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5척 단구의 거인 - 등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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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센티미터의 단구로 지구상에서 제일 큰 땅 덩어리를 가진 중국을 지배하며 12억 중국인의 식량문제를 해결한 사람 등소평, 그는 97년 2월 19일 영면에 들었다. 등소평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작은 마을 패방촌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일찍 어머니을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법정학교를 나온 청말의 인텔리였다. 등소평은 16세에 파리로 유학하여 23세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귀국한다. 당 중앙비서장,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 52세 때는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와 함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 1978년 모택동이 지목한 후계자 화국봉을 제치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까지에는 세 번의 커다란 정치적 좌절을 겪는다. 첫 번째는 모택동의 노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을 당하고 두 번째로 66년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낙인이 찍혀 실각된다. 이때 홍위병이 그의 큰아들 박방을 북경대학 건물에서 창 밖으로 내던지는 바람에 하반신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었다. 세 번째는 모택동 사망 뒤 그의 부인 강청 등 4인방에 밀려 모든 직위가 박탈되는 일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일어났다 하여 오뚝이 란 별명이 붙여졌다. 1978년 권력을 잡은 뒤, 개혁과 개방으로 사회주의 실험에 성공을 거두자 개혁의 설계사 로 불리워진다. 그의 좌우명 처변불경(어떤 변화에도 경솔하지 않게) 을 실천에 옮겨 전투에 공을 세웠어도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몇 번씩이나 실각을 당했어도 조용히 때를 기다려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 또한 그는 모주석은 말년에 문화혁명이라는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그의 생애의 대부분은 옳은 것이다. 모주석이 말년에 저지른 잘못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공산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남긴 수많은 업적들을 인정해야 한다 라며 남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기도 했다. 89년 천안문 광장 시위때 유혈강경 진압으로 국민들에게 인기를 잃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이름 소평 과 같은 발음인 소병 으로 낚시대에 매달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1990년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7년을 더 살면서 이미 깊어진 파킨슨씨병과 호흡, 순환기능의 쇠퇴로 병마에 시달리다가 향년 93세인 1997년 2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장례는 간단하게, 유해 고별의식은 거행하지 말 것, 집에 반소를 설치하지 말며 각막을 기증하고 유체를 해부해 의학연구에 제공할 것, 그리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줄 것등을 가족에게 당부하였다. 장례위원회는 소평 동지가 마지막 당부한 바대로 가장 소박하고 가장 장엄한 방식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려 한다고 발표했다. 1997년 2월 24일 밤, 나는 텔레비젼에서 북경의 혁명묘지로 운구되고 있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도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소평 이 아닌 대평 의 마음으로 영면한 등소평 한편 부질없는 불로초만을 갈구하던 진시황의 용마갱이 그 위에 겹쳐졌다. 사람이 다르면 죽음도 이렇게 다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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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2-12 0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