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영의정의 청을 거절한 올곧은 부사 정붕
정붕(1469-1512)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운정,호는 신당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가 되고 성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과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였다.
무령군 유자광이 간교하고 탐욕한 짓을 하여 방자하였는데, 정붕이 고종사촌간이라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을 그 집에 보낼 적에는 반드시 감노끈으로 그 팔을 단단히 묶어서 표시를 하여 보냈다가 돌아오면 그것을 풀어 주었다. 그것은 여종이 아픔을 느껴 급히 갔다가 빨리 돌아와서 그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곤장을 맞고 영덕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교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가다가 중도에 병을 핑계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누차 나라의 부름이 있어도 나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뭇 마음을 놀라게 하는 무서운 일이 있으니, 나의 고향 마을에 물러 나와서 내 마음을 안정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교리로 대궐로 나아가는데, 서각대를 띤 재상이 앞에 있었는데, 그는 기묘사화 주모자의 한 사람인 홍경주였다. 내가 갑자기 마음이 섬뜩해서 몸을 빼 물러 나왔다"
영의정 성희안이 임금에게 아뢰어 정송부사에 제수 하였다. 성희안이 젊은 시절에 정붕과 서로 사이좋게 지냈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이어서 잣과 꿀을 요구하자, 정붕이 회답하였다.
"잣은 높은 산봉우리 맨 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안에 있으니, 수령된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구하겠습니까"
성희안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였다. 연산군 초기에 정붕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문묘에 있는 신주의 위판이 절로 옮겨지는 꿈을 꾸었다"
이 말대로 연산군이 황음하고 난잡하여 성균관을 잔치하는 장소로 삼고 신주의 위패를 깊은 산중의 절로 옮겨 놓아 제사가 오랫동안 끊겼다. 강혼과 심순문이 모두 가까이하는 기생이 있었는데 정붕이 두 사람에게 경계하였다.
"어서 그들을 멀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강혼은 그 기생을 버렸고 심순문은 정붕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뒤에 두 기생이 궁중에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심순문은 마침내 비명에 죽었다.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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