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예술가와 정신병 - 광기, 과연 예술의 근원인가 - 모파상 / 슈만 / 휠덜린 / 뭉크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 넣었는가?
예술은 그들 생의 전부이며, 생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가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영혼에 불을 지피고 자신의 감성에서 뽑아낼 수 있는 한 선율을 뽑아내고는, 애처롭게 지상에 엎어지고 마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그들은 잠든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때로는 깊게 내재된 자신의 영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악마와도 기꺼이 손을 잡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 매독과 정신착란은 순서대로 오면서 치뤄내지 않으면 안되는 대가였던 것이다. 로트렉가 에드가 알란 포우, 보드레르는 전형적인 이 코스를 전부 밟았다. 이 세상에서 어떤 병을 알코올 중독과 비교할 수 있으리. 에드가 알란 포우의 말이다. 무소르크스기, 로트렉, 유티릴로도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졌다. 모파상, 니체, 스메타나는 매독으로 인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며 정신병원으로 가야 했고, 니체는 그로 인해 실명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스메타나는 나의 조국 을 완성한 뒤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나부 마야 를 그린 스페인 화가 고야도 매독으로 청각을 잃었다. 화가가 눈을 잃고 시인이 말을 잃고 음악가가 귀가 멀다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끝없는 자살 시도 - 모파상 모파상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안, 미로메닐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들은 노르망디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게 많았다. 인간의 애욕을 주로 다룬 그의 작품은 심리묘사가 뛰어나다는 게 정평인데 그 역시 절륜의 정력가로 상당한 여성편력자였다. 한 여자와는 한번 만을 고수한 그는 독신이었다. 팔난봉꾼이었던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 받았는지 어려서부터 놀기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탓으로 13세 때 신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의 문학 수업은 어머니 로올이 플로베르와 친분이 있어 연결된 플로베르의 엄격한 가르침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플로베르에게서 배운 냉엄한 객관적인 태도와 세밀한 관찰로, 온갖 계층의 소시민들을 그려 나갔다. 딱딱한 사상을 세우거나,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실성을 지켜나갔다. 단편 <떼리에 관> <달빛> 장편으로는 <여자의 일생> <베라미> <죽음처럼 강하게>등이 있다. 모파상은 1883년에 쇼펜하우어의 학설에 끌려 살아가는 두려움을 호소하고 심한 정신적 고독에 사로잡혔다. 특히 35세 때부터 신경장애를 나타내는 한편, 편두통, 현기증에 시달려 눈동자가 퍼지기도 하였다. 그는 코카인, 몰핀, 대마초 등 마약을 닥치는 대로 복용하였다. 40세부터는 증상이 심해져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이 안 오자 집 주인에게 빵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잠이 안 온다고 일을 못하도록 말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 빵 공장은 몇 십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집안에 개가 요란하게 짖자 자기 원고 소리가 시끄러워 개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부드러운 종이를 일부러 구해서 펜 소리가 안 나게 글을 써 나갔다. 어떤 때는 거미가 습격한다고 여름철인데도 창문을 꼭 닫았으며 자기 몸속에 보석이 들어있다 하여 화장실 출입을 며칠 동안이나 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러한 신경 계통의 비정상적 증상은 난잡한 여성관계로 인한 성병에서 기인한다는 기록이 있다. 1893년, 모파상은 니스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하인이 총알을 빼두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면도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긋고는 거울 앞에서 무표정하게 웃어보였다. 하인이 달려오고 의사가 붕대를 감아 목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였다. 혹시 그가 좋아하는 요트를 보면 좀 나을까 해서 의사는 바다로 내려가게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바다와 요트 밸아미호 를 보고도 입술만 움직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1893년, 43세의 나이로 영면할 때까지그의 정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맞은 임종 - 슈만 독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곡에 전념하여 낭만적인 곡을 많이 발표했다. 슈만은 다섯 남매 중의 막내인데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던 해에 신경질환을 앓게 되어 평생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53세에 사망하였다. 모친은 우울증에 걸려 있었고, 슈만의 누이 에밀리는 19세에 자살, 나머지 세 형제들도 모두 병사하고 만다. 슈만의 일곱 자녀들도 대부분 폐결핵이나 류머티스성 질환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슈만가의 정신이상은 그의 부친에게서 소질이 유전된 것이 아닐까 하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는 15세 때, 부친과 누이를 잃고 잇달아 형수와 형의 죽음을 당한 후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17세 때 슈만은 자신이 정신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일기 속에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격렬한 충혈,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 숨막힘, 순간적인 의식상실 등의 쉴세없이 번갈아 일어났다. 