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평생 '소학'을 가까이 했던 소학동자 김굉필
김굉필(1454-1504)의 본관은 서흥이고,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이다. 일찍부터 김종직에게서 수학하여 평생에 '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소학 동자'라 불리었다. 일두 정여창과 뜻이 통하고 의기가 합치되었다. 연소할 적부터 초립을 쓰고 연밥 갓끈을 늘이고 다녔는데, 만년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방에 조용히 거처하면서 책상에 마주 앉아 책을 보되 밤이 깊어도 잠을 자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도 그의 하는 을 엿보지 못하였고, 이따금 늘어뜨린 연밥 갓끈이 책상을 칠 적에 쟁그랑쟁그랑 소리가 들려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 뿐이었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24년에 유일(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숨어 사는 유능한 선비)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고 형조 좌랑에 전임되었다. 연산군 4년(1498) 가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장형을 맞고 희천에 유배되었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에 죄가 추가되어 사사하니,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수염을 입에 물고 조용히 말하며 죽음에 나아갔다. "신체와 터럭과 살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것까지 손상을 받을 수 없다" 이때가 그의 나이 51세였다. 중종 때에 우상에 특별히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경이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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