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명기인가, 시인인가, 송도 삼절인가 - 황진이
|
개성 병부교 다리밑. 때는 마침 초여름이어서 다리 밑에서는 빨래하는 처녀 두셋이 부지런히 방망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빨래터에는 진현금만이 남아 몇가지 남지 않은 빨래를 헹구고 있었다. 그 때 병부령 다리 위를 지나가던 청년 묘랑이 다리 밑의 현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가뜩이나 녹작지근한 날씨에 훌훌 옷을 벗고 목물이라도 끼얹고 싶던 현금은 청년의 눈웃음에 짜릿한 흥분이 일었다. 일단 나귀를 타고 사라졌던 청년은 이튿날 그 시가에 다시 나타나 또다시 눈웃음을 던졌다. 현금은 청년의 유혹을 받고 가슴이 뛰었다. 청년은 나귀를 다리 난간에 메어 두고 아래로 내려와서 현금의 앞에 마주섰다. 한동안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청년은, "나 물 한 바가지 마시세." 하고 말문을 열었다. 현금은 우물로 가서 물을 떠서 청년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바가지를 돌려주며 청년은, "어, 시원하구나!" 하고 뇌까렸다. 양반집 자제 같은 풍모와 그 서글서글한 외모에 반해 현금은 청년을 사모하게 되었다. '다리 밑의 인연'은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였다. 청년은 개성에서도 유명한 황진사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익어갔다. 이와 같이 다리 밑의 밀애를 거쳐 태어난 아기가 바로 황진이였다. 황진이나 그의 어머니 현금은 그러나 이미 그들 생애에 슬픈 숙명을 안고 태어난 여인들이었다. 그것은 진이의 아버지 황진사처럼 그들 신분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현금은 곧 황진사의 첩이었고, 황진이는 이를테면 첩의 딸이었다. 현금. 진이의 어미 현금은 다리 밑의 인연으로 얻은 딸을 그나마 양반의 씨라고 애지중지하여 키웠다. 어미는 딸에게 글을 가르쳤다. 진이는 여덟 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열 살에는 열녀전을 읽었다. 사서 삼경을 익혔고 시서화의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 지식과 정서 양면을 두루 갖추었다. 게다가 거문고 가락에 흥을 돋우어 감성의 폭을 넓혀 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황진이의 재주는 인근 마을에 널리 알려져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천부적인 문장 실력을 찬탄하다 못해 흠모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은 먼 발치로 진이의 아름다운 용모를 한 번 보고는 그만 상사병이 나서 죽어 버렸다. 죽은 청년을 실은 상여는 마을 젊은이들에 의하여 운구되었다. 그러나 상두꾼의 구슬픈 만가 소리에 의해 운구되던 상여는 진이의 집 앞에서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이는 옷장 속에 곱게 접어 둔 적삼과 치마를 꺼내어 청년의 관곽 위에 얹어 주었다. 그제서야 상여는 땅에서 떨어져 그 슬픈 만가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그 때부터 황진이는 인생을 깨달았고, 사랑의 번뇌를 알았다. 그녀는 마치 죽은 마을 청년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진이는 자기로 말미암아 청년이 죽었으니 그것은 자기가 그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내 아름다움 때문에 청년이 죽었으니 나의 미모가 그를 죽인 셈이다. 내가 이 미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가는 또 다른 젊은이가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이는 그 같은 생각 끝에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되었다. 그 뒤부터 세상 사람들은, 황진이의 이름만 들어도 그녀를 사랑하게 이르렀다. 그 당시 엄수란 사람은 나이 칠십이 되도록 악단에서 늙었는데 그만치 당대의 "미모도 많이 보았고 음률도 잘 알지만 황진이를 보고서 인간 세계에 선녀가 내려왔다." 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세상에 이런 절조가 또 어디 있겠느냐" 고 경탄했다는 것이다. 날씬한 몸매에 개성적인 미모, 온몸에 젊음과 정열이 한창 무르익은 방년의 여인이 기계에 나타나자 진이는 송도 화류계의 꽃이 되었다. 뭇사내들은 진이 앞에 나타나 술과 시와 거문고 놀이 하기를 다시없는 영광으로 알았으나 진이 마음에 꼭 들어 그녀의 사랑과 예술을 깡그리 바칠 만한 멋쟁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진이는 오만하고 도도해져 갔다. 세상의 내로라하는 남성들이 그녀 앞에서는 쪽을 못 쓰고 빌빌거렸다. 그녀는 남성들을 마음껏 시험하고 싶어졌다. 