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잊혀진 여자 - 까미유 끌로델 / 나혜석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몽드베르그의 문 - 까미유 끌로델
천부적 재능과 눈부시게 빛나는 외모를 겸비한 여자. 황금분할로 표현되는 몸매, 대담함, 꾸밈없는 솔직함, 오만함, 예술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정열, 흙에 대한 본능, 이 모두를 소유한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을 한때 미치도록 사랑했다. 로댕과의 사랑과 고뇌, 스캔들로 인해 그녀는 서서히 그러나 아주 쉽게 죽음의 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로댕을 잃었을 때, 사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프랑스의 동부, 빌르뇌부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파리오 이사를 와 보자르 미술학교의 조각반에 입학하여 로댕과 만나게 된다. 로댕은 최초의 이 여제자에게 사랑을 느꼈다. 24살의 나이 차이 따위는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들은 끌로빠이엥에 집을 얻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작업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치던 추운 겨울 밤, 로댕의 부인이 찾아와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 까미유의 신경은 위태로워졌고, 로댕은 일주일이 넘도록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한편 까미유는 집에서도 쫓겨났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어머니한테도 쫓겨난 까미유. 두 번째 충격은 로댕의 아이를 유산한 일이다. 로댕은 차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인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스물여덟 살의 한창 나이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까미유는 한때 끌로드 드뷔시와도 어울렸다. 로댕의 아이를 잃고 난 까미유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매일 밤, 환락가를 찾아 파리 시내를 전전했다. 스스로 파멸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한밤중 까미유는 자신의 작품, 끌로또 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란을 피웠다. 이웃에서는 미친여자 취급을 해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작품 제작을 꾸준히 하였다. 수다스런 여인들 화가 잔느의 초상 등은 그녀의 명성을 빛내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자료 구입과 생계에 한없는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1905년 11월 14일, 모델을 서려고 찾아온 아슬렝은 공포에 질려있는 까미유를 발견하게 된다. 간밤에 두 사람이 나의 집 덧문을 부수려고 했어요. 난 그들의 얼굴을 보았어요, 그들은 로댕의 이탈리아인 모델들이예요. 그는 그들에게 나를 죽이라고 지시했어요. 내가 그에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죠. 그는 나를 없애 버리려 해요.
그리고 까미유는 기절해 버렸다. 까미유의 정신착란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가족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 내가 항의하지 못하도록 종신형을 언도하다니! 이 모든 게 악마 같은 로댕의 머리에서 나온 거야. 그는 한 가지 생각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내가 예술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쳐 자기보다 더 위대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거지.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나는 불행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는 완전히 성공했어. 내가 불행해졌으니까. 나는 이 노예생활이 지겨워.
정신병원에서 까미유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까미유는 병원에서도 로댕과 그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독살하지 않을까 하는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심지어 병원 음식까지 거부한 그녀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계란과 감자만을 특히 많이 먹었다. 거기에는 쉽게 독을 넣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병명은 추적망상 . 항간에서는 로댕이 까미유의 주제를 훔쳤다 는 평가와 함께 무수한 소문이 나돌았다.
1913년 3월 10일, 밖에는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채찍 및에서 울고 있었다. 철책 그리고 마차의 요동,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그녀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철컥 문밖으로 자물쇠가 채워졌다. 49세에 들어간 것이 79세에 죽어서야 그 문을 빠져 나올 수 있었으니, 한번 들어간 것이 30년, 로댕과 만나 공동작업을 하던 지옥의 문 또한 왠지 우연한 것이 아닐거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문. 그 안팎의 금은 누가 그었던 것일까. 썰렁한 병실에서 그녀가 임종하던 1943년 10월 19일. 까미유는 물론 철저히 혼자였다. 마침 1933년 10월은 까미유의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것을 기념하는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전 이 서울에서 있었다. 도록에서만 보던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과연 두 사람의 작품은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리 같은 수원지에서 퍼올린 물이라곤 하지만 오른손을 어깨에 대고 있는 까미유의 밀단을 진 소녀와 로댕의 작품 가라테아 는 소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똑같았다. 그 외에도 로댕의 영원한 우상 과 까미유의 소외된 사람 ,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과 까미유의 생각하는 남자 등은 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지나치게 유사한 구석이 많았다. 까미유 끌로델이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댕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던 끌로델 작품의 재평가와 함께 그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는 가슴 두근거림이 일어났다. 로댕의 제자로서, 조수로서, 작품의 모델로서, 연인으로 지냈던 까미유 말고, 조각가 까미유에 대한 진정한 재평가가 다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사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로댕 밖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애증이 빚어낸 무서운 파국이었다.
