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4대에 걸쳐 정려문이 여섯 번이나 세워진 정성근
정성근(?-1504)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군부이다. 성종 5년(14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모가 돌아가시자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마쳤으며 몸이 야윌 정도로 슬퍼하였다. 또 성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기가 끝난 뒤에도 슬퍼서 마음으로 상복을 입는 심상삼년을 입으니, 사람들이 모두 충효를 모두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승지로 있을 적에 강직하여 뜻을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사명을 받들고 대마도에 들어가자, 대마도주가 그림, 부채, 호초, 향조각 따위를 예물로 바쳤다. 정성근은 일행이 대마도주에게 받은 것을 다 거두어서 한 그릇에 봉해 두었다가 귀국할 때에 접대하던 왜관 편으로 그 물건들을 도주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대마도주가 그 물건을 우리 나라 임금에게 보내어 정성근에게 주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대마도주의 청을 들어주려 하니, 정성근은 극구 사양하였다.
"신이 저 대마도에 있을 적에 받지 않다가 이곳 우리나라에 와서 받으면 전후 마음이 다른 것이니 참으로 원치 않습니다"
주상은 정성근에게 억지로 권할 수 없어 도로 대마도로 보냈다. 그의 청백함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성종이 승하하자 정성근이 삼년상을 행하였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 때에 괴이한 행동을 한다 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아들 주신. 매신 및 매신의 아들 원린, 원기, 원린의 아들 효성이 모두 효행으로 이름나 정려문이 여섯 번이나 세워졌다.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바이므로 세상에서 정씨 가문을 '효문'이라 하였다. 이안눌의 시에,
한 가문에 충신 효자 여섯 정려문이네 라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읊은 것이다.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중종반정 뒤에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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