때로는 농락도 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미모와 무르익은 육신, 빼어난 문장력에도 굽히지 않는 남성이 나타나면 마음껏 그와 함께 타오르는 정열을 불태우고 싶기도 하였다. 남성 시험 첫 상대로 그녀는 지족 선사를 택하였다. 지족 선사, 30년 동안 불도를 닦아 생불이라 불리는 스님이었다. 진이는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있는 지족암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이 생불을 어떻게든지 유혹해 불 계획이었다. "스님 계시옵니까?" "......" 조용한 산골의 암자에서 만 가지 상념을 떨쳐 버리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지족 선사는 미모의 젊은 여인이 나타나자 몹시 당황해하면서 안으로 안내하였다. "스님, 스님께선 득도하신 분이니까 중생의 번민을 풀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황진이는 요염한 얼굴에 우정 수심이 가득하여 지족 선사의 두 눈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 지족 선사는 선뜻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진이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스님, 인간사는 허무한 것 같습니다.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바로 느끼셨소. 인간사는 허무하오." 진이는 다시 남자 이야기를 꺼내었다. "스님, 이 몹쓸 계집 때문에 상사병이 나서 죽은 총각이 있었나이다. 나마들은 예쁜 여자를 못잊어 하다 죽는 수도 있나이까?" "예, 어흠. 나무 관세음보살!" 지족 선사는 황진이의 요염한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과연 저런 미모면 상사병이 나서 죽는 총각도 있으리라 싶었다. 지족 선사는 설법을 들으러 온 진이를 향햐 가까스로 합장을 하고 설법을 시작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앉아 있자니까 혀를 깨물고 참으려 하여도 자꾸만 고개를 드는 정염을 어쩌지 못했다. 지족 선사는 참다 못해, "진이!" 하고 그녀의 팔목을 잡고 떨리는 가슴에 그녀를 안았다. 그날 밤 30년 수도승 지족 선사를 함락시킨 진이는 암자를 내려오며 쓴웃음을 지었다. 30년의 수도가 황진이의 아름다움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져 스님은 하룻밤 사이에 파계승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세상 남자란 별게 아니었다. 황진이는 지족 선사 이외에 그녀가 시인이었으므로 같은 시인인 판서 소양곡의 사랑을 받았고, 그녀가 가인이었으므로 같은 가인인 송순과 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녀가 풍취객이었으므로 당대의 풍류인 이사종과 6년 동안 달콤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지족 선사를 파계승으로 만들어 버린 뒤 황진이의 눈길은 화담 서경덕에게 쏠려 갔다. 말하자면 대학자 화담 선생이야말로 진이가 한 번 시험해 볼 마한 대상이어서 바짝 욕망의 불길이 일었다. 진이는 어느 날 서사정으로 화담을 찾아갔다. 시정 잡사를 멀리하고 초연히 초당에 앉아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 화담 선생을 진이는 뭇사내가 자기의 미모에 무릎을 꿇듯 그렇게 정복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고메한 정신을 배우려고 이렇게 찾아왔나이다." 진이는 화담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어, 편히 앉으시게." 화담은 대수롭지 앉게 그녀를 건너다보고 어버이 같은 얼굴로 그녀의 질문에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다. 진이의 미모 따위는 화담에게는 아무런 이성적 자극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앉아 학문을 이야기하였고, 시와 문학을 겨루었다. 진이는 술과 노래와 춤으로 화담을 유혹하려 했으나, 화담은 진이를 한낱 어린애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며칠 밤 며칠 낮을 시험해 보았으나 화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해질녘이었다. 진이는 초당을 나와 일부러 비에 함빡 젖어들었다. 진이의 엷은 옷은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아름답고 요염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그녀의 탐스런 젖무덤과 허리며 둔부가 엷은 옷을 비집고 나오기라도 할 듯이 그대로 그러났다. 진이는 그렇게 살이 드러나 보이는 몸매로 화담 서경덕 앞에 나타났다. "선생님......" 추의에 와들와들 떨면서 진이는 화담 선생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어허, 이런! 몸이 온통 비에 젖었구먼." "네, 선생님. 왜 그런지 자주 외롭고 쓸쓸해서...... 