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끝없는 표랑 - 김삿갓 / 두보
김병연 [金炳淵] 동의어 : 김삿갓, 김립 1807(순조 7)∼1863(철종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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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杜甫, Tu Fu] 712 허난 성[河南省] 궁 현[鞏縣]~ 770 후난 성[湖南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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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자의 노래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 삿갓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술을 잘 마시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왕왕 대성통곡을 한다. 평생에 과거를 보지 않았다니 괴상한 사람이다(생략). 이것은 황오라는 사람의 말이고 또 어떤 사람은 요즘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한 시인이 한 사람 있다. 허름한 옷에 떨어진 신발, 세수조차 않는다. 서울과 영동 사이를 가끔 내왕하는데 기발한 시를 짓고, 특히 과체 시는 더욱 정묘하여 사람들은 그가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면 음식을 대접하고, 잠을 재우며 어려운 운과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니, 그는 서슴없이 지어 이름을 날리고 있다. 성만 말하고 이름은 말하지 않아, 삿갓을 쓰고 있기 때문에 김삿갓이라 부른다(생략).
그의 이름은 김병연이며 호는 난고이다. 1807년(순조 7년) 3월 13일 안동 김씨 김안근의 둘째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던 소년 김병연은 어느 날 관아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의 영예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백일장에서 매도하던 김익순은 바로 자신의 조부였다. 병여의 다섯 살 나던 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가산, 박천, 곽산, 정주를 휩쓸고 선천으로 육박해 왔다. 그때 선천부사이던 김익순은 술에 만취한 채 그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순순히 항복까지 하고 말았다. 역적에게 항복하고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김익순은 이듬 해 사형이 된다. 그리고 그의 일족에게는 폐가 처분이 내려졌다. 언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운명이었다. 김익순의 종복이 병하와 병연 형제를 몰래 황해도 곡산땅에 데리고 들어가 숨어서 공부를 시켰다. 이러한 내용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조상의 일을 아들에게 모르게 하려고 멀리 강원도 영월땅으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김익순의 죄상을 낱낱이 탄핵하고 그 비겁함을 얼마나 통쾌하게 매도했던가.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불효를 스스로 단죄하면서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죄의식으로 삿갓을 눌러 쓴 채 집을 떠났다. 스물 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간 것이 전 생애로 이어지게 된다. 36년간을 행운 유수같이 떠돌았다. 정처없이 떠돌면서 후하고 박한 세상의 인심을 골고루 맛보았다. 괘씸한 사람을 만나면 해괴망측한 시를 지어서 야유와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해마다 섣달 보름 밤은 (연연납월십오야) 그대의 집, 제삿날임을 잘 알고 있노라 (군자제사내자지) 젯상에 올린 것은 칼을 잘 쓴 음식이요 (제존등물용도질) 헌관과 집사들은 모두 엎드려 아뢰네 (헌관집사개고알)
무심코 읽어보면 제사 지내는 광경에 불과한, 칠자사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의 마지막 석 자씩을 떼어보면 괴상망측한 욕설이 된다. 읽어보면 한시로서 손색없고 발음으론 욕이 되니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긴 가슴에 맺힌 울분을 이렇게라도 풀어내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들 익균이가 집으로 모셔 가려고 찾아올 적마다 그는 아들을 따돌렸다. 세 번째 전라도 익산군 여산까지 찾아왔다. 함께 길을 가다가 뒤를 보겠다면서 삿갓을 벗어놓고 수수밭으로 들어갔다. 익균은 길가에 서서 기다렸으나 그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그게 부자의 마지막 상봉인 셈이다. 병든 몸을 이끌고 강진에 도착한 것은 그가 55세 되는 해의 섣달 그름 무렵이었다. 우국지사의 소개로 안복경진사 댁에서 그해 겨울을 나고 나무에 봄이 온 것을 느끼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나는 워낙 방랑생활을 끝없이 계속하다가 언젠가는 길가에 쓰러져 죽을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오. 그러니 붙잡지 말아 주시오. 봄을 따라 북상하면서 가지산에 있는 보림사와 용천사도 구경하고 마음이 내키면 화순, 동복에 있다는 적벽강도 한번 둘러볼 생각이라오. 안진사가 써 준 편지를 들고는 길을 떠났다. 걸어보니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 보름이 걸려 가까스로 보림사에 도착하였다.
술잔을 비로 삼아, 시름을 쓸어내고 달을 낚시로 삼아, 시를 낚아오면서 보림사, 용천사 두루 구경하고 나니 내 마음 욕심없어 스님과 다름없네.
동복에 도착해서 찾아간 신석우도 물론 그를 환대해 주었다. 김삿갓은 소동파의 적벽부 를 떠올리며 적벽강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신석우도 동행을 자청하였지만 그는 혼자서 조그만 배에 올랐다. 청풍은 서래하고 수파는 불흥 이라는 적벽부의 시구를 읊조려 본다. 시원한 강바람에 상쾌함을 느끼며 배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본다. 저 멀리에 하얀 구름, 저기가 바로 선경이 아니런가. 일엽편주로 망망대해에 떠 잇고 보니 그는 이것으로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위해 남의 문전을 기웃거릴 필요도, 잠자리를 구해 헤맬 필요가 더 이상 있을 것 같지를 않았다. 마침내 그는 눈꺼풀조차 뜰 기력마저 없어졌다. 전국을 편답하며 시를 짓고 때론 대성통곡했다는 천재시인 김삿갓은 이렇게 하여 전라도땅 동복 적벽강 배안에서 혼자 귀천했다. 시인다운 죽음이었다. 향년 56세, 철종 14년(1863년) 3월 29일의 일이었다. 남다른 지혜와 문재가 있음에도 질곡된 운명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그 비색한 통한이 어떠하였으랴.
