,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광범위한 분야의 책을 읽는 일이다.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뭔가 불가사의한 능력을 받고 탄생한 것이 아니며,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많은 지식을 머리 속에 축적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상황에 대비해 여태껏 아무도 느끼지 못했던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이와 같은 것이며, 이른바 천재란 그런 일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간 사람들을 가리킨다. 나폴레옹은 유년 시절부터 책방의 책을 온통 다 삼켜 버릴 듯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것도 군인에게 필요한 전문적인 전술 서적이나 포술 서적뿐만이 아니고 역사, 지리, 수학, 법률, 문학 등 각계 각 분야에 걸친 책을 읽었던 것이다. 수학은 학생 시절부터 그가 잘하는 과목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는 도중의 배 안에서도 문제 푸는 일에 열중했었다고 한다. 법률 분야에서는 근신 명령을 받았을 때 하루 만에 6세기에 저술된 유럽 각국의 법률의 원전이라고 하는 대저,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로마법 대전)"을 독파했다고 한다. 후에 새로운 헌법과 민법을 기초할 때 쭉 늘어서 있던 법률학자들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법률 지식을 피력할 수가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독서 덕분이었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유년 시대부터 생애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탐욕스러운 독서가였다. 특히, 독서에 열중한 것은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복무하기 시작한 16세 때부터 수년 동안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독서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되면 평생을 두고 책과 떨어질 수 없는 모양이다.
또 일반적으로 나폴레옹의 독서에 대해서 전해지는 말이 있다. 즉 괴테의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전쟁터에까지 휴대하고 다니면서 여러 번 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인 것 같으며, 어떤 책을 보니 괴테와 나폴레옹이 만났을 때, 그 작품을 7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괴테로 하여금 감탄케 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문학 작품에 대한 애독자였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한때는 직접 몇 편인지 소설을 쓰기까지 했다. 비록 그가 소설가는 되지 못했지만 자기 아내인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글재주에 있어서도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독서와 관련해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읽은 책에 대해서 그 내용을 요약 혹은 발췌해서 기록해 둔 점이었다. 또는 감상문을 적어 두기도 했다. 이런 식의 습관을 몸에 익힘으로써 한층 더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 내지는 파악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독서가 차선책이라고 한다면 읽은 책에 대해 독서 노트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싸움터의 지휘자로서 또는 일국의 통치자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판단력을 기른 것과 막대한 분량의 정보를 축적케 한 왕성하기 그지없는 독서 덕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바로 독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독서의 힘은 군사나 정치 분야에서만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가나 전기 작가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의 가장 학식과 교양이 높았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도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1797년 아직 권력을 쥐기 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학사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본인이 무엇보다도 자랑으로 생각했던 일은 군인으로서가 아니고 문인으로서 인정을 받은 일이었다. 군대에 대한 명령서 등에도 프랑스 학사 회원이라고 반드시 기입할 정도로 그와 같은 타이틀을 명예로운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추방되어 최후의 약 6년 동안을 보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도 책을 많이 읽었으며, 서고에는 3,000권 이상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사람을 사로잡는 선동가
병사들이여, 제군들은 벌거벗었으며, 급양도 좋지가 않다. 정부는 여러분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음에도, 무엇 하나 여러분에게 해준 게 없다. 여러분의 인내로 이들 바위산에서 여러분이 발휘하는 용기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봐도 어떠한 명예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과 부를 찾아낼 것이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과 부를 찾아낼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혹시 용기와 강한 끈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겠지!
이 글은 이탈리아 전투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지휘했을 때의 나폴레옹의 훈시 내용이다.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목적하는 것, 즉 전쟁 혹은 구인에 대한 용모 또는 상품의 구매 등으로 유도하는 점에서는 군대의 사령관의 훈시나 구인 광고 또는 상품 광고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그와 같은 하나의 예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즉 1805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병사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병사들이여, 우리 조국의 행복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전부 이룩된 날에는 여러분을 프랑스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고국에서, 여러분은 나의 가장 다정한 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프랑스 국민은 다시금 여러분을 볼 수 있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가했었다"고 말만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아아! 이 사람은 용사다!"
