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다른 또 하나의 방에서 존재한 영혼 - 이상 / 카프카
이상 [李箱] 1910∼1937.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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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1910년, 서울 통의동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와 행랑채가 달린 건평 150평 정도의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그는 두 살 때 벌써 정신적 충격인 유년기의 정서불안을 겪게 된다. 큰아버지댁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로 입적된 그는 분가하는 부모를 따라 나설 수 없었다. 핏기 없이 얼굴이 하얀 이 소년은 옷을 버리는 일도 없이 방안에서 그림 장난이나 하며 혼자 놀았다. 이러한 성향이 후일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두 살 때부터 벌써 <천자문>을 놓고 지 자를 외며 가리켰고, 하루 동안에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너무나도 조숙한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박제된 천재였던 것이다. 1929년 경성공고를 졸업하고 큰아버지의 알선으로 조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취직이 되었다.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하게 된 것은 1930년 조선지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 이 연재되면서부터였다. 몸이 좋지 않아 직장 생활을 그만 두고 황해도 배천으로 요양을 떠났는데 거기서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준 금홍이란 기생을 만나게 된다. 요양 생활은 폐결핵을 더욱 심화시키는 자학의 상태로까지 몰고 갔다. 건강만 더 나빠져서 그는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10대조의 고성 이었던 통인동 집을 처분하여 종로에 다방 제비 를 차렸다. 금홍을 마담으로 앉혀놓고 다방 뒷방에서 아예 그녀와 살림을 차렸다.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등의 문인들이 출입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를 발표하여 문단과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두 번째 각혈을 하게 되면서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자의식이 발동해 1936년 여름, 친구의 여동생 변동림과 돈암동 흥천사에서 혼인을 하게 된다. 비록 가정을 꾸렸지만 궁핍한 생활은 여전했고, 몸은 극도로 허약해지고 있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그는 도약을 위한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차가운 궃은 비가 축축히 내리는 플랫폼에서 결혼한지 반 년도 못된 신부와 동생, 그리고 몇 사람의 친구가 쓸쓸히 지켜보는 가운데 헙수룩한 가방을 들고 그는 기차에 오른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것이 그에게는 마지막이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 뒤, 화장된 그의 몸은 유해로 돌아오게 된다. 고국땅 미아리 공동묘지에 와서 묻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괴이한 사람으로 몰려 낯선 땅 니시간다 유치장 안에 갇혀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1937년 3월 중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보석으로 풀려 나오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폐병 3기의 상태였다. 도쿄에 있는 친지들이 대학부속 병원에 서둘러 입원을 시켰는데 의사는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버려 두었을가? 폐가 형체도 없다니 하면서 혀를 차더라는 것이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달려갔다. 평소에 그를 알고 지내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상은 레몬을 사달라고 하였다. 몇몇 친구가 주머니를 털어 레몬을 사가지고 왔다. 그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손에 쥔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주위를 둘러본 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그는 종생기 에 이렇게 자신의 묘비명을 썼다. 묘지명이다.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장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 후 1937년 정축 3월 3일 미시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졸한 날은 한 달이 조금 지난 그해 4월 17일 새벽 4시였다. 그의 대표시 오감도 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 그리고 죽기 1년 전에 쓴 날개 에서 보여지는 자폐된 공간, 장짓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완전하게 격리된 하나의 다른 방 에서 혼자 생명의 소진을 겪고 있는 한 남자에게 우리는 자연히 주목하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 샴사도 철저하게 격리된 방에 갇혀 혼자 죽어가지 않았던가. 세상과의 단절, 홀로 있음에 힘든 존재였음을 각각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잇는 것이다.
카프카 [Kafka, Franz] 1883. 7. 3 프라하~1924. 6. 3 빈 근처 키를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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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한 마리의 벌레 - 카프카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의 주인공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흉칙한 벌레로(발이 많이 달린 돈벌레 비슷한 것) 변신해 있었다. 의식은 완전히 인간 그대로인데 자신의 말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수치심에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그는 숨어 버렸다. 흉측한 그의 모습을 본 가족들도 그를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어 버렸다. 그래도 밥만은 제때 누이 동생이 날라다 주었다. 어느 날 손님들 앞에서 누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했을 때 그 소리에 이끌려 그레고리 샴사는 응접실로 나갔다. 가족들에게 호되게 나무람을 듣고 자기 방을 쫓겨 돌아온 그는 낙심에 빠져 어두운 방에서 까딱도 않고 앉아 있더니, 새벽녘에 혼자 숨이 끊어졌다.
