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 道德經 : 第四章 (노자 - 도덕경 : 제4장)
道沖, 而用之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충 이용지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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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넷째장
직역
도는 비어 있음을 사용하니 가득 차 있지 않는 듯하다.
깊도다. 온갖 것의 근원 같다.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을 푼다.
그 빛을 조화롭게 하고, 티끌을 고르게 한다.
맑도다. 혹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나, 상제보다 먼저 있는 것 같다.
해석
우리가 건물에 들어간다. 그럼 건물의 벽을 쓰는 것인가 건물의 빈 공간을 쓰는 것인가. 내가 길을 갈 때 바닥에 깔린 아스팔트를 사용하는가. 비어 있는 길 위의 공간을 사용하는 것인가.
-잠시 생각하라-
우주가 비어 있지 않다면 지구는 존재할 수 있는가.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비어 있는 것을 사용할 때 그 비어 있음은 다함이 있는가. 그럼 비어 있음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깊다고 한 것이다. 그 천정이 보이지 않는 하늘처럼 깊고 그윽한 것이다. 이 도는 그래서 온갖 것의 으뜸 같은 것이다. 비어 있음은 도의 한 표현이다.
-명심할 것이 있다. 도덕경에서 도를 규정지은 것은 없다. 나도 물론 없다. 단지 비유를 들뿐이다. 비유에 집착하지 말기 바란다.-
너와 나 사이에 빈 공간이 없다면 무엇으로 너와 나를 구분 지을 수 있겠는가. 만물이 만물로 인식되는 것은 만물 사이에 있는 빈 공간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날카로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으로 강한 자는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는 자는 내면에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한다는 것은 날카로운 칼의 날을 못쓰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날카로움이 극에 달하면 무디게 되는 것이다. 앎이 극에 다다르면 자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지러움은 구분에서 생긴다. 나누고 나눌수록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나누지 마라. 도는 비어 있음 하나로 만물을 포용한다. 집단과 집단 나와 너, 나와 사물을 구분할 수록 세상은 어지럽게 된다.
빛이 뛰어남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다. 남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연에 반대하라 그럼 빛이 날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도는 티끌과 사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도의 차원에서 보면 잘나고 못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 그 나름대로의 독특함이 있다. 그 독특함이 다른 것에 대한 우월은 아니다. 온갖 사물은 각기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어 있음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구의 아들, 아들은 개별성과 개체성을 가진다. 따라서 즉 구체화된 사물로서 알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단지 상제보다 앞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을 할뿐이다. 여기서 상제의 象은 이미지이다. 물건이 만들어지기 전의 형상태이다. 제는 上帝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 상제의 진정한 의미는 나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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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4.
[도는 텅빈 그릇이지만 그것은 또한 무궁무진하게 사용할 수 있다. 동시에 언제나 흘러 넘치는 일도 없다. 그것은 심원하여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된다. 도는 안에서의 만물의 날카로움은 무디어지고, 어려움은 풀리며, 그 빛은 부드러워져 만물의 티끌과도 같이 하건만, 그 청칭함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도가 누구집 자식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상은 천지를 다스리는 상제보다도 먼저인 것이다.]
주
도충 : 만물의 근원인 도는 '텅빈 그릇이다'라는 의미임. 충은 충(빈 그릇)과 의미가 통하며, 충(충성할 충)으로 표기된 책도 있음. 이는 같은 음끼리의 차자임. 원래 한자는 차용을 할 때 그 소리만 취하지 않아 글자와 사물의 관계는 없으며 그 경우 글자는 단순히 기계적인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의 경우 충은 발음기호의 구실만 하고 실제 의미상으로는 충(빈 그릇)이 되는 것이다.
연혜 : 깊고 아득함.
종 : 만물의 근본, 근원을 뜻함.
동기진 : 세속의 일상적인 걱정, 근심이 제거된 상태로 풀이하는 학자도 있음. 세속적으로부터의 초월과 정적이 노자 철학의 골격이라 보고 내린 해석임. 그러나 이 장은 도의 무궁무진한 작용과 원만한 융통성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도는 날카로움을 모르며 항상 원만하게 만물을 동일한 차원으로 보는 도는 차별, 배척, 제거 등의 개념을 알고 있지 않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일 것이다. 도는 무엇하나 버리지 않고 만물의 티끌과도 함께 한다. 그러나 그 청칭한 본바탕은 오염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이상이 노자가 말한 요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필자는 '동'을 글자의 원래의 뜻을 취하여 만물의 티끌과 '함께 한다'로 풀이하였다.
상제지선 : 상은 어떤 불가사의한 이미지를 의미함. 명상과 직관에 의하여 도가 하나가 되었을 때 얻어지는 모종의 신비한 체험을 뜻함. 이상을 본뜬다, 같다로 해석하는 학자도 많음. '상제지선'은 세계에 질서를 가져다준 제왕보다 시간상 앞서 있다는 것을 표시 한 말임.
해
도는 천지를 주재하는 상제보다 먼저 있었다. 그것의 참모습은 맑고 깊어서 그 존재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초월적 내재 자로서 만물을 넘어서 그 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도는 모든 물건이 들어 갈 수 잇는 빈 용기이다. 물건의 근원을 소급하면 그것이 다 도에서 흘러나옴(유출)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조화의 근원으로 극에 달하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극즉반). 도의 움직임을 지각하지 못하며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것을 우리는 나온 곳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실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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