돌아가기도 머물기도 어려운 나그네여. (귀혜적역난저역난) 얼마나 길가에서 외롭게 방황했던고. (기일방황중로방)
그 형벌 같은 세월을 용케도 자살하지 않고, 형기를 잘 마친 자의 성실함같은 인고의 아픔이 느껴지는 논고평생시 의 그 끝 구절을 나는 지금도 아끼고 있다.
추운겨울 선상에서의 죽음 - 두보
두보는 당 현종 선천원년(712년) 하남성 공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 배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시는 우리 가문의 일, 시로서 으뜸이었다 고 자랑할 정도로 그이 조상인 유학자 두예와 두심언은 탁월한 시인이었다. 그는 남을 감탄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편치 못하겠다. (인불경사불휴)라고 말하면서 시의 한 자 한 구절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당나라 최전성기에서 안사의 난을 계기로 전환기를 맞는, 모순과 부조리와 전란과 기아가 들끓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서 곤궁과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아픔과 현실을 그는 가장 절실하게 시로써 대변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민중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 <자경부봉선현영양>이나 <북정>이란 시에도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귀족들의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넘치고 썩어 냄새가 날 지경인데 길에는 굶주려 얼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67행-68행). 오래 전부터 늙은 아내를 타향에 살게 했고, 또 열 식구들과도 풍설을 격하여 지냈다(81행-82행). 내 집의 문을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린 자식이 굶어서 죽었다는 것이다(85-86). 생업이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나는 묵묵히 생각해 왔고, 한편으로는 멀리 변경에 나가 있는 병졸들의 입장도 염려했다(96행-98행).
그러나 두보는 젊어서부터 과거에 낙방만 했다. 40세에 겨우 집현전대제라는 변변찮은 말직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 또한 극심한 가난과 폐병 때문에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44세에 하서현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젊어서부터 시작된 그의 여행벽은 김삿갓처럼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는 20세부터 30세까지 오, 월, 제, 조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30세에 낙양으로 돌아와 양이의 딸과 결혼하고서 잠시 안정하였다. 46세이던 그에게 좌습유라는 간관 종8품의 극히 낮은 직위가 주어졌다. 이때에도 재상인 방관을 변호하다가 곤욕만 치르게 되고 안사의 난 때는 반란군에게 잡혀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48세에 화주로 쫓겨난 두보는 그 후 10년 동안 각지로 떠돌며 심한 궁핍과 병고에 시달렸다. 학질과 폐환의 지병 이외에도 그는 중풍 때문에 오른손이 마비되었고 당뇨의 합병증으로 귀가 먹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엄부라는 사람의 추천으로 절도참모 검교공부원 외낭이 되었으나 폐병과 중풍으로 공무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사퇴하였고, 배를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 보았다. 가주, 융주, 유주, 충주를 지나 운안까지 왔다. 이곳에서 신병이 더욱 나빠졌다. 늦봄에는 기주로 향했다. 기주는 사천성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 부근에 있다. 약 2년 간을 이곳에 있으면서 추흥 8수 외에 빛나는 430수의 시를 더 지었다. 두보 전 생애의 작품 중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가 2년 동안 이곳에서 씌어졌다. 가족들과 함께 방랑의 길에 또 나선다. 두보는 호북 공안을 출발하여 악양으로 향했다. 낡아빠진 배 안에서의 추위는 실로 감당키 어려웠다. 긴 뱃길 끝에 그들은 동정호 나루에 도착하였다. 아들 종무의 부축을 받으며 두보는 악양루에 올랐다. 눈이 펄펄 쏟아지는 동정호를 바라보며 악양루에 올라 라는 명시를 이때에 탄생시킨 것이다. 늙고 병든 나에게는 단지 배 한 척밖에 의지할 곳 없다. 관문 북쪽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난간에 기대니 눈물만 쏟아지는구나. 천지는 온통 새하얀데 두보는 차가운 배 바닥으로 돌아와 다시 몸을 뉘었다. 1년 반의 세월을 이렇게 떠돌았던 것이다. 악양을 떠나 장사를 거쳐 형양에 이르렀으나 친구이던 형양자사는 이미 죽고 없으니 다시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이렇게 안주할 곳이 없어 두보는 가솔을 이끌고 형양으로 가다가 중도에서는 큰 비를 만난다. 상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배에서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거기에서 눈을 감았다. 대력 5년(770),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신당서> 두보전에 보면 뇌양에서 현령이 보낸 술과 고기를 먹고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하니, 그것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양식을 대접 받았던 것이다. 장자는 이미 죽었고, 차남이던 종무는 당시 열여덟 살 안팎이었다. 장사도 못 지낸 그의 관은 악양 산 속에 방치되었다가 그가 죽은 지 43년이 지나 손자 사업에 의해 고향 수양산 기슭으로 옮겨져 본장을 치르게 되었으니 두보가 죽은 지 43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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