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1. 예론이 당쟁으로
산적 두목으로부터 목숨과 재물과 여인을 얻은 이완
"마침 사냥을 나가고 없는데 밤이 깊어야 돌아올 것입니다. 손님과 내가 한방에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 둘은 단칼에 죽을 것입니다. 나야 어차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지만 손님이야 보아하니 어느 댁 귀공자 같은데 무엇 때문에 헛된 죽음을 자초하려 하십니까? 속히 이곳을 피하여 끔찍한 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인의 말에 이완이 답하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허기나 면해 봅시다. 배가 몹시 고프니 찬밥 덩이라도 있으면 좀 주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은 부엌으로 달려나가 밥을 짓고 고기를 장만하여 밥상을 차려 내왔다. 술병도 함께 내왔다.
"그렇게 시장하신 줄도 모르고 저는...."
여인은 얼굴에 약간의 홍조마저 띠고 상머리에 앉아 반주를 권했다. 이완은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고기도 밥도 실컷 먹었다. 술기운이 돌자 이완은 여자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다. 그는 여인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여인은 매우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완은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당겼다.
"이러시면 안되는데...."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렵소? 우리가 아무 일이 없다고 해도 그것을 누가 믿어 주겠소? 또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 간단하게 죽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시오."
이완의 손은 이미 여인의 젖가슴을 매만지고 있었으며, 남녀의 얼굴은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몸으로 전달되었다. 순간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는 죽었네요. 이렇게 하지요?"
여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완은 더욱 태연한 목소리로 우선 여인부터 안심시킨 뒤에 바깥을 힐끔 쳐다보았다. 한 사나이가 잡아온 짐승들을 뜰에 내려놓고 이제 막 허리를 펴고 방문 쪽으로 다가서는데 키가 8척은 되어 보이는 우람한 체격이었다 벌컥 방문을 열며 들어서는 사나이를 보니 털이 수북하고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리에 누운 채 사나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치민 도둑은 성난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너는 웬 놈이냐?" 겁내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짐승을 쫓아 산으로 들어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여기까지 온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마시오." "이놈 봐라,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그래 길을 잃고 집을 찾아 들어온 놈이라면 저 바깥 사랑방에 있어야지 남의 안방에 들어와 남의 유부녀와 간통을 한단 말이냐? 또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주인이 들어오는데도 인사 한마디 없이 자빠져서 남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단 말이냐? 이놈이야 말로 간 큰 놈이 아니냐!"
험상궂은 얼굴은 더욱 험악해지고 칼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불끈 주면서 이완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완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미소까지 머금고 조용하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설령 사랑방에 있다고 한들 깊은 밤 산 속에서 남녀가 한집에 있었는데 설령 피차 모두 결백하다고 한들 당신이 믿어주겠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 뭐 그렇게 겁낼 게 무엇이요. 내 목숨은 그대 손에 달려 있으니 처분대로 맡기겠소."
도둑은 칼로 치지 않고 두선 새끼줄로 이완을 꽁꽁 묶어 천장 대들보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안주와 술을 갖고 오라고 시켰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서 있던 여인은 부엌으로 나가 고기를 굽고 술상을 차려서 내왔다. 도둑은 목이 탔던지 우선 술항아리에서 술 한 사발을 들이마시더니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째 삶아 온 노루의 뒷다리를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칼끝으로 뭉텅 베어서 씹어 먹다가 말고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곧 죽을 놈이지만 곁에 두고 혼자 먹으니 술맛이 나야 말이지."
그는 칼끝에 고기 한 점을 찍어 들보에 묶여 있는 이완의 코앞에 바짝 들이댔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무슨 배짱으로 고기를 받아 먹으랴 싶어서 한 행동인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완은 얼른 입을 벌리고 고기를 맛있게 받아먹고는 술도 한 잔 달라는 것이 아닌가! 이완의 대담성에 놀란 것은 도둑이었다. 도둑은 이완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장사로군!" 이완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죽을 사람 앞에 웬 농담이시오. 옛적에 항우가 번쾌를 보고 장사라고 했다더니 이제 공은 그 말을 네게 써먹는 것이오? 내가 번쾌라면 당신은 초패왕이란 말이지요?"
