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공의 힘으로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칭송받은 박태보
박태보(1654~1689)의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사원, 호는 정재다. 박세당의 아들이다. 숙종 3년(1677) 알성문과에 장원한 뒤 전적, 예조 좌랑 등을 역임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마침 파직되어 집에 있던 박태보는 오두인, 이세화와 더불어 반대 상소를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친국을 받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살이 찢기고 피가 흘렀으나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 노량진에 이르러 숨이 끊어졌다. 이때 박태보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박태보는 윤선거의 외손으로 유생 시절에 올린 상소문에서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를 호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송시열에게 원한을 사고 있었는데,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목숨을 잃자 송시열은, '공의 힘을 입어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찬탄하고 이미 써 놓았던 자신의 글 가운데 박태보에 관한 것은 모두 삭제하였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달리는 '말'로도 못 따라 잡는다고 한 이현조
이현조(1654~?)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계상, 호는 경연이다. 영상을 지낸 이성구의 손자다. 숙종 7년(1681)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 대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이현조는 궐문 밖에서 자리를 깔고 목놓아 울면서 폐위 중지를 호소했으며 그가 정청할 때 재신 민종도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폐위의 일을 목숨을 걸고 간쟁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맞는 일인가?"
이현조는 민종도의 말에 화를 내며 말했다.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달리는 말도 못 따라잡는 법이오! 말하기 쉽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오. 군부가 허물이 있으면 신자된 도리에 어떻게 간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이현조는 승지를 거쳐 강원 감사를 지냈으며 통천 임소에서 죽었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던 윤휴
윤휴(1617~1680)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희중, 호는 백호다. 효종 때 재학과 행의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 자의, 종부시 주부, 지평 등 여러 벼슬이 재수 되었으나 교지를 모두 반려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유태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윤휴의 고고한 자세를 우려하였다.
"윤휴가 고고함을 굽히지 않고 교명을 모두 반려한 것을 보면 이 세상을 온통 벌레처럼 가볍게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송시열이 윤휴의 집에 들르면 며칠씩 묵으면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담소하였다. 그것을 안 윤휴의 어머니는 아마도 송시열이 보통 손님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문틈으로 엿보고 나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들을 불러 신신당부하였다.
"내 그 사람을 보았는데 심술궂고 엉큼하며 그 말씨 또한 안정되어 있지 않고 아마도 속마음이 어질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조심하여라!"
그러나 어머니의 염려를 이해 못한 윤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손님은 큰 선비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염려는 적중하여 윤휴는 사문난적(유교의 교리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비난받은 사람)으로 몰렸으며, 허견의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끝내 사사되기까지 송시열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을 안 뒤에야 사람들은 윤휴 어머니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경신대출척(1680년 허견의 역모 등으로 남인이 실각한 사건) 때 남인들이 서리를 만나 대거 몰락하게 되었으며, 이 때 윤휴의 형제들 중 다섯은 유배되고 한 명은 배소에서 죽었다.
과거 급제를 기뻐하다 장인으로부터 크게 꾸중을 들은 권변
권변(1623~1726)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이숙, 호는 수초당이다. 숙종 7년 (168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하필 창방일(합격자 명단을 붙이고 발표하는 날)이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는 날이었다.
"대과에 급제한 기쁨을 안고 그의 장인 되는 소두산에게 인사를 갔으나 문전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소두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기껏 한다는 짓이 중궁이 폐위되는 슬픈 날 자네는 과거 합격의 기쁨을 즐기다니, 그래서야 어찌 사군자의 처신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날 내가 자네를 만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세."
이 말에 충격을 받은 권변은 즉시 달려가 문밖에 꿇어앉아 사과하였다.
"장인의 말씀을 듣고 이미 제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이제부터는 벼슬길에 결코 나가지 않고 근신하는 일로 일생 동안 지킬 법으로 삼겠습니다."
소두산은 그제서야 비로소 권변의 문안인사를 받고 엄하게 한번 꾸짖은 뒤에 '수당초(처음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라는 뜻)'이란 글자 석자를 써 주었다. 권변은 그 당부를 일생 동안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조정에서 부제학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결심을 굽히지 않고 살았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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