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비 새는 집에서 살았던 맹고불 맹사성
맹사성(1360-1438)의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성지, 호는 동포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열 살 때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일주일 동안 미음도 먹지 않았고, 장례를 치른 뒤에 3년 동안 산소를 지키며 죽을 먹었다. 묘 곁에 잣나무가 있었는데 산돼지가 내려와 잣나무에 몸을 비비곤 하여 말라 죽게 되었다. 맹사성이 통곡하니 그 이튿날 산돼지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려문이 서게 되었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의 곳곳이 새서 의관을 모두 적시게 되었다.
"정승의 집이 그렇게 초라한데 내가 어찌 행랑채를 짓겠는가?"
병조 판서는 집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을 다 치우라고 하였다. 맹사성의 본가가 온양에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내려갈 때면 관청에 들르지 않고 시종 한 명을 데리고 간편한 차림으로 가곤 하였다. 한번은 소를 타고 온양에 내려갔는데 양성, 진위 두 사또가 공이 내려온다는 것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웬 사람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문책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사또가 보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가서 온양 맹고불이라고 일러라"
그 사람이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니 이 말을 들은 두 사또가 혼쭐이 나서 도망가는 바람에 차고 있던 인끈이 언덕 아래 깊은 못에 빠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못을 인침연이라고 부른다.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인에서 비를 만나 여관을 찾게 되었다. 이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은 어떤 사람이 먼저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딸린 하인들이 무척 많았고 그의 차림새도 무척 호화로웠다. 그는 영남에 사는 부자로서, 녹사(기록이나 문서, 전곡 등을 담당하는 관리) 시험을 보려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구석방에 든 맹사성을 누각으로 불러 올려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고 거만스런 말투로 제의하였다. 막힘 없이 말을 주고받되 묻는 말은 '공'자로 끝내고 대답하는 말은 '당'자로 끝내기로 약속하였다. 이 제의에 따라 맹사성이 먼저 시작했다.
"서울은 무슨 일로 가는공?" "녹사 시험에 응시하러 간당" 맹사성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공이 뽑히도록 해줄공?" "하하, 그렇게 못한당" 뒷날 의정부에 그 사람이 녹사 입시생으로 들어와서 맹사성에게 인사하였다. 맹사성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공?" 그는 엎드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죽어지이당"
그 자리에 참석한 재신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맹사성이 그들에게 지난 이야기를 해주자 좌중은 배를 잡고 웃었다. 맹사성은 그를 녹사로 채용하였다. 그는 그 뒤 여러 고을에서 유능한 아전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는 모두 맹사성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공당문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07 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