<변신>의 줄거리다. 주인공은 그 동안 가족들을 충실히 부양해 왔다. 그럼에도 가족들에게 버림 받아 밀폐된 세계에 혼자 갇히고 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밀려난 국외자, 가족관계나 부부의 연대의식을 그들은 오히려 부정하고 일탈함으로써 자유롭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절망 앞에서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리고마는 그레고리 샴사. 날고싶다고 외치는 이상의 절규,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현실 앞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두 작가의 자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폐병이 무거워졌을 때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 카프카는 말했다. 두 사람은 부유한 가문에 태어났으나 생활력이 없어 빈한한 삶을 살았고, 심한 폐병과 싸워가며 우울하고 심각한 작품들을 써낸 특이한 작가들이었다. 그리고 신경과민한 폐결핵환자들이었다. 카프카도 잠시 정부기관(노동자 재해보험국에 봉직한 일이 있었는데 폐병 때문에 그만 두고 요양 생활을 하다가 결국 요양소에서 죽고 말았다. 증세가 너무도 악화되어 아편으로 고통을 줄여가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1924년 6월 3일, 빈에 있는 한 요양소였다. 엄격한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점이 그를 달팽이처럼 내면 지향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41세로 생을 마감하면서 미친 듯이 자신의 원고를 찢고 불태우려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한 사람의 작가였다는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려야지. 그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변신> <심판> <성> <아메리카> 등 주로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프로스트처럼 혁혁한 심리학자이며 조이스처럼 무의식의 영역에 깊이 파고 들어간 탐험가 라는 에드읜 뮤어의 평도 있었다. 작가들의 생애를 들추어 보면서, 그들의 적지않은 죽음이 폐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을 때, 얼굴에 닿는 비의 감촉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고 한 미국의 캐더린 맨스필드.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객사한 시인 존 키츠, 이상, 김소월, 가난하지만 멋쟁이였던 채만식. 눈을 뜨고 죽은 나운규, 결핵의 악화로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29살에 죽은 김유정. 죽음과 싸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더블린 요양소에서 죽은 존 엠 싱그. 에밀리 브론테, 조지 오웰, 두보, 카프카, 릴케, 막심 고리끼, 도스토예프스키, 안톤 체호프, 비용, 까뮤, 유진오닐, 일본의 이시가와다꾸보구, 아꾸다가와류노쓰께, 호리다쓰오, 다자이오사무 등이 모두 폐병을 앓았다. 폐병환자에게 있어 성 행위는 흔히들 자살 행위와도 같다고 말해진다. 그럼에도 이 병에 걸리면 오히려 성적 욕구가 더욱 배가 된다고 한다. 고사 직전의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매다는 것처럼 생명의 위기감이 조여올 때 더욱 안타깝게 매달리고 싶어지는 성에 대한 욕구, 보존본능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정신적인 자신의 눈높이를 향하여 고양되어 있는 정신, 이런 것 때문에 작가들은 죽어도 좋아 하는 식으로 소진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도의 체력소모와 영양실조, 무절제한 사생활로 이어지는 음주와 흡연, 불건강한 생활습관, 산고로 인한 노심초사. 그들의 육신은 매미 날개처럼 바싹 마른 껍데기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에는 이 병에 안주해 버림으로써 세상을 외면하려고 한 그들의 도피의식까지도 포함된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폐는 가슴에 슬픔이 많은 사람이 걸리는 병 이라는 말을 나는 주목하고 싶었다. 이 폐병이야말로 예술 지상주의적인 작가에게 있어 예술적 충동을 주는 아주 어울리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하기도 했다.
나른한 권태와 미열, 그리고 퇴폐와 우수를 동반한, 마치 바다에 떨어지는 저녁 노을과도 같이 핏빛으로 잦아드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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