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개탄한 이해
이해(1496-1550)의 본관은 진보이고, 자는 경명, 호는 온계이다. 중종 20년(152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대사헌이 되어서는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젊어서는 김안로와 이웃에 살았고 또 인척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김안로가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여러 차례 그를 도와주는 뜻에서 등용하려 하였지만 이해는 끝까지 그 농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구수담과는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기는 하였으나 서로오간 적이 없었는데 구수담이 대사간이 되어 이해를 탄핵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해 여름에 대신이 임금의 명령을 받아 구수담을 논박하여 죽게 하였다.
이무강이 이해와 같이 사국(예문관, 춘추관의 별칭)에 근무했는데 지나는 길에 자기 집에 들러 달라고 요청했으나 여러 차례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이무강이 이해를 중상하여 이기에게는 환심을 사고 자신의 분함을 풀려고 그가 구수담과 한 패거리가 되었다고 무고하여 옥사가 더욱 급박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허위로 자백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이해를 꾀었다.
"허위로 자백하여 구차하게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 이해가 탄식하며 스스로 상소문을 초하여 올리려고 하니 취조관이 이기를 두려워하여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장형을 받고 갑산에 유배되었는데 유배 도중 양주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55세였다. 퇴계 이황이 그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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