나혜석 부러진 날개
펄 펄 날던 저 제비. 참혹한 사람의 손에 두 죽지, 두 날개 모두 상하였네.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이다 끝끝내 못 이기고 그만 축 늘어졌네. (하략)
그의 자작시처럼 나혜석은 제비가 비상하듯 창공을 마음껏 날아 올랐던 때가 있었다. 총명과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권문세가의 맏딸로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기도 했다.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날 만큼 집안은 유복하였다. 나혜석은 일본에서 그림 재주가 출중한 연하의 미소년, 최승구를 사랑하였는데 그가 요절하자 비통과 허무에 싸여있었다. 스물 두 살 때의 일이다.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김마리아, 박인덕과 어울려 독립운동에 가담, 3 1운동 시위 때 체포되었으나 젊은 변호사 김우영의 자진 변론으로 구출된다. 본인의 말대로 김우영은 생명의 은인 이기도 했다. 10년 연상이고 전실의 애들도 있었으나 두 사람은 곧 결합하여 안정된 가정을 꾸렸다. 나혜석은 창작에 몰두하여, 결혼 일 년만에 개인전을 갖게 된다. 1921년 당시 서양화 개인전은 처음이었던 만큼 대성황을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남편의 재정적 뒷받침이 컸다. 풍경화 70점은 모두 매진되었다. 선전 1회에서 6회까지, 9회에서 11회까지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거듭하였으며 27년 6회때는 봄의 오후 가 무감사 입선, 2회 때는 관전평을 신문에 쓰기도 했다. 문필로 이름을 얻기도 했으며 이당 김은호 등과 어울려 <고려 미술회>에서 중진 멤버로 활약을 하였다. 조선인으로 최초의 외교관이 된 남편을 따라 나혜석은 만주로 가게된다. 넓은 견문과 이국적 풍경은 모두 그의 그림에 보탬이 되었다. 나혜석은 만주에 거류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호하고 협조하는 데도 빠지지 않았다. 안동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 투사들을 돕고 무기를 반입하는데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의 특권을 이용하여 거들어주다가 남편의 관직이 위태로울뻔 한 적도 있었다. 무사히 귀국하였으며 그녀의 꿈이라던 구라파 여행이 이루어졌다. 파리여행은 사실상 그들 부부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혜석은 거기서 자유연애의 개방된 생활 풍속을 목도하게 된다. 더구나 그녀는 활달하고 대범한 성품인지라 남편의 질투도 개의치 않고 잠시 나그네끼리의 연정을 엮기도 했다. 상대방은 최린이었다. 남편은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기쁜 여행의 끝은 싸늘한 가정불화로 바뀌어 귀국하자마자 김우영은 이혼을 선언했다. 어린 4남매를 집에 남겨놓고 나혜석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집을 나와야만 되었다. 신문은 나혜석의 간통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최고의 세도가 최린,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일류지식인 김우영. 신문은 특종기사에 피치를 올렸다. 천도교 교령이며 중추원 참의이던 최린은 동아일보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신문을 압수하는 권력을 행사하였고 김우영은 씁쓸한 고배를 마시고 낙향해버렸다. 남편과의 이혼, 최린의 배신. 나혜석은 최린과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으나 상처만 받고 소득은 없었다. 스캔들과 이혼의 파문은 그녀의 인기를 급속히 저하시켜버렸다. 사회는 그를 냉대하고 친지들조차도 냉담하게 굴었다. 사면초가의 고립감 속에서 고군분투하였으나 사회의 비정을 감당해내기는 어려웠다. 왕성한 의욕과 재기는 꺾이고, 경제적 궁핍은 날이 갈수록 목을 조여왔다. 생계가 막막했다. 그의 <자작시>처럼 다시 살아나려고 발버둥치고 허덕여 보았으나 끝끝내 못 이기고 그만 축 늘어지고 만 셈 이었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밝혔다. 전당포 출입을 하게 되고, 그 건강은 쾌활 씩씩하던 것이 거의 마비까지 이르렀고, 그 정신은 총명하고 천재라던 것이 천치바보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때는 중이 되려고 수덕사 길일엽 스님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만년에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나타났고 사지가 뒤틀리며 경련이 일어났다. 절과 무료 요양원을 전전하면서 비참한 13년을 이어 나갔다. 흡사 산송장처럼 넋을 놓고 다녔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눈 내리는 길가에서 최북이 그랬던 것처럼 12월 한파에 얼어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당시 관보에 실린 사망자 광고를 보면 본적, 주소 미상인 바, 시립 자제원에서 병사한 것으로 취보자인 용산구청장이 밝혀놓고 있었다. 유언도 알 수 없고 기일도 물론 알 수 없고, 무덤까지도 없다고 한다. 그때의 나이는 54세였다. 죽음은 자신의 행업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까미유 끌로델과 나혜석.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그리고도 정열적이며 담대한 성격, 오만함. 그럼에도 남자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사회의 조소, 냉대 그 스캔들 때문에 그들의 아까운 재능과 운명은 잠식되어 들어갔다. 연상의 남자와 행복한 20대를 보내고, 똑같이 불우한 40대를 보내다가 1940년대를 맞이하여 둘은 죽고 말았다. 환호의 갈채는 여름날의 무지개보다 짧고, 아름다운 이 여류 화가들은 망각의 늪에 빠진 채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져 갔던 것이다.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것은 잊혀진 여자 라던 마리 로랑상의 시구가 하필 이 대목에서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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