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4장 죽음 또한 자연 아닌가
특이한 유언 - 황진이 / 조조 부자
길가에 시체를 버려주오 - 황진이
재색을 겸비한 명기 황진이는 한창 무르익은 나이 사십을 전후해서 죽었다.
송악산 옛 터전의 번화했던 그 시절 어쩌다 이 봄이 가을인양 쓸쓸한가.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의 도리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한 때는 서화담의 문화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만년에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그 시체를 동문 밖 길가에 버려서 개미와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의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해달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유언대로 하지 않고 그녀를 황해도 장단 근교에 고이 묻었다.
조조, 그에게도 죽음이 난세의 영웅 조조 앞에도 죽음은 찾아왔다. 건안 25년(220년), 일세를 풍미하던 지략가 조조도 6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천하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만큼 굳이 옛날 법도에 따라 거창한 장례를 지낼 필요는 없다. 장례가 끝나거든 곧 상복을 벗고록 하며, 주둔지에 있는 장병들은 부서를 떠나지 말라. 또한 관리들도 평소대로 근무에 힘써라. 나의 시체에는 평복을 입혀야 하며 절대로 왕후 귀족의 옷을 입혀서는 안된다. 또한 관 속에 금은보화나 진귀한 물건을 넣어서도 안된다. (위지 무제기) 실제 조조는 왕후 귀족의 분묘를 파헤쳐 그 속에 있던 보화를 꺼낸 사람이다. 꺼낸 물건으로 무기를 제작했다고 한다. 왕릉을 치장한 진시황과는 정반대로 현실감각이 뛰어난 위정자였다. 이런 유언장 덕분에 갑작스런 죽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혼란없이 황태자인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여 정치의 공백을 메울 수가 있었다. 조조는 임종에 즈음하여 평소에 소장하고 있던 명기와 재화를 시녀와 애첩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이 죽은 후 각각 고향에 돌아가 삯바느질이라도 하면서 여생을 조용히 살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최후의 모습이 퍽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조조의 아들 조비 역시 현실주의자였다. 그도 유조에서 죽으면 뼈에 통양의 지각은 없다. 그러니 볼모의 땅(경작할 수 없는 땅)에 묘를 쓰고, 금은 등을 넣어서는 안된다. 모두 기왓장으로 만들라 고 지시했던 것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만하다. |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2-12 0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