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생사의 이치를 탐구한 사람들 - 서화담 / 소강절
생사는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 서화담
서경덕은 조선조 성종 20년 송도의 화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성의 동문 밖 화담 위에 서사정이란 초막을 짓고 단좌묵상하면서 오직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니 사람들이 그를 화담 선생이라 불렀다. 어머니 한씨는 공자의 묘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타고난 총명으로 어릴 때부터 그는 탐구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그가 어릴 때 나물을 뜯으러 가서 매일 빈바구니로 늦게 돌아오자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나물을 뜯다가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제는 두 치쯤 날아올랐고 오늘은 세 치쯤 날아오랐습니다. 새의 나는 모양을 보고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하늘 천 자를 벽에 붙여놓고 문을 잠그고 한없이 글자를 바라보며 그 이치를 생각하였다. 14세때 향촌 서당에서 기삼백 편을 수학하다가 막혀 버리자 집에 돌아와 보름 동안을 밤낮으로 궁리한 끝에 스스로 해득하였다고 한다.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앎을 얻게 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구명함에 있다) 장에 이르자 기쁨의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운 것은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 사람이 되어서 우주의 진리, 그를 깨닫지 못하고서야 어찌 사람이며 선비가 되어서 그를 격구치 못하고야 글을 읽어 무엇하랴? 분발하면서 며칠씩 잠을 자지 않기로 하고 조금 눈을 붙이면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문지방을 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 졌으며 나이 40에 벌써 60노인처럼 보였다. 당년에 그를 만나보았으면 10년 동안 읽은 글보다 나을 것을! 퇴계는 그를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서화담은 자질이 상지에 가까워서 시골에서 일어나 스스로 공부할 줄 알았고 소옹(소강절)의 역학에 더욱 깊어서 황극경세의 수를 산출한 것이 하나도 틀림이 없으니 기특하도다. 복희의 역학방법을 아는 이는 아조의 이 한사람뿐이었다. 상촌 신흠이 그의 문집에서 이렇게 그를 평가해 놓았다. 화담은 공자가 주공을 사무치게 그리듯, 소강절을 몹시도 사모하였다. 화담은 <귀신생사론>에서 생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이천은 사와 생, 사람(생)과 귀신(사)은 하나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 했으니 이것으로써 다 말한 것이다. 나도 사와 생, 인과 귀란 다만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 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어 흩어짐은 형체만 흩어질 뿐이요, 담일 청허한 기운의 뭉침은 끝까지 흩어지지 아니 하느니 흩어진다 해도 태허담일한 안에 있어 그와 동일한 기이다. (생략) 눈앞에 사라져 버림을 보지만 그 나머지 기운이야 마침내 흩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다 없어진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화담은 생사를 촛불에 비유하여 촛불이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기는 우주 안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보이지 않는 우주 속에 그대로 있다고 하였다. 화담이 떠나던 날은 늦더위가 한창인 7월이었다. 화담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화담 못가로 옮겨 달라고 하여, 그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돌아온 후 임종에 이르렀다. 명종 원년. 세수는 58세였다. 그날은 마침 천계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 날이었다.
소강절
소강절은 중국 송대의 유학자로 이름은 옹, 자는 요부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이정지에게 도가의 도서선천성수의 학을 배워 신비적인 수이학설을 세우고 이에 의해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설파하였다. 소강절은 <황극경세서>에서 우주의 생성과정을 숫자로 파악해 놓았다. 이에 화담은 소옹의 도서나 상수에 관한 이론들을 해설하였고, 이러한 화담의 기수학은 토정에게로 이어졌다. 살펴보면 소강절과 서화담, 이 두 사람의 생애는 물론, 죽을 때의 모습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다, 도학자답게 안심입명의 태도를 취하면서 마지막 한 말까지도 그들은 비슷하였다. 집안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그들의 선대는 비록 덕망은 높았으나 모두 벼슬없이 가난한 살림을 살았으므로 둘은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다. 비바람이나 겨우 가리는 초당에서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면서도 두 사람 모두 진리 탐구에 몰두했으며, 세상의 명리나 벼슬따위에는 둘 다 초연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리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들은 여행을 하였는데 소강절은 황하 유역, 한수 유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둘러보았고, 화담은 속리산, 지리산, 금강산 등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특히 그들의 학문은 궁리를 통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자득해 들어가는 공부의 방법까지도 서로 비슷하였던 것이다. 우주의 원리를 궁리하는 것에 그들은 다같이 일생을 바쳤다. 향년 66세, 소강절은 죽음에 임하여 삶과 죽음이란 모두 보통있는 일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임종을 앞둔 화담 또한 제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니 심경은 평안하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