그의 과도한 자기분석과 지나치게 복잡한 정신, 높은 교양, 심오한 사상 등이 오히려 창작에 방해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은 갈수록 질이 저하되어 1850년 이후의 작품은 아예 창작목록에서 빼는 게 낫다는 비평의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는 1953년 7월 결국 신경졸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사람은 불치의 뇌질환에 걸려 이미 절망적 상태입니다. 음악가의 질병을 연구한 케르너 박사는 슈만의 증세를 정신분열증의 유형을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동맥경화성 정신병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때, 슈만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일기에 써 놓았다. 밤중에 우리가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되어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사들이 자기에게 들려 주는 노래라고 하면서 오선지에 멜로디를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다시 자리에 눕더니 밤새도록 줄곧 천장만 노려보면서 헛소리를 해댔다. 아침이 되자, 그는 천사들이 악마로 변하여 자신을 지옥으로 던져 버리겠다고 한다며 몸서리쳐지는 노래를 불렀다. 그는 신경발작을 일으켜, 악마들이 마치 호랑이와 하이에나처럼 자기에게 덤벼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쥔다면서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냈다. 두 명의 의사가 와서 가까스로 그를 진정시켰다. 1854년, 병상에 누워 있던 슈만은 비가 내리는 날, 홀연히 집을 뛰쳐나가 라인강가로 나왔다. 다리지기가 통행료를 요구하자 목에 감았던 머플러를 풀어주고는 다리 중간쯤에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강을 오르내리던 증기선이 마침 이를 목격하고 목숨을 건져 주었다. 슈만은 그 후 엔데니히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가족의 면회도 금지된 상태였다. 1856년 7월 23일, 엔데니히로부터 슈만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통지가 있었다. 클라라가 영국 연주에서 돌아온 지 보름쯤 되었을 때이다. 클라라는 브람스와 함께 갔다. 거의 2년 만에 남편을 만났다. 클라라를 겨우 알아보는 것 같았으나 나의 -나는 알고 있어 라고만 했을 뿐, 슈만은 죽기 전 몇 달 동안은 발음이 분명치 못했다. 7월 28일엔 심한 정신경련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클라라와 브람스는 벽의 작은 창문을 통해 그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슈만은 수주일 동안 음식을 거부해왔으나 클라라가 주는 포도주와 약간의 젤리만은 받아들였다. 7월 29일, 화요일 오후 4시, 그토록 힘든 인고의 굴레에서 슈만은 벗어날 수 있었다.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들어온 지 2년 만이었다. 최후의 시간은 아주 조용했다고 한다. 46세. 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물론 임종의 순간에는 곁에 아무도 없었다. 30분 가량 지나서 클라라가 달려왔을 뿐이었다. 미망인의 나이는 그때 37세였다.
하늘의 포로가 된 휠덜린 독일의 서정시인 휠덜린은 네카르 강변의 목가적인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수도원의 교사였다. 두 살 때 사별하고, 모친의 재혼에 따른 의부와도 9세 때 사별하는 비운 속에서 성장하였다. 14세의 이 다정다감한 소년은 그 후 10년 동안이나 수도원에 갇혀 엄격한 규칙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열한 살 때 보드레르가 기숙사에서 내 넋은 벌써 금이 갔네 라고 썼듯이 휠덜린은 종은 바람만 불어도 제 몸을 울려 소리를 낸다 고 하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반듯한 이마를 가진 준수한 용모의 휠덜린은 30세가 되어도 여전히 초라한 신학자에다 남의 집에서 기식하며 어머니가 부쳐준 조끼, 손수건, 양말 등에 고마워해야 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시를 쓰려면 사제의 임무직을 겸해서는 안된다는 게 평소 그의 신념이었다. 한편 예술을 희생한다면 또 신이 부여한 본래의 임무에 대해 죄를 짓는 일이라며 그는 괴로워하였다.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나의 황혼은 벌써 차가운 숨을 내쉬는 구나(하략)
휠델린은 목사를 그만두고 궁핍함 속에서 글을 쓰며, 가정교사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지를 전전했다. 그러나 이것도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육신을 지탱하는 내적인 힘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광기는 점점 그의 신경으로부터 전광처럼 분출했다. 언제인가 그가 시인 마티존의 집을 방문했는데 얼굴은 시체마냥 창백하고 피골이 상접했으며, 마치 거지와 같았다. 귀신같은 몰골에 놀라 뒤로 물러나니 희미한 소리로 휠덜린 입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튀빙겐의 어느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1년 후, 망령의 몰골로 다시 나타나 튀빙겐의 거리를 쏘다녔다. 어느 목수가 자기 집에 데려가 기거하게 하였다. 그가 뱀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나돌았다. 정신착란을 일으켜 하늘의 포로 가 된 이 시인은 36년간이란 세월을 어둠 속에서 음울하게 살아야 했다. 머리는 백발이 다되었고 우아함도 이미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시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무도 없었다. 그가 73세로 몸을 뉘이고 숨을 거두었을 때, 누더기를 입은 수공업자들이 죽은 시인을 묘지로 운반해 갔다. 그의 수 많은 원고는 물론 아무렇게나 취급되어졌다. 독일어는 그의 시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도달해 있다. 그런 찬사는 그가 가고 난 뒤의 일로, 그와는 이미 상관이 없었다.
