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시인의 통음사 - 권필 / 딜런토마스 / 박정만
권필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이 되고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송강 정철의 문인이었다. 성격이 호방하고 자유분방하여 구속을 싫어했으며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광해군 4년, 그는 왕비 유씨의 외척들이 세력을 쥐고 날뛰자 궁유시를 지어 풍자 비방하였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이 흩날리고 (궁유청청화난비) 만조백관으로 하여 봄빛이 더욱 빛나는구나. (만관개미성춘휘) 조정이 모두 태평세월을 구가하는데 (조가공하승평락) 누가 위태로운 소리를 지껄여 벼슬을 물러나랴. (수유위언출포의)
이같은 사실이 알려져 광해에게 엄한 심문을 받고 해남으로 귀양을 가던 중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따라주는 술을 그는 전부 받았다. 말술을 청해 단숨에 마시고는 바로 이튿날 죽어버렸다. 44세였다.
영국의 시인 딜런 토마스.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만년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맥박, 그것은 제 무덤을 파는 삽질소리. 태 속의 애기가 어머니 두 다리를 가위삼아 장차 자신이 입을 수의를 마름질 하는 재단사.
그는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었다. 1953년, 딜런은 빈번하게 의식을 잃었다. 의사로부터 목숨을 건지려면 절대로 술을 끊어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딜런은 탈진하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병적으로 우울해 보였다. 그가 혼자서 외출했다가 1시간 반 후에 돌아와 말했다.
난 위스키를 열여덟 잔이나 마셨지. 신기록일 거야.
그리고 그는 그 직후에 죽었다. 4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의 박정만 시인은 왜 통음사를 하였을까?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단 2행의 시를 남기고 사라진 박정만, 그는 정말 시인이었다. 40번의 퇴고를 거쳐야 한다던 그래서 20년 동안에 단 두권의 시집밖에 낼 수 없었던 이 과작의 시인은 어느 날 헐크 처럼 표변해 있었다. 1987년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의 약 20일 동안 끼니를 거른 채, 하루에 소주를 여섯 병씩 마셔가며 무려 300여 편의 시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20일 동안 여섯권 분량의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동료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대답한다.
아무도 그 얘길 믿으려 하지 않아요. 혹 기형도란 친구는 믿어줄랑가 하긴 그때의 일이 지금에 와선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몇 달 동안 밥은 한 끼도 안 먹고 끼니마다 소주 두 병씩 마시던 때였어요. 앉아서 쓰고 누워서 쓰고 서서 쓰고 자다가 깨어나 쓰고 하여튼 시가 물밀 듯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더라니까요. 하루에 보통 열다섯 편씩 썼어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최악의 건강상태에서 곡기조차 끊고 시작에 몰두하게 하였을까? 300여 편의 시를 토해내고 얼마 안 된 그는 탈진상태가 되어 기어코 병원으로 실려가고 말았다. 1987년 5월 29일은 악운의 날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낯선 사람에게 연행되어 갔다. 발가벗긴 채 두 시간 남짓 온갖 고문을 당하고 초죽음이 되어 풀려 나왔다. 박정만은 그 무렵 출판사 고려원 의 편집장으로 있었다. 한수산과의 소설 출판 계약건으로 제주도로 가서 한수산을 만났다. 나이도 동갑이고 학교도 동문이어서 이내 어울려 친해졌다. 물론 출판계약도 성사되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가장 먼저 연행돼 간 한수산이 심한 곤욕을 당한 뒤 심문과정에서 가까운 문인의 이름을 대라는 협박에 마지못해 서명한 몇몇 사람의 이름가운데 박정만이란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규웅도 박정만과 똑같은 고문을 받았는데 나중에 두 사람은 광화문 뒷골목의 어느 맥주집에서 만나 얘기할 기회를 가졌다.
형님, 도대체 워쩐 일이다요. 도대체 이유나 알았으면 좋겄소. 형님 아시다시피 내가 그 흔한 서명이란 걸 한 번 해 봤소? 아니면 참여시란 걸 써 보길 했소. 왜 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당해야 했는지 아는 대로 좀 가르쳐 주소.
호남 사투리로 그는 낮게 부르짖었다. 걷어올린 바지자락 속엔 피멍든 다리가 앙상했다.
한수산이가 자넬 가장 친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그를 딱 한 번 만난 일밖에 없거든요. 그 사건 직후에 박정만은 이런 시를 썼다.
(앞부분 생략) 펄펄 끓는 물솥에 수건을 적셔 내 몸의 어혈 위에 찜질도 하고 탕기에선 한밤내 부글부글 죽음이 들끓는 소리. 절명하라, 절명하라, 절명하라, 이를 갈다 이를 갈다 가슴도 부글부글 소리를 내고 분노도 피딱지도 약에 녹아 하나가 되고 어혈은 풀어져서 내몸의 피와 살과 뼈에 스미고
분노에 분노. 그는 20일 동안 끼니를 거른 채 빈속에 소주 여섯 병씩을 매일같이 흘려 넣으며 자신의 내부에 깃든 무엇인가를 파괴해 나갔다. 씻어내렸다. 마흔 살, 그의 생애는 시 300편과 바꾼 통음사였다. 딜란 토마스가 폭음하여 죽은 나이와 똑 같았다. 88 서울올림픽 이 폐막식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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