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천기를 누설한 정렴
정렴(1506-1549)의 본관은 온양이고, 자는 사결, 호는 북창이며 정순붕의 아들이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적에 벌써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고 신명과 통할 수 있어 가까이는 여염집 거실의 은미한 것과 멀리는 네 종류의 이족과 여덟 종류의 만족들의 각기 다른 풍속과 기질 그리고 개를 부르는 소리며 백로의 울음소리를 귀신처럼 알았다.
14세에 중국에 들어가니 유구국 사람이 특이한 기상의 정렴이 도착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와서 두 번 절하고 배우기를 청하였다.
"제가 점을 쳐보았더니 그 점괘에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으로 들어가 틀림없이 진인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이 바로 진인이 아닙니까?"
이에 외국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찾아와서 배우려고 하므로, 정렴이 사방 이족의 말로 유창하게 응답해 주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겼으며,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불렀다. 정렴은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양주의 괘라리에다 살 곳을 정하였다. 어느 해 9월 하순에 늦게 핀 국화를 두고 시를 읊었다.
십구 이십구 모두 구로 된 숫자여서 구월이라 구일이 일정한 때가 없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뜰에 가득한 국화만은 알도다
그의 동생 고옥이 화답하였다.
세상 사람들 중양절을 가장 소중히 여기지만 중양절에만 흥취를 길게 할 필요는 없어 언제나 국화를 마주보며 막걸리 마시면 구십 일 간의 가을 어느 날인들 중양이 아니랴
정렴이 본래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의 아버지 정순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하루는 금강산에 놀러 갔다. 북창이 따라갔더니 정순붕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네가 휘파람을 잘 분다고 하였으나 내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런 경치 좋은 곳에 와서 한 곡조 불어 보는 것이 좋겠다"
이튿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일찍 떠나려고 하니 중이 만류하였다.
"오늘은 비가 내려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오후 늦게는 틀림없이 날씨가 갤 것이다" 정순붕이 이렇게 말하고 마침내 청려장(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을 짚고 갔는데, 한낮이 되자 정말 날씨가 개었다. 정순붕이 중을 따라 올라가는데 산꼭대기에서 피리 소리가 울려 바위 골짜기가 모두 진동하는 듯하였다. 중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깊은 산속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지경에 누구의 피리 소리가 이렇게도 맑고 웅장한가. 틀림없이 신선이 부는 것이리라" 정순붕은 속으로 누 분다는 것을 알고 올라가서 보았더니 피리 소리가 아니고 정렴이 부는 휘파람 소리였다. 정렴이 불교에 마음으로 통하는 술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 요점이 되는 관건을 얻지 못하여 한탄하더니 어느 날 절에 들어가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사물을 관찰한 지 3, 4일 만에 문득 환하게 깨우치고 백리 밖의 일을 곧장 알아맞추기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맞아떨어져 백 가지에 한 가지도 어긋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곳에 살고 있는 중이 찾아왔다. 정렴이 그를 보며 말했다.
"오늘 집에 있는 종이 술을 가지고 올 것이오"
잠시 후 그가 다시 놀란 얼굴로 다시 중에게 말했다.
"이상하기도 하군.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었소" 얼마 있다가 종이 와서 말했다. "술을 지고 오다가 고갯마루에서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술병이 모두 깨졌습니다"
정렴이 항상 조용한 방에 거처하면서 장생불사하는 선약을 불을 때 만드는 법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 무렵 손님 한 분이 왔는데 가난한 선비였다. 한창 얼어붙는 겨울이어서 그 선비가 몹시 추워했다. 북창이 창고 곁에 있는 차가운 쇳조각을 가져다 겨드랑이 밑에 끼고서 다리미질하듯 왔다갔다 하다가 꺼내어 그 손님에게 주었더니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화로같이 더워서 땀이 흘러 그 손님의 온 몸을 젖게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고질병을 앓은 지 몇 달이 되어 침과 약을 두루 써 보았지만 낫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북창이 앉아 있던 자리의 잔디 한 움큼을 뜯어다 손으로 문지르고 입으로 불어 따뜻하게 한 뒤 그것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병이 금방 나았다.
또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지어준 약이 효험이 없으므로 그 사람의 아버지가 북창에게 신기하고 특이한 술수가 있음을 익히 알고 북창에게 아들의 명수를 캐어 물었다.
"정해진 햇수는 이미 다 끝이 나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친구의 아버지가 울면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기를 바라므로 북창이 그 정의를 가련하게 여겨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정 그러시면 저의 10년의 수명을 줄여서 어르신 아들의 나이에다 보태 드리겠습니다. 이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내일밤 삼경에 혼자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붉은 옷을 입은 중과 검은 옷을 입은 중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 앞에 가서 애절하게 간청을 하면서 어르신 아들의 목숨을 연장시켜 달라고 애원하되 중이 아무리 욕을 하며 내쫓더라도 물러나지 말고 아무리 지팡이로 때리더라도 싫어하거나 피하지 말고 정성을 들여 천번 만번 간곡히 빌면 소원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북창의 말대로 밤이 되어 달빛을 의지하여 혼자 남산의 누에머리 봉우리에 올라가니 과연 두 명의 중이 있었다. 그들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을 하고 울면서 사정을 고해 바치니 두 중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지나가던 중이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허망한 짓을 하시오. 당신 아들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을 내가 어찌 알겠소. 빨리 물러가시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못 들은 체하며 두 손을 모으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간절히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니 때려서 쫓아 버리자"
중이 화를 내며, 마침내 지팡이를 들어 마구 두들겨 패므로 그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죽기로 버티면서 물러서지 않고 땅에 엎드려 울면서 애걸하였다. 그러기를 한참하고 있으니 검은 옷을 입은 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정렴이 가르쳐 주고 인도한 것이다. 그 아이가 한 짓이 한심스럽기는 하지만 저의 수명 10년을 줄여서 이 사람의 아들 수명에다 보태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붉은 옷을 입은 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였다. 두 명의 중이 그제야 그 사람을 부축하여 일어나게 하고 위로하였다.
"잠깐 당신을 시험했을 뿐이오"
검은 옷을 입은 중이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붉은 옷을 입은 중에게 전해 주니 그 중이 받아서 달빛에다 대고 붓을 들어 글자를 쓰는 듯하더니 곧이어 말했다.
"당신의 아들은 지금부터 수명이 연장되었으니 돌아가거든 정렴에게 다시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고 전하여 주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옷을 입은 중은 남두였고, 검은 옷을 입은 중은 북두였다.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의 병이 점점 나아 정말 10년을 더 살았고, 북창은 세상에서 44년 동안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