이런 말을 듣고 한 번 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 병사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인심을 사로잡는 천재이기도 했다. 그렇지 못했다면 감히 1개 포병 소위가 한 나라의 지배자의 위치에까지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심을 장악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면,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1802년에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훈장을 제정했을 때, 그가 의회에서 한 말이다. 그런 훈장의 제정은 오래된 왕정제를 상기케 하는 것으로 혁명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다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은 혁명 후 10년이 경과해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감정밖에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명예의 감정이다. 따라서 이 감정에 양식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경사스러운 의식이 필요하다. 프랑스 국민은 외국인들이 훈장 앞에 어떻게 무릎꿇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다.
이렇듯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관찰이나 마음을 취하게 하는 재치 있는 말에 더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크게 효과가 있었던 것은 그의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이었다. 그의 궁상스러운 용모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커다란 눈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지없이 강한 매력이 있었다고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마음에 와 닿는 멋진 말과 눈, 광고 영어로 바꾸어 말하면 명 카피라이터로서 효과적인 두 가지 무기를 그는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해를 끼친 천재성
이와 같이 나폴레옹은 많이 공부했으며, 그리하여 천재성을 발휘했고 역사를 만들었다. 그는 분명히 특별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으므로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기분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성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발휘되었으며 또한 어떤 일에 도움이 되었는가 하고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 일을 잘해 내는 사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재치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건을 잘 파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천재가 되고 보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천재는 본인 한 사람의 소유라는 영역을 넘어서서 세계에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나폴레옹은 천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천재란 자신의 세계를 비추기 위해 타오르도록 운명 지워진 유성이다."
그는 확실히 18세기에서 19세기 초의 10여 년 동안의 세계를 계속 비추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불탔다. 아무래도 나폴레옹은 시대를 비추는 유성이 된 일에 만족해 스스로 천재에 취해 버린 것 같지만, 그와 같은 천재가 결국에는 유럽에 전쟁을 초래케 했으며, 전사자의 수를 증가시켰을 뿐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시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미슐레(J. Michlet)는, "나폴레옹을 예찬하는 것은 바로 폭력을 숭배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는데,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을 줄로 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프랑스인의 수는 수백만이라고들 한다. 나폴레옹 전쟁은 쌍방 모두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전사자를 냈다. 과연 프랑스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잊고 천진난만하게 나폴레옹을 그대로 숭배할 마음이 생길는지.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상황의 산물 혹은 운명의 자녀라고 알고 있었으며 그런 식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해, 스스로의 야망 달성을 위해 유럽 전체에서 치르게 될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냉철성이야말로 지배자가 될 사람의 최대의 자질이다"라고 말한 것은 나폴레옹 자신이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을 위시해, 그를 분석한 후세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만 냉혹한 사람이었으며 에고이스트였나 하는 점이다. 어떤 나폴레옹 연구가는, "나폴레옹은 인간을 자기 기분이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값싼 도구처럼 간주해 왔다"고까지 극언하고 있다. 이와 똑같은 말을,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규명할 수 없는 의지라는 철학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쁜 인간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번영을 위해 남을 희생케 하는 각별한 에고이즘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를 특징짓는 것은 그와 같은 의지를 만족시키는 커다란 힘뿐이다. 그는 이러한 보기 드문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인간 의지의 사악성 전부를 노출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사악성을 나타내는 한 전형이었던 셈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생각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베를린으로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씩씩한 모습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세계 정신이다"라며 감격했다는 것과는 대단히 대조적이다. 과연 나폴레옹은 인간의 사악성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의 뛰어남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것은 쇼펜하우어의 말에 동조해야 할 것 같다. 나폴레옹이 열심히 공부한 것도,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실현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는 오히려 이익보다 해가 많았던 게 사실이라고 하겠다. 최소한 프랑스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웃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나폴레옹은 괴로운 존재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이웃 나라에 파괴와 죽음과 지배를 안겨다 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은 나폴레옹의 생애에 대해서, '양심을 지니지 못한 이지'라 말하고 있다. 선도 악도 구분할 줄 모르며, 혹은 그러한 일에는 관심을 갖는 것을 그만두고, 오직 자신의 에고이즘을 키우겠다는 그러한 인간은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위험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천재인 나폴레옹을 기억 속에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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