여성 공포증, 그리고 독신남 - 뭉크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질병, 발광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을 지키는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내 일생동안 줄곧 따라다녔다. 나는 일찍부터 삶이 가지는 비참하고 위험스러운 점을 알게 되었으며, 또 지옥에 죄의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벌에 대해서도 배웠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군의였으며 오슬로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그가 5세때 어머니는 폐결핵을 세상을 떠났고, 한 살 위이던 누나 소피에도 폐병으로 14세에 요절, 여기다 어린 시절,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뭉크의 죽음을 응시하는 눈은 점점 내향적으로 되었다. 그는 죽음을 자기 자신 속에 숨어었는 것으로 의식하였으며, 그래서인지 작품에서는 유난히 죽음에 관한 소재가 많았다.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여러 장 그린 병든 아이 , 병실에서의 죽음, 저승에서 자화상 등 죽음을 응시하는 눈이 밑바닥에 깊게 깔려 있음을 느끼게 한다. 유채화나 판화에서 자주 그리던 병든 아이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누이의 영상이었던 것 같다. 뭉크의 아버지는 원래 성격이 편벽되고 이상성이 그 기질에 숨어 있었다. 스무 살 아래이던 아내를 잃게 되자 그는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아이들을 때리기도 하고 이상하게 굴었다. 끝내 독신이던 뭉크도 여자들이 부드럽게 대하면 대할수록, 어떤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인들이란 영원히 남자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는 일종의 흡혈귀 로 생각했다. 한 여인과 살고 있는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뭉크는 80세의 긴 인생을 혼자서 보냈다. 이러한 삶에 대한 내향적인 태도에서도 뭉크의 노이로제적인 성격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뭉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60년, 꺄뮤의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책 표지에서였다. 그것은 뭉크의 절규 였는데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서 그 원화를 대할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었다. 그림 앞에 서니 어떤 괴기감이 정말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무엇에 놀란 듯 몸을 뒤틀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사람 같지 않은 형체가 불쑥 다가오는데 그때 유혼 이란 낱말이 떠올랐다. 뭉크는 절규 를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일기에 썼다.
어느 날 저녁 때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 도시가 퍼져있고, 피요르드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지칠대로 지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멈추어 서서 피요르드를 둘러보았다. 해는 서산에 지고-구름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처럼, 나는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절규 같은 것을 느겼다. 나는 절규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구름을 진짜 피처럼 그렸다. 색채가 절규했다.
뭉크는 정신장애를 일으켜 자주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45세 무렵이었다. 여성으로부터 쫓기며 시달림 당하는 느낌을 가졌고, 친구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에 빠지곤 했다. 어디에 있어도 안주할 수 없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술을 마셔야 하는 생활이 되풀이 되었다. 1907년, 독일에서 아홉 달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발트해 연안의 한 마을에서 휴양을 취해야 했다. 이듬해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오슬로의 피요르드 호숫가에 집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의 모티브는 역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술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광기에 시달리면서도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때로는 창작의 원동력을 얻어내고 예술을 위해서는 또한 기꺼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제일 긴 망각의 늪에 갇혔던 사람도 있었다. 까미유끌로델과 휠덜린 그리고 러시아의 춤꾼 니진스카가 그들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철창에서 부터 해방될 수 있었으니까. 핏빛으로 그려 낸 뭉크의 절규!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생존이었으며, 한편 예술이 아니었던가 싶다. 죽음 직전에 뿜어내는 마지막 광휘를, 그들의 선혈을 보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