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36년간 유랑하던 파가니니의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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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으로부터 가능한 온갖 비밀을 이끌어 내어 신의 하모니를 연주한다. 는 유례없는 천재 니콜로 파가니니. 그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프랑스 니스였다. 사후에 그의 유체가 안식을 얻지 못하고 36년간을 떠돌다가 겨우 조국에 돌아와서 파르마 공동묘지에 묻히기까지의 기구한 사연은 소설 한권의 분량이 되고도 남으리라 생전에 그를 따라다니던 고약한 평판. 난봉꾼, 수전노, 도박꾼, 그리고 심지어 살인자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니스에서 매장의 허가를 얻어내지 못해 파가니니의 친구들은 그의 고향 제노아로 옮겨오고자 했으나 이것마저 거절당한다. 교회의 승인 없이는 왕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제노아 교회는 파가니니가 사악한 생애를 보냈으며 자신이 기독교도라는 것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으므로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니스의 주교가 성화된 땅에 그를 묻을 수 없다. 고 선고했다. 파가니니는 부활절 성사와 임종의 고백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유산을 교회에 조금도 자선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나쁜 평판까지 무성하여 매장의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아킬레스가 아버지의 시체를 방부처리하여 두 달 동안이나 죽음의 침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런 다음 그 집의 지하실로 옮겨 1년 이상을 그곳에 두었다. 아들은 주교의 판결을 번복시키려고 교회재판소에 탄원을 해보았으나 무효, 고향으로 시체를 옮겨가고자 했으나 그 또한 거절당한다. 파가니니의 유해는 갈 곳이 없었다. 로마교황에게 호소하러 간 사이, 프랑시 니스의 보건당국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어느 해안에 있는 음습한 문둥이의 집으로 우선 그를 옮겨갔다. 그러나 괴기스런 이상한 소문이 나돌아 이번에도 옮겨야만 했다. 올리브 기름공장의 시멘트 통속에 넣어 뒀다가 한밤중 캡페라는 포구 위에 있는 어떤 개인집의 정원으로 옮겨갔다. 1844년 4월 죽은 지 거의 4년이 되는 해, 파가니니의 시체는 세 개를 겹친 관 속에 넣어져 고향인 제노아 라마로네의 어느 저택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년 후, 파가니니의 후원자였던 오스트리아의 통치자 마리루이제 대공비로부터의 허락이 떨어지니 파가니니의 유해는 드디어 자신의 별장 정원 속에 묻히게 된다. 집에는 돌아왔으나 그의 유해는 과연 어떤 상태였을까? 1876년 드디어 니스 주교의 간악한 판결이 무효화되니 그제야 파가니니의 시신은 파르마 공동묘지에 와서 제대로 묻히게 되었다. 죽은 지 꼭 36년 뒤의 일이었다. 파란만장했던 전설적인 생애를 살다간 파가니니의 모습을 하이네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인상엔 고뇌와 천재와 지옥의 징조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일부러 자신의 태도를 신비적으로 만들어 청중의 흥미를 끌려고 하였는데 실지의 풍채도 그러했다. 장발장신으로 몸이 가늘고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혹은 바이올린의 귀신 이라 불렀다. 그러나 대음악가들의 질병을 연구한 독일의 케르너 박사는 파가니니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네살도 되기 전에 홍역을 앓았다. 홍역 중 파가니니는 강직경련 의 증상이 나타나 이틀 동안 송장처럼 빳빳하게 누워 있었는데, 이때 그의 모친은 이미 시체를 쌀 수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홍역 병원체에 의한 만기성 뇌염 이 유발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거장이 지닌 여러가지 특이성, 즉 그의 비사회적 태도, 자극 과잉, 언어동작의 경직성, 성적 탈선, 비뚤어진 성격, 그리고 그 외 그의 사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상성 같은 것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기술이란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결국 정신적,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돌릴 수 밖에 없는 전무후무의 저 완벽한 예술적 명기도 필경은 이 병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보다도 그는 많는 병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33세에 조로현상을 보였으며 폐결핵, 매독, 류머티즘, 후두염, 신경장애 등에 시달리면서 죽은 순간까지 삶에 집착했다. 그는 결코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프라하에서 연주를 하는 동안에는 매독 3기 증상으로 보이는 하악골 농양으로 인해 아랫니를 몽땅 뽑아야 하는 곤욕도 치뤄냈다. 그는 만성 인후염으로 인해 만년의 2년 반 동안은 실제로 무성에 가까운 상태로 지냈다. 임종의 고해를 거부한 것도 실은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사의 처방과 그 많은 약을 매달리는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은 이제 말을 할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손은 떨리고 다리는 부어서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절망해서 소리쳤다. 위대한 신이시여, 내겐 더 이상 힘이 없나이다. 그리고 나의 몸은 문자 그대로 조각조각 분해되어가고 있다. 이제 나에겐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다. 고 그는 말하였다. 계속되는 출혈 속에서 그의 육신은 서서히 꺼져갔던 것이다. 1840년 5월 27일,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아들 아킬레스의 손을 꼭 잡은 채 58세의 나이로 파가니니은 영욕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의 이름 파가니니는 작은 이교도 라는 뜻인데 그는 과연 이름 그대로 한 세상을 이교도로서 살다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의 신에 대해 일고를 해보게 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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