도둑은 '우하하...' 하며 입이 찢어질 정도로 한바탕 웃고 나서 땅바닥에 칼을 놓고 벌떡 일어나 이완의 결박을 풀어 주고 손까지 잡으면서 말했다.
"천하의 기남자를 몰라보고 내가 너무 무례했네. 장차 나라의 간성이 될 재목을 내가 어떻게 해치겠나? 어처구니없는 몇 마디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그대를 이미 나의 지기로 여기고 나의 남은 재산을 모두 그대에게 양도하니 그렇게 알게나. 남자가 무슨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산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 나의 청을 거절하지 말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이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실로 어색한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도둑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여자 말인데, 나와 정식 혼례를 치른 사이도 아닐 뿐 아니라 공과 이미 만리장성을 쌓았을 테니, 내가 데리고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 이제 한잔 술로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지!"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가자 두 사나이는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누구의 제의로 맺어졌는지 두 사람은 어느새 결의 형제가 되어 형님 동생 하면서 분위기가 자못 화기애애하였다.
"이봐 동생! 먼 후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내 목숨이 동생 손에 달려 있을 때가 반드시 올 걸세. 동생! 설마 그 때 오늘의 내 부탁을 잊지는 않겠지? 동생! 그럼 잘 있게."
이 말을 남기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도둑은 훌쩍 떠났다. 이완도 그의 말대로 그가 남긴 재산들을 모두 정리하여 여자를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완은 무관으로 출세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포도대장이 되었다 어느 날 산골로부터 산적 두목이 잡혀 왔는데 자세히 보니 지난날 결의 형제를 맺은 바로 그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장 이완은 그와의 지난날의 인연을 효종에게 자세히 아뢰고 특별한 윤허를 받았다. 드디어 산적은 석방되고 무관의 한 직책을 맡아 일하게 되었으며 맡은 바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얼마 뒤엔 무과에 대비하여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마침내 합격하고 나중엔 병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완이 효종의 신임을 받고 북벌에 대한 깊은 생각을 주고받을 때의 일이다. 국가 간성지재를 구할 목적으로 무예가 뛰어나거나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건 조정에 추천하던 시절이었다 이완이 훈련대장이 되어 수분(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조상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일)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훈련대장의 행차가 용인 어느 주막에 다다랐을 때였다. 주막 마루에 키가 10척, 얼굴이 한 자나 되어 보이는 수염이 텁수룩한 청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옷은 남루하고 살은 없이 바싹 말랐지만 기골은 장대하고 번쩍이는 두 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탁주 한 동이를 꿀꺽꿀꺽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이완은 말에서 내려 사람을 시켜 그 청년을 불렀다. 불려 온 그 청년은 이완 대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돌 위에 거만스레 걸터앉아서 이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는 탓하지 않고 그와 대화를 시작하였다.
"자네 성명이 뭔가?" "박탁입니다." "무엇 하는 사람이냐?" "본시 사족인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자랐으며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서 팔아 그것으로써 노모를 봉양하고 있습니다." "술을 더 마실 수 있느냐?" "아, 남아가 되어서 어찌 잔술을 사양하겠습니까!"
이완은 돈 100문(1돈에 상당함)으로 술 한 동이를 사서 자신이 한 사발만 마신 뒤에 나머지는 모두 박탁에게 주니 '벌컥벌컥' 순식간에 술 한 동이를 다 마셔 버렸다.
"너 혹시 이완 대장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내가 바로 이완이다. 지금 조정이 널리 인재를 찾는 길이니 너는 나를 따라 한양으로 가겠느냐?" "노모가 계시니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겠구나! 그러면 내가 너의 모친을 만나 볼 터이니 앞장서서 너의 집까지 길을 인도하라."
이완은 박탁을 따라 시골길 10여 리를 가서 낡은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이완은 박탁이 사립문 밖에 깔아 주는 자리에서 아들을 따라 나온 그의 어머니의 인사를 받았다. 입은 옷은 초라했지만 말씨나 행동은 양반집 아낙의 품위를 잃지 않은 60세쯤 되어 보이는 단정한 부인이었다.
