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운명과 화해한 사람 - 베에토벤
베토벤 [Beethoven, Ludwig van] 1770. 12. 17 독일 본에서 세례받음~1827. 3. 26 오스트리아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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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급격한 영감의 발작이 일어났을 때, 혹은 피아노 앞에서 무슨 착상을 얻었을 때. 그의 얼굴은 변모하는 것이었다. 얼굴의 근육은 불끈 솟고, 핏대는 부풀어 올랐으며, 거풀진 눈은 갑절이나 무섭게 되고 입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제 스스로 불러낸 마신들에게 제가 잡혀 버린 마술사처럼. 악성 베에토벤을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같다고 말한 이는 율리우스 베네딕트였다. 베에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본 시의 어느 가난한 집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술주정뱅이던 그의 아버지 요한은 예배당 가수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나게 되어 장남이던 그는 가계를 지탱하기 위해서 열세 살부터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일을 하게 된다. 17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그는 두 동생의 교육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죽을 줄 모르는 사람은 가엾어라! 나는 열다섯 살 때,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암울한 심경을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애초부터 그의 인생은 슬프고 가혹한 싸움으로 드러났다. 1769년, 26세가 되던 그 무렵부터 서서히 청각장애의 징후가 나타났다. 원인은 급성 중이염의 악화였다. 스물다섯 살 때 매독을 선고받은 슈베르트의 절망이나 진배가 없었으리라. 화가에게 눈을 빼앗듯 그에게서 귀를 빼앗다니. 마치 눈을 흘기는 듯한 이 두 음악가의 표정은 모두 심한 근시탓이라고 하는데 둘 다 독신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쪄면 난데없이 돌출한 이십대 중반의 이러한 장애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귓병은 그의 성격을 거칠게 만들었고, 남을 의심하는 증세까지 불러일으켰다. 가끔 하늘을 향하여 우울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가다가 늘 짧게 끊어져 버리는 웃음-그것은 기쁨을 자주 가져보지 못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의 생애를 쓴 로망 롤랑의 말이다. 자살을 각오한 어느 날, 베에토벤은 두 아우들에게 유서를 썼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멀리서 들여오는 피리 소리를 듣는데 나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을 때나, 목동이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을 누군가가 듣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느냐고 물을 때, 거의 절망해서 자칫 자살하려고도 생각했다. 다만 예술만이 나를 다시 일깨우곤 했다. 아아, 나에게 맡겨진 창조를 모두 다 해낼 때까지는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나의 예술의 전 재능이 아직 열릴 기회가 있는 동안은 아무리 불운이 찾아오더라도, 결코 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분연히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한때 그가 사랑했던 쥬리에타가 어느 백작과 결혼을 할 무렵, 그는 더욱 분발심을 일으켜 창작에 열중하니 그때 제3교향곡 영웅 이 탄생하고, 잇달아 운명 , 전원 교향곡이 발표되었다. 내가 비참한 지경에 뼈져 있을 때, 나를 받들어 준 것은 도덕이었다. 자살로써 인생을 끝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덕택이기도 하지만, 도덕의 덕택이기도 하다. 그렇게 술회하였다.
1810년 그는 말 대신 필기구로 해야 하는 필담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가극 피델리오 를 지휘하고 있을 때였다. 제1막의 이중창에서부터 벌써 무대는 흔들렸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지휘봉을 따르고 있었으나, 가수들은 제멋대로였다. 혼란이 일어났다. 잠시 휴식을 선언하고 다시 연주가 시작되자 혼란은 거듭되었다. 베에토벤의 지휘로는 연주가 불가능함이 분명해졌다. 퇴장하게, 가엾은 베에토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못했다. 쉰들러는 수첩에다 이렇게 썼다고 한다. 연주를 계속하지 마세요. 이유는 집에 돌아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후다닥 관중석으로 뛰어내려 줄달음을 쳐서 단숨에 집안으로 들어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식사시간 되기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 날의 일을 쉰들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그 날 마음속 깊이 타격을 받아 죽는 날까지 그 무서운 장면의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난청과 고립으로 완전한 내적 자아에 몰입을 하게 된 그는 고통속에서 교향곡 제9번 환희 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에르되디 백작부인에게 괴로움을 돌파하여 기쁨으로! 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죽음을 넉 달 앞둔 1826년 12월. 신의 영역에 속한다 는 걸작, 그 아름다운 현악 4중주곡 을 완성하였다. 그의 건강은 사십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황달이 간경변증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베에토벤은 앉기만 하면 술을 마셨다. 1827년 네 차례의 수술 뒤, 고통 속에서 넉 달이상이나 누워 있었는데 <베에토벤 최후의 병과 죽음>이란 논문을 쓴 포레스트 박사의 글을 보면, 폐충혈의 발작이 일어난 뒤에, 간장의 위축경화로 복수병과 발 다리의 종기가 생기게 된 것 이라고 하였다. 죽음이 너무나 일찍오는 것이라면 할 수 없고, 좀 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허나 그래도 나는 만족하리라.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고 싶을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죽음)를 용감히 맞으리라. 베에토벤, 그는 과연 죽음과 두 번 대결한 셈이었다. 첫 번의 경우에는 혼자서 죽음의 높은 문턱을 스스로 넘어섰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이 관대하게 그것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그는 사람들을 향해서 라틴말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박수를 쳐라. 이제 희극은 끝났다.
그가 떠나던날 비엔나엔 눈이 내리고 때아닌 천둥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는데, 베에토벤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두 주먹을 불끈 쥔 다음,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웨링의 묘지에 매장이 되었는데, 묘비에는 다만,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 이라고만 씌어져 있다. 그가 죽고난 뒤 그의 모든 물건은 경매에 부쳐졌다. 고통스럽게 필담을 적었던 회화수첩과 그 일기들은 1풀로티너 20크로이쩌에 팔렸다는 후문이다. 고뇌에 찬 57년, 마침내 그는 환희 로 마침표를 찍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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