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얄타의 세 주역 - 루즈벨트/처칠/스탈린
|
알바레스병과 루즈벨트 1945년 4월 세계 제2차대전이 거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 루즈벨트의 죽음이 공식 발표되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는 러시아의 얄타회담에서 돌아온 지 60여 일도 채 되지 않아서 죽었다. 루즈벨트의 알바레스병은 거의 말기증상에 이르고 있었다. 주치의 머킨타이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심한 환자로 하여금 얄타에의 무서운 여행을 계획하게 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1945년 2월 11일 일요일 12시 50분. 처칠, 루즈벨트와 스탈린. 세 사람은 최종회의를 마무리하고 나서 점심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사 후 각자 준비해 온 선물을 교환하고 난 뒤, 소련군의 영웅들에게 미군 훈장이 몇 개 증정되었다. 이로써 얄타회담은 끝나고 스탈린은 철도편으로 크리미아를 향해 떠났다. 처칠은 8일 동안의 회의기간 중 루즈벨트를 지켜보면서 실망스러웠다. 루즈벨트는 자신이 스탈린에게 주거나 맡긴 것들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처칠은 말했다. 루즈벨트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들어앉은 것은 1933년 3월 4일이다. 수백만의 실업자들로 미국은 최대의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였다. 우리들은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안될 유일한 것은 두려워한다는 그 자체이다. 라고 그는 역설하며 특별회의 소집하였고 뉴딜의 입법을 서둘렀다. 루즈벨트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 대전을 수행해 달라고 미국 국민들은 그를 네 번이나 연이어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39세에 바이러스가 척추를 침범해와 평생을 소아마비로 지내게 되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세계를 다니며 12년이 넘도록 백악관의 생활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얄타회담이 열리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의 필적은 엉망이었다. 이 중대한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대통령은 은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처칠과 스탈린은 루즈벨트의 병으로 인한 허점을 이용했던 것이 아닐까? 에리아스바그 박사는 신경질환 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에게 찾아온 알바레스병이란 혈과 발작인데 뇌의 소동맥류가 터지면 그곳에 괴사가 일어나고 운동기능이 마비되며 무감각과 언어장애, 심한 피로감,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된다. 성미는 까다로워지고 현기증과 착오, 정신이 몽롱해지는 특징들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머나먼 러시아 땅 얄타로부터 돌아온 루즈벨트는 미국 동해안의 조지아주 윔 스프링에서 정양을 하고 있었다. 4월 12일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사촌 누이 삭크레가 급히 달려갔다. 그는 괴로운 듯 머리가 몹시 아프다 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나이는 63세, 정확한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이라고 공식 발표되었다.
처칠 우연의 일치인지 1945년 얄타회담에 참가했던 세 거두는 모두 알바레스병으로 죽었다. 윈스턴 처칠은 얄타회담이 있기 4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휴가를 즐기며 바다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거기서 최초의 뇌졸중 겪었다. 혈전이 혈관을 막았으나 처치가 빨라 최소한으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1941년 심장발작, 그리고 고혈압, 동맥경화인 것이 분명해졌다. 그 후 두 번째의 뇌졸중은 1952년에 일어났다. 처칠은 업무를 포기하고 6월 26일 자취를 감췄다. 머리는 멍해지고 혀는 꼬부라져 발음이 분명치 못했으며, 그는 날짜며 세기를 혼동했다. 기억력도 감퇴되어 그의 주치의 모런 경은 사직을 권고했다. 1945년 4월 뉴욕타임즈 는 하원에 모습을 나타낸 처칠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윈스턴 경은 몹시도 지쳐 버린 듯 자신이 없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미 1940년의 위대한 형해일 뿐이었다. 답변을 할 때 윈스턴 경은 앞뒤가 뒤틀린 말을 하고 있었다. 1955년 4월 6일, 80세가 넘은 윈스턴 처칠은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956년 10월 발작을 일으켜 언어기능과 기억을 상실했으나 곧 회복했다. 그러나 59년 10월 다섯 번째로 일어난 발작은 아주 가혹했다. 그로부터 6년 동안 처칠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야에서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불가지론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내세를 절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다만 사후의 세계를 일종의 어둠 같은 것, 차갑고 미끄러운 무한한 어둠같은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을 직접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영면에 들고 말았다. 때는 1965년, 91세였다.
스탈린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1953년 2월 28일 밤, 그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뇌 좌반구의 동맥이 끊어져서 왼쪽 전체에 출혈된 피가 넘쳐 있었다. 오른쪽 반신이 완전 마비되고 언어기능은 상실되었다. 곁에서 스베트라나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가 눈썹만 한번 움직여도 온 나라를 떨게 했던 그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1953년 3월 5일 21시 50분이었다. 누군가가 아버지를 죽였다. 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 고 술에 취한 아들 바실리가 옆방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쇠와 같은 사내 라는 뜻의 스탈린 은 1929년 수령의 지위에 올라 74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가지 24년 동안 스탈린주의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는 피의 숙청 과 공포정치를 감행해왔다. 그는 자기의 권력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충복도 이용한 다음 곧바로 제거해야 마음이 놓았으며, 심지어 죽음의 사자가 곁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도 사후 자기의 이미지에 흠집을 낼 우려가 있는 인물들은 가차없이 제거했다. 통치기간 동안 그는 2천 2백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막상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가 차가운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때, 측근들이 보인 것은 거짓 눈물과 보이지 않는 권력쟁탈전 뿐이었다고 전한다. 권력 무상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