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성균관 뜰에다 손수 은행나무를 심어 교훈을 남긴 윤탁
윤탁(1472-1534)의 본관은 파평이고, 편감 윤사은의 아들이다. 자는 언명, 호는 평와이다. 연산군 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주계군 이심원에게 글을 배웠는데 주계군은 종실의 자제로서 성리에 관한 학문을 앞장서서 제창한 분이다. 윤탁은 갑자사화 때에 귀양갔었는데 중종이 왕위에 올라 그를 방치된 가운데서 기용하여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당시 정암 조광조와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조정에 모여 도학을 제창하고 천명하면서 자신들이 강학하던 자리를 치워 버리고 모두 윤탁을 선생으로 추대하였다. 윤탁은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고, 부지런한 것을 즐겁게 여겼다.
퇴계 이황이 매양 선생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을 열거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윤탁을 윤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바 '대학'의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학설도 송나라 주희가 연구하여 물려준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려고 도모할 적에 윤탁이 죄정을 의논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즉시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뭇 소인들이 윤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는 파직되고 물리침을 당하였다. 지금 성균관 뜰에 그가 손수 심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다. 윤탁은 매양 학생들에게 말하였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마지막에 틀림없이 무성하게 된다" 때문에 그에게서 배운 이들은 모두 근본을 돈독하게 하고 실학을 힘쓰며 정정당당하여 그 스승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중종 29년 개성유수로 임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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