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덕천에 귀양 가서 관아의 뜰을 청소한 이관명
이관명(1661~1733)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자빈, 호는 병산이다. 숙종 13년 (1687)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세마에 보임되고 외직으로 함열군수가 되었다. 숙종24년(169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관명이 옥당의 교리로 당직하고 있을 적에 그의 아우 한포재 이건명이 강화유수에 발탁되어 사은(임금의 은혜에 사례함)한 뒤에 금관자를 달고 옥당에 들렀을 때 동료들이 그의 형을 놀리며 말하였다.
"아우는 재상이 되었는데 형은 아직 옥당에서 당직을 하고 있다니, 어찌하여 태어나기는 먼저 태어났는데 벼슬은 뒤진단 말인가?" 이관명이 태연하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다른 욕심 없이 오직 벼슬살이만 한다면 나의 교리 벼슬이 어찌 유수만 못하겠는가. 단지 죽은 뒤에 명정이나 자손들의 영화를 뽐내는 데 쓰일 뿐이지!"
경종 2년(1722)에 아우 이건명이 극형을 받자, 그도 연좌되어 덕천에 유배되어 종의 신분으로 패랭이를 쓰고 베옷을 입고 날마다 관아의 넓은 뜰을 깨끗이 비질을 하고 물러나와서는 종일토록 관문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군수가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직분을 다하였다. 영조 1년(1725)에 방면되어 돌아와서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가고 대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있다고 할 만한 윤지술
윤지술(1697~1721)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노팽, 호는 북정이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의 장의로 경종 1년(1721)에 상소를 올려, 대행왕(승하하여 묘호가 정해지기 전의 임금, 여기서는 숙종을 일컬음)의 묘지문을 지은 이이명의 잘못을 탄핵하다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숙야재 민익수, 정암 민우수가 윤지술이 죽은 후의 뒷일에 대한 수습에 대해 큰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야재는 그 딸을 윤지술의 아들 윤일복에게 시집 보내고, 정암은 그 부인을 보내어 윤지술의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게 하였다. 또 윤일복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그가 글을 배우려 하지 않으므로 정암은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우거하여 그의 집에 가서 가르쳤다. 이와 같이 이 두 사람은 죽은 사람이 가히 다시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다. 이 때 병계 윤봉구가 문화현령이 되었는데, 윤지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옛날 책["맹자"의 이루 편]에 이르기를, '까닭없이 선비가 죽으면 대부는 떠나가야 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대부는 못될망정 때를 보아 떠나가야 겠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의사의 피로 죽어서 사람을 감복시킨 임창
임창(1653~1723)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회이, 호는 강개옹이다. 어려서부터 의리와 절개를 매우 높이 생각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숙종 계비 민씨)가 중궁의 자리를 내놓았다는 말을 듣고 비분에 겨워 걸어서 서울로 올라와서 궐문을 지키며 통곡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충절을 의롭게 여겼다. 숙종 27년(1701)이 되어 계부인 지중추부사 흥망이 소사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조카 임창과 화합하였는데, 술을 마시면서 임창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오늘의 이별이 어찌 천고의 영결이 되지 않을 줄 알겠느냐."
임창이 용감히 나아가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소를 올려 민씨의 죽음을 다시 토의하자는 의논을 개진하니 교리 이탄이 괴이한 소라 일컫고 처벌을 주청하여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경종 2년(1722)에 심단이 판의금부사로서 임금을 대면하고 곧바로 그를 처형하였으니 그의 죄가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니므로 지사가 한을 품은 것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당시 어떤 고사의 가죽주머니에 피가 물든 흔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 고사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의사 임창의 피다."
그가 사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았다. 촉 땅의 사람이 진나라 충신 장홍의 피를 간직한 것과, 당나라 충신 안노공(이름은 진경이 우혁의 피를 혓바닥으로 핥은 것들이 모두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윤지술, 이의연과 함께 신임사화의 삼포의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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