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혼자만 살아남은 광해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조선조 제15대 왕으로, 15년 1개월이나 지존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 그가 왕비와 세자, 세자빈 등 가족이 모두 자결한 뒤에 혼자만 살아남아서 18년 동안 섬에 갇혀 자연사할 때까지 목숨을 연명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맞아 북쪽으로 파천하는 몸이 되었다. 조정을 나누어 만약의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하므로 임금은 후사를 서둘러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는 40년을 재위에 있으면서 8명의 부인에게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은 14명인데 적출이 없어 나이 마흔이 되도록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선조가 총애하던 신성군은 피난 중 병사하고 광해의 동복 형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므로 장자임에도 세자책봉에서 제외되었다. 1594년 광해를 세자로 결정하고 명나라에 세자책봉을 주청했지만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당한다. 임해군은 왕위를 도적맞았다 고 떠들면서 돌아다녔다. 이것을 대북파는 묵과하지 않았다. 그 후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어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 는 선조의 명을 받은 유영경 등 몇몇의 소북파 신하들은 영창군의 지지파가 된다. 바로 이 소북파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1608년 선조가 사경에 이르러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다. 이때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 버렸다. 이 일이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에게 발각되었고,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 계승권은 인목대비에게로 넘어갔다. 영창은 그때 세살이었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킬 것과 수렴청정을 권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우여곡절과 14년의 긴 여정끝에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드디어 제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난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타버린 궁궐을 중건 개수하며,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했다.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도 다시 간행 편찬하였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했다. 명나라가 후금과 싸워 패하자 광해는 강홍립을 시켜 적당히 싸우는 체 하다가 후금에 투항하게 했다.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고 그곳에 억류된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조정에 보고토록 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협력하는 체 하면서 안으로는 후금과의 우의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관계를 회복하여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이러한 치적으로 보아 광해군은 분명 암군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실상은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재위한 15년 동안, 대북파들은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참으로 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결국 이귀, 김자점 등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니 성공을 거두게 된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영창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인륜을 저버렸다는 등의 이유였다. 중종반정을 불러온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반해 광해군은 왕권 도전세력에 칼을 썼으나, 백성을 학대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민생경제를 일으키는데 전력을 쏟은 임금이었다. 인조반정이 순수한 구국의지에서였다기 보다는 사대주의자들과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자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보는 견해에 필자도 공감이 간다. 그러나 붕당에만 치우쳐 명분론만 앞세우던 그들 인조반정 세력은 시대적 대세의 흐름은 읽지 못하고 있었으니 명은 이미 기울어진 나라였고, 청(후금)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명나라를 섬기던 인조는 정묘와 병자, 두 번의 호란을 면할 수 없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무릎을 꿇고 청나라와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야 하는 쓰라림도 겪는다.
인조가 등극한 뒤 49세로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 동문쪽에 부인 유씨와 함께 위리 안치된다.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쪽에 안치시켰다. 그 후 두 달쯤 지나 세자 내외는 자살을 하고 만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의 세자는 담 밑에 구멍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세자가 잡히는 것을 보다가 그만 땅에 떨어졌고, 그 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더니 욕된 삶을 길게 끌고 갈 것이 없느니라 하고 결국은 목매달아 죽었다. 폐세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해 늦가을 폐비 유씨마져 병사하고 만다. 자주 격정에 휩싸이며 미칠 것 같다 고 말하던 폐비. 그는 친정오라버니들(유희분, 유희발)이 참살당한 일과 목에 밧줄이 걸려있는 아들, 며느리의 환영으로 몹시 괴로워하였다. 홧병을 얻은 폐비는 괴성을 지르며 가시덩굴 속에서 숨져갔다. 48세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그 해에 세 식구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광해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외의 정세에 따라 태안으로 또 강화도, 교동으로 몇 번 이배되었다가 인조 15년 멀리 제주로 옮겨져 거기서 67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 처음 섬에 올 적에 배의 사면을 휘장으로 가리고 목적지를 비밀로 하였으므로 어딘지 모르다가 땅을 딛고 내리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낭패해 하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차 단념하며 묵묵히 지내게 되었다. 따라간 계집종이 패악하게 말을 함부로 하고 윽박질러도,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윗방을 차지하고 아랫방을 거처하게 하여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잠자코 견디었다. 채근담에 소 라 하거나 말 이라고 하거나 고개만 끄덕인다(지시점두)는 말이 있다. 뭐라고 하면 어떤가? 이미 그런 심경이 아니었을까? 온몸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 소리에 귀먹은 그의 내면은 이미 풍화될대로 풍화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가 지은 시, 한 편이 여기에 있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 성머리 지나니 (풍취비우과성두) 장기 훈음속에 높은 다락이어라. (장기훈음백척누) 창해의 성낸 파도 어둑어둑해 오는데 (창해노도래박막) 푸른 산에 근심한 빛 청추에 어렸더라. (벽산수색대청추) 마음이 가고파 왕손초도 보기 싫어 (귀심염견왕손초) 나그네 꿈 가끔 제자주에 놀래네. (객몽빈경제자주) 나라의 존망조차 소식 끊어지고 (고국존망소식단) 연파낀 강상 외로운 배에 누워 있노라. (연파강상와고주)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여늬 때와 같이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닷소리를 듣고 있었다. 영욕의 67년을 이끌어온 몸이 그만 눕고 싶어진다. 옆으로 눕자 물살이 떠밀려와 자신을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좋다 고 생각하자 무거워진 눈꺼풀을 다시 뜰 수 없었다. 그날은 화담선생이 떠나시던 날처럼 견우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이었다. 그는 어머니 무덤의 발치 아래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공빈 김씨의 묘 아래에 있다. 제법 많은 나이이건만, 어머니의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의 시 한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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