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을 보고 운명을 점친 임치종
임치종(?~?)은 의주에서 살았는데 젊어서 몹시 가난하여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하게 되었다. 의주의 풍속에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게 되면 임금은 주지 않고 5년 또는 10년이 지날 경우 상점 주인이 몇천 금의 자본을 대어 고용당한 사람에게 문상이 되도록 하였다. 그 당시는 조선과 중국이 서로 통상은 하지 아니하고, 사신이 왕래할 때 비로소 국경의 관문을 열어 조선 상인과 중국 상인들끼리 서로 물건을 교역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가리켜 문상이라고 하며, 자본금에 해당하는 이익금은 모두 고용한 사람의 소득으로 되돌려 주게 된다. 이렇게 한 뒤로는 자립해서 주상이 되는 그런 풍습이었다.
임치종이 마흔 살에 처음으로 문상이 되어 저자 거리에 나갔더니 한 곳에 청루(기생집)가 있는데, '만금루'란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장사꾼이 대답하였다.
"새로 나온 기생의 미모가 당대에는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데 만금을 내놓아야 한다오. 그래서 중국의 부자 상인이라 하더라도 그 기생과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울 정도라오." 그 말을 들은 임치종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조선 사람으로 만약 이 기생에게 선수를 쳐서 친하게 될 것 같으면 중국 사람의 콧대를 꺾어 놓을 수 있겠군.'
마침내 많은 재산을 털어서 그 기생에게 주고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아니 하였다. 그랬더니 돌아올 때가 되자 그 기생이 그의 성명을 물었다.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임치종을 보고 고향 사람들은 비웃었다. 몇 해를 사는 동안 너무나 가난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날의 그 기생이 어느 부유한 상인의 아내가 되어 장사꾼을 통하여 임치종의 행방을 널리 수소문하였다. 마침내 어렵게 사는 그를 찾아내어 10만 금을 주고 장사를 하도록 권유하여 임치종도 끝내 1백만 금을 소유하게 되는 거부가 되어 그의 호기와 명성이 온 나라에 알려지고, 드디어 벼슬이 곽산 군수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에게는 지혜가 있어서 도모하는 일은 틀림없이 이룩하였으며, 또한 계획을 잘하여 그 당시만 해도 전신과 우편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천리 밖에까지의 돈 운반을 잘하였고, 타고난 기개도 호탕하여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으므로 호걸로 알려졌다. 어느 날 은덩이를 뜰에다 내놓고 바람을 쐬며 햇볕에 쬐고 있는데, 가난하게 사는 어떤 사람이 그 많은 은덩이를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자, 임치종이 서슴없이 한 덩이를 집어 주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물었더니,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나도 옛날에는 놀라던 사람처럼 가난했던 신세였는데 어찌 동정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의 호걸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그 무렵 충주 어느 아전이 관아의 돈을 횡령하여 축을 내었는데, 임치종의 소문을 듣고는 그를 속여 돈을 뜯어내려고 찾아가 말하였다.
"아무개는 충주에 살고 잇는 사람으로 농사가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구휼할 방법이 없기에 그대에게 1만 전을 꾸어가려 하는데 꾸어 주겠소?"
임치종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하였다.
"꾸어주리다. 하지만 여기서 충주까지는 1천 3백 리나 되는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운반하려 하오?" 그 아전이 말하였다. "인부를 교대로 바꾸어 가면서 운송할 것이오." 임치종이 비웃으며 대꾸하였다. "그대가 어찌 나를 속여가며 포탈한 돈을 채우려 드는가?" 그 아전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사죄하였다. "정말 그대의 말과 같이 그대를 속이려고 하였습니다. 허나 그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오."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지금은 2월이라 만약 그 돈을 인부를 교대로 바꿔가며 운송한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4월이라야 찾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모두 굶어 죽고 말 터인데, 어찌 내가 그대가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을 모르겠소. 그리고 또 지금은 돈을 운반하는 일이 아주 어려운데, 내가 그대에게 선뜻 돈을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허락했을 적에 그대가 돈을 운반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그대가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 아전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대는 빨리 운반하는 계책이 있소?" 임치종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의 돈이 전국에 두루 퍼져 있어서 1만 전쯤 운반하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소."
이어서 그 아전에게 1천 전을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비록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천 리나 되는 험하고 먼 길을 찾아왔는데 그 뜻을 저버릴 수 없어서요." 그 아전이 사례하고 떠났다.
임치종이 또 닭을 기르는데 직접 모이를 줘가며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병아리들이 뜰에서 모이를 쪼면서 쫑쫑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나타나 그중 한 마리를 낚아채 가버리자 임치종이 집안 사람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내가 멀지 않아 죽을 것이니 서둘러서 장부를 정리하도록 하여라."
집안 사람들이 놀라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내가 십수 년 동안 지내오면서 나를 해롭게 하는 상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솔개가 병아리를 낚아채 갔으니 운수가 장차 쇠퇴해질 것이고 운수가 쇠퇴해지면 내가 죽게 된다."
과연 임치종은 자신의 말대로 몇 달 만에 죽었다. 임치종이 그의 손자가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없음을 알고 천 석 정도의 토지를 궁궐에 맡겨 미리 부탁해 두었는데, 갑오개혁 뒤에 황실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그 토지를 그의 자손들에게 되돌려 주어 그 집안의 넉넉함이 옛날과 같았으니, 그것은 대체로 임치종에게 미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서지방에 발길을 끊었던 김삿갓
김병연(1807~1863)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심, 호는 난고이다.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선천 부사로 있으면서, 순조 12년(1812)에 관서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역적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가 마침내 형법으로 처형되고, 그의 집안은 그 사건으로 폐문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병연은 스스로 하늘과 땅 사이의 죄인이라고 여겨 감히 태양을 쳐다볼 수 없다고 하여 언제나 삿갓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는 특히 공령시(과거 볼 때 쓰는 시체)를 잘하기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그가 일찍이 관서지방을 유람하였는데 관서에 노진이란 사람 역시 공령시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삿갓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김삿갓을 쫓아보낼 생각으로 김익순을 비웃는 시를 지어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가 지은 시 가운데 더욱 김삿갓의 집안을 잘 비유하여 표현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국록을 받았던 선천부사 김익순아 정시는 벼슬이 가산군수에 불과했어 집안은 장동 김씨로 으뜸가는 명문이고 이름은 장안에서 떨치는 순자 항렬일러라 장군의 말 없는 긍지는 농서에서 항복하므로 추락하였고 열사들의 공명은 능연각 초상화 끝에서 빛나도다
김삿갓이 이 시를 보고 가져다 큰 소리로 한 번 읊고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이어서 피를 토하고 나서 다시는 관서지방의 땅을 밟지 않았다. 그가 늘 황해도를 왕래하였는데, 그의 구월산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갔고 올해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게 되어 해마다 구월이면 구월산을 지나게 되니 구월산 빛은 언제나 구월일레라
기상이 크고 의분에 북받쳐 슬퍼하고 한탄하다가 세상을 풍자하는 수 없는 시문을 남기고 어느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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