바람을 쏘이러 나갔다가 비를 만났어요, 선생님." "옷을 벗으시게.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감기든다니까." 진이는 속으로 옳다구나 싶었다. 화담 선생이 옷을 벗으라고 했겠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려면 내 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그냥 앉아 있을 돌부처가 어디 있을라구...... 그러나 진이가 비에 젖은 옷을 훌훌 벗고 알몸이 되어도 화담은 그녀를 끌어당겨 남녀의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진이 옷을 말려 줄 터이니 너는 이불 속에 들어가 있거라, 알았느냐?" 화담은 알몸이 된 진이에게 이불을 덮어씌우고 젖은 옷을 말려주었다. 그날 밤에도 화담은 진이의 유혹을 육탄 공세로 마치 어린애 달래듯 잠재우고 저만치 돌아누워 코를 고는 것이었다. 진이는 화담 서경덕에게서 난생 처음 남자를 느꼈다. 천하의 뭇남성을 젖혀놓고 화담은 남성 중의 남성이라 여겨졌다. 이튿날 스승 앞에 무릎을 꿇은 황진이는, "선생님, 송도의 삼절을 아시나이까?" 하고 존경의 눈으로 화담을 우러러보았다. 화담은 고개를 저었다. "송도 삼절. 글쎄다......." "제가 말씀그려 볼게요, 선생님. 하나는 박연이요, 또 하나는 화담이며, 다른 또 하나는 황진이 이 몸인가 하나이다." 그 말에 화담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었다. 자연에서는 박연 폭포요, 남자의 세계에서는 화담, 여자의 세계에서는 황진이 자기가 송도에서 으뜸이라는 이 자신감. 어쩌면 그 같은 자신과 오만한 성격이 그녀의 인생과 예술을 돋보이게 했는지도 몰랐다. 자연을 사랑하면서 그녀의 시심은 싹텄고, 그 자연 속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껴 한 줄의 시를 써 보기도 하는 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이다
진이는 스스로를 송도 삼절에 비유하고 다녔으나 이성이 그리울 때도 있었고 사랑을 불태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뭇사내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해 온 진이였으나 그녀도 어쩔 수 없는 한 나약한 여성이었다. 자기 쪽에서 정을 느끼고 접근했다가 또 자기 쪽에서 보내버리고 나서 그녀는 그리움에 못잊어 시를 썼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진이 앞에 또 왕가의 귀인 벽계수가 등장한다. 그는 황진이에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과연 벽계수는 황진이의 요염한 구애를 거들떠보지 않고 그냥 도도히 스쳐가기만 했다. 진이는 그 벽계수를 생각하며 또다시 시심을 불태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도도하고 오만한 진이는 밤마다 '임'을 그린다. 그녀는 여자다. 낭군을 모시고 싶은 여자다. 그녀의 '임'인 '어른'은 지금 어디쯤에 계실까.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어른님'을 만나 사랑의 밀어를 굽이굽이 펴지도 못한 황진이는 그녀의 인생을 화려하게 펴지도 못하고 40 전후하여 눈을 감았다. 죽을 때 진이는 한 여자로서 짖궃은 과거를 살아온 죄책감에 빠져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내가 생전에 내 몸을 자애하지 못하였으니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박 모래틈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라."
진이를 아껴 오던 이웃들은 차마 그녀의 유언대로 시체를 모래틈에 버려 까마귀 밥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장단 근교 구정 고개 남쪽 길가에 고이 묻어 주었다. 그 뒤 당대의 문장가 백호 임제는 공무로 송도에 왔다가 먼저 황진이의 소식부터 물어보았다. 그러나 황진이는 벌써 죽어서 흙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백호는 낙담이 되어 장단의 진이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 주었다. 백호의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에서 한숨 섞인 시구가 흘러 나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을 어데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가 사림의 몸으로 일개 기생의 무덤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파면이 되고 말았다. 국록을 먹는 벼슬아치가 체신머리없이 기생의 넋을 위로했다는 죄목이었다. 백호 임제는 그까짓 벼슬 따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말았지만, 어쩌면 죽어서 황진이를 만나 한잔 술에 흥을 돋우며 문장을 교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