"저는 훈련대장 이완이란 사람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자제를 만났는데 첫눈에 인걸임을 알았습니다. 훌륭한 자제를 둔 것을 경하합니다."
부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옷깃을 여미고 대답했다.
"개돼지처럼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그토록 과찬해 주시니 이 촌부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인재를 널리 구하는 중입니다. 이번에 자제를 우연히 만나 보고 그냥 두고 가기는 너무 아까운 인재 같아서 한양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부인께서는 허락하실는지요?" "저 아이가 독자로 태어난 후, 남편을 사별하고 오직 모자가 외롭게 서로 의지하여 살아왔습니다. 황송한 말씀이지만 장군의 명에 따를 수 없습니다."
부인의 거절이 완강하자 이완은 재삼 간청했다. 이완의 간곡한 청에 감동되었는지 드디어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 포부와 뜻을 품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장군의 간곡하신 권고가 이러한신데 아녀자의 구구한 사정에 얽매여 장군의 말씀을 저버리겠습니까?"
이완은 부인의 용단에 감사한 뜻을 표하고 박탁을 데리고 발길을 한양으로 돌려 대궐로 향하였다. 이완은 효종은 박탁을 대면하고 몇 마디 물었다. 임금 앞에 나온 박탁은 절도 하지 않은 채 앉았다. 효종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수밖에 없었다.
"너는 몸집은 그렇게 큰데 어찌 그렇게 말랐느냐?" "대장부가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안 그럴 수 있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래, 그 말이 맞다. 네 대답이 마음에 드는구나."
효종은 박탁과의 첫 대면에서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이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에게 무슨 벼슬을 내려야 마땅하겠느냐?" "우선 신이 데리고 가서 대략 가르친 뒤에 직책을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 날부터 이완은 박탁을 가까이에 두고 좋은 음식과 옷을 주고 병법과 무예를 하나하나 가르쳤다. 또 예의 범절도 가르쳤다. 어찌나 머리가 영리하던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성과를 보였다. 또 효종의 관심도 매우 높아 박탁의 무예 공부를 자주 물었다. 혹 이완이 북벌에 대해 박탁에게 상의하면 이에 응답하는 박탁의 지모는 매우 우수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1년이 되어 가는 어느 날 국상이 났다. 효종이 승하한 것이다. 1659년 5월 4일의 일이었다. 효종의 인산이 끝나자 박탁은 작별을 고하러 왔다. 이완은 깜짝 놀라 만류하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나와 너 사이는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정의는 부자간과 같은 사인데 네가 어떻게 차마 나를 버리고 떠난단 말이냐?"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돕지 않아 갑자기 국상을 당했으니 이제 큰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할일 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옷과 밥만 축낼 뿐이며 이런 낭비는 결코 옳지 못합니다."
박탁은 손으로 눈물을 닦고 하직을 고하고 떠나갔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노모를 모시고 다시 산골로 들어간 이후로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이완의 집은 서울 동부 낙봉 밑에 있었는데 인평대군(1622~1658, 인조의 셋째 아들)의 집이 바로 이웃에 있었다. 이완은 대장으로 승진하자 급히 서둘러 안국방으로 이사하였다. 병권을 가진 신하가 왕자와 한마을에 사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판단은 사려 깊은 행동으로 인정받았다. 이완이 훈련대장으로 있을 적 때의 일이다. 밤중에 입궐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사모 관대의 복장으로 서둘러 말에 타려고 하자 이완의 첩이 가로막고 섰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 왕명인데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난 이완은 첩의 사려 깊은 행동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대장의 신분이면 마땅히 속에 갑옷을 입어서 만약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이 유비무환의 조처는 적중하였다. 이완이 입궐할 때 궐내의 모든 등은 꺼져 있었고 사방에서 화살이 비오듯 날아왔다. 그러나 갑옷 덕분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임금 앞에 설 수 있었고, 효종으로부터 과연 대장의 재목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바로 이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 인준이 뒤에 이완의 적통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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