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비오는 날의 나막신 구실을 한 정사룡
정사룡(1491-1570)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운경, 호는 호음이다. 시문은 잘하면서도 경학을 익히지 않아 응교로 있으면서 매번 임금 앞에 나아가 글을 강론할 때를 당하면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차라리 열 번 중국 학질에 걸릴지언정 한 차례 경연에 나가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정사룡이 홍주목사 시절에 사달정을 짓고 그곳에서 날마다 시 읊는 것을 일삼으며 영을 내려 주민들 가운데 소송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살아 있는 메추라기를 갖다 바쳐야만 사건의 심리를 허락한다고 하였다. 어떤 주민이 소송을 하려고 관아의 문에 이르자 메추라기가 죽어 벼려 문지기가 받아 주지 않으므로 주민이 관아에 들어 가서 소송을 하였지만 정사룡이 허락하지 않고 내쫓아 버렸다.
중종 32년(1537)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올 때 소세양은 원접사가 되었고, 정사룡은 가선대부로 평양 영위사가 되었다. 그런데 공 사신의 문장이 광대하여 연로에서 지은 작품이 먼저 조선에퍼졌다. 조정 의논이 모두 소세양이 그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소세양이 의주에 있으면서 병으로 사임하고, 정사룡을 자헌대부로 승진시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나를 비오는 날의 나막신으로 삼는구나"
정사룡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평상시에는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다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활용함을 이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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