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아비를 위해선데
일의 경중을 가늠해 선후를 차릴 줄 알면 그를 유능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아무렇게나 우선 시작부터 해 놓고 뒷감당을 못한다면 크고 적고 간에 무얼 맡길 상대가 되지 못한다. 성종 하면 조선조 초기의 홍륭하는 운세를 타고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다만 재주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무학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보니, 연락을 즐기고 여성문제에도 단순치 않아, 뒷날 연산군의 병탈이 거기서 많이 유래됐다는 평을 듣는 어른이다. 어느 해 夏 몹시 가물어서, 임금이 친히 경회루 못가에 나와 비를 비는 기우행사를 주관하는데, 어디서 풍악소리가 들려와 모두 놀랐다. “이 가뭄에 풍악을 올리며 잔치를 하다니...” 알아보니 방주감찰의 잔칫날이라는 것이다. 그렇기로 백성이 도탄에 들어 우에서 친히 또약볕에 나와서 긍휼을 비는 이 판국에... 결국 잔치에 모였던 13인은 모두 잡혀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주제에 아들을 시켜 석방운동을 벌였으니 웃기는 얘기다. 고만고만한 어린 것들이 연명으로 탄원서를 들고 줄지어 진정하러 왔다는 전갈을 듣고 임금은 진노했다.
“제놈들이 분수없는 짓을 저질러 놓고는 무어? 어린 것들을 시켜서 용서해 달라고? 고놈들 모조리 잡아 들이래라.”
우람한 체격의 별감들이 보기에도 설고 무시무시한 홍의의 넓은 소매를 날리며 양팔을 벌리고 “요놈들, 모조리 잡아들이랍신다!” 외치면서 몰려나오니, 철모르는 꼬맹이들이 댕기 꼬랑이를 내저으며 거미알 헤어지듯 흩어져들 가는데, 한 놈 아이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꼿꼿이 서 있다가 순순히 그들을 따라서 들어온다.
“너는 저 사람들이 무섭지도 않더냐? 왜 도망 안 갔니?” “아비를 구하기 위해서 한 일이온데, 죄를 받으면 받았지 어찌 도망 가오리까?” “고놈 참 숙성하다. 그래, 이 글은 누가 지어주고 누가 쓴 것인고?” “소신이 짓고, 쓰기도 소신이 하였사옵니다.” “그래! 네 나이 몇 살이냐?” “열셋이옵니다.” “너 속이면 혼날 줄 알아라, 네 손으로 다시 짓고 쓰고 하겠느냐?” “앞서 글도 모두 소신 손으로 한 것이오니, 시험하신다면 지어 올리오리다.”
그래 민한(가뭄을 애처러워 하노라)이란 제목으로 글을 짓게 했더니, 그 자리에서 써올리는데 그 끝을 이렇게 맺었다.
동해과부가 상초삼지한하고 은왕성탕이 능치천리지우오니 원성상은 진념언하소서
성탕은 은나라의 성군이라 아무나 아는 일이고, 동해과부는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중국전한때 우공이라는 분이 있었다. 동해땅 하비라는 곳에서 형옥 다스리는 직책을 띠고 있었는데 관내에서 사고가 났다. 한 젊은 여인이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됐는데, 자식조차 없으니 의당 팔자를 고쳐 가야하겠으나, 시어머니 봉양할 이가 없어 그냥 시댁을 지키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내 걱정말고 시집을 가라 하고, 본인은 계속 효성을 다해 봉양을 하고, 그러기를 십년이나 하다가 시어머니가 목을 매 자살을 했다. `나 때문에 청춘을 그냥 늙힐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 뜻에서다. 그런데 시집간 시누이들이 고소를 했다. `이년이 시집갈 욕심에 걸리적거리는 시어미를 없애소` 원님은 한쪽 말만 듣고 효부를 체포하였다. 우공은 연인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통하지 않자, 구실을 내놓고 나와 버렸다. 그런데 하 몹시 독한 고문을 가하니, 효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복해, 안락한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내리 3년을 가무는 것을, 새로 온 태수가 까닭을 물으니 우공이 말하였다. `상 주어야 할 사람을 죽인 때문인 줄로 아외다.` 그래 소 잡고 크게 차려 과부 묘에 제사지내 주었더니, 원혼도 감동했던지 그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 농사도 풍년이 들고, 다시 태평을 되찾았다. <설원>이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대왕은 크게 기특히 여겨 다시 물었다.
“네 아비는 누구냐” “예, 방주감찰 김세우이옵니다.” “네 이름은?” “어린룡 규자, 외자 이름이옵니다. “네가 글짓기도 잘하고 쓰기도 잘하니, 너의 글을 보고 네 아비를 놓아주며, 너의 글씨를 보고 네 아비의 동료들을 놓아 주는 것이니, 너의 그 효심을 나라와 임금께 충성하는 길로 옮길지니라.”
왕은 잡혔던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는 명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인 정3품직인 전한에까지 올랐다. 세종 당시의 집현전을 대신한 관서였으니, 학문을 연구하는 매우 깨끗한 벼슬자리에서 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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