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나라 - 박원재, 최진덕
지식인의 숲에서 문명의 평원으로 나아가다
유학은 인간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역사세계와 그 인간이 사라지고 없는 고요한 자연세계 그 어디에도 충실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상이었다. 공자의 애매한 가르침이 제자백가의 원천이 될 정도로 포괄적이긴 하지만 사실 유학은 전국시대로부터 한초에 이르기까지는 제자백가 가운데 한 학파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유학은 여타의 종교처럼 민중의 관심과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시서예악이라는 고급스러운 문화적 전통을 중시하고 이에 대한 배움을 중시하다 보니 다른 종교처럼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쉽게 대중적 기반을 갖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당시 문화적 선진국이던 산동반도 부근 노나라와 발해 연안 제나라의 얼마 안 되는 엘리트 지식인들이 유학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재야의 고급스러운 사상이었던 유학은 지식인 사회에서만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정치의 목적이 백성을 위하는 데 있다고 믿었지만 스스로 대중적 호소력을 지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학이 정치권력과 친근한 관계를맺으면서 권력자들의 후광을 등에 업은것도 아니다.유학은 군신관계가 인간세계의 보편적 질서라 믿었다. 그래서 권력의 필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은 하고 있었지만 인간세계에 아예 무관심한 학파들을 제외하면 제자백가 중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기존의 정치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유학이 한나라의 정통 가르침으로 등극하게 된다.정치권력의 엄청난 후원을 받으면서 동아시아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아울러 공자 이후 소중히 여겨져 온 시서예악이 비로소 공식적으로 경전화 되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오경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학은 이후 수많은 왕조이 부침 속에서도 20세기가 되기까지 동아시아 사대부 지식인들의 고급문화로서 동아시아인들의 삶의 방식을 지배하는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잦은 왕조 교체와 함께 수많은 이념들이 명멸했지만 유학은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서 이천년 동안 정치적인 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념으로 존속했다. 국가 관료를 뽑는 과거에서 유학의 중심 경전인 사서오경에 대한 지식이 늘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정치권력은 수없이 바뀌지만 한 사상가가 제시하는 이념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수백년 혹은 수천년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념의 힘은 진실로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념 그 자체는 매우 무력한 것일 수 있다. 세 치 혀밖에 가진 것이 없는 지식인은 아름다운 이념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힘까지 얻기는 어렵다.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이 있게 마련인데 대개의 경우 이러한 이념을 실화시킬 수 있는 힘은 지식인이 아니라 권력자가 가지고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념을 가진 지식인 혹은 철학자가 곧 권력의 소유장기를 꿈꾸어 왔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왕이라든가 공자나 맹자가 말하는 왕자가 바로 그런 존재들이다. 하지만 철인왕이나 왕자는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등장하기가 매우 어렵다.불행하게도 아름다운 이념을 지닌 자는 힘이 없고 힘이 있는 자는 이념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념을 지닌 지식인은 자신의 뜻을 역사 속에 실현하기 위해 이념을 알지 못하는 권력, 폭력을 본질로 하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자가 60이 넘은 나이에 10여년에 걸쳐 온갖 고초를 격으면서 중국 천하를 떠돌아다닌 것도 자신의 이념을 알아주는 권력자와 만나기 위해서였다.플라톤이 시라큐스의 군주를 세 번이나 찾아갔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군주들에 의탁하여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려 했던 공자나 플라톤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공자 이래로 많은 유학자들이 수백년에 걸쳐 줄기차게 꿈을 이루려 노력했지만 그들의 노력 역시 모두 헛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진시황에 의한 분서갱유는 유학자들의 이러한 이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잘 알려 주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예나 지금이나 폭력을 본질로 하는 권력은 폭력을 혐오하는 지식인들의 이념과 행복한 결합을 이루기 힘들다. 진시황은 엄격한 법 집행과 형벌을 통해 강력한 군주 중심의 통치를 하고자 했던 자이다. 이런 그에게 인륜의 질서를 강조하며 인간의 자발적인 도덕심에 의존해 평화스런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꿈은 부질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통치 방법에 반하는 모든 서적들을 불살라 버리고 지식인들을 탄압한다. 그런데 불가능해 보였던 유가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나라 무제때에 이르러 유학이 공식적인 국가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학의 승리는 유학이 추구하는 이념의 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거기에는 복잡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해 있었다.무제가 기원전 2세기에 백가를 추방하고 오직 유학만을 존중한다고 결정한 것은 그가 유학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무제는 화려한 침략전쟁과 제왕의 위엄을 꾸미는 의식 그리고 샤머니즘적인 미신이었다. 그가 동증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유일한 국가교학으로 인정한 데에는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 고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과 같은 성씨의 친족들 그리고 다른 성씨의 공신들에게 천하를 나누어 준다. 무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나라는 명목상으로 중앙집권제를 내걸었지만 실을 과거 주나라처럼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군현제란 이름으로 알려진 한나라의 중앙집권제도는 공신들이 권력에서 쫓겨나고 다음에 두태후 중심의 외척세력과 같은 성씨의 친족들이 축출되면서 서서히 정착되어 간다. 한나라가 통일제국을 완성한 것은 바로 무제 때의 일이다. 한나라 초기의 지배적인 사상은 황노학이었다. 흔히 도법가라 부르기도 하는 황노학이란 자유방임적 성향의 도가와 엄격한 법질서를 강조하는 법가라는 전혀 이질적인 두 사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것이었다. 황노학은 그때까지 한나라를 지배했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이미 기존 세력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무제는 주세력을 척결학 통일제국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황노학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무제는 구세력과 인연이 없는 참신한 지식인들을 등용했으며 황노학 대신 지식인들사이에서 강하 호소력을 지니고 있던 유학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기존 권력의 후광을 등에 업지 못했던 유학의 언저리에는 무제의 통일정책에 걸림돌이 될 세력가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권력의 필요성을 나름대로 인정하면서도 권력에 늘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했던 유학 이런 유학을 무제가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기존 정치세력이 척결이라는 미묘한 정치적인 고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권력과 이념의 만남은 어느 일방의 필요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권력을 통해야만 이념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이념 역시 권력을 간철히 갈구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남을 개끗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과 이념이 만나는 과정에서 권력도 이념도 어느 정도 변질되게 마련이다. 특히 권력이 자신과 썩 친할 수만은 없는 이념과 만나는 경우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그 이념으로부터 크건 작건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즉 권력과 이념 양쪽이 하나로 합쳐지지도 않고 완전히 이질화되지도 않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변화의 과정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한 무제 이후 만나게 된 권력과 유학 역시 이러한 길을 하게 된다.유학적인 이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권력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자신의 폭력적인 속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만큼 폭력성이 순화되고 무력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은 이 같은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유학적인 이념을 통해 권력을 세련되고 위엄있게 장식할 수 있었고 또 일반 백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유학에 의해 권력이 변하는 것처럼 권력에 의해 유학도 변하기 시작했다. 권력의 필요에 따라 유학의 순수한 이념도 오염되기 시작한 것이다.유학은 권력을 위엄 있게 장식하는 데 이용되거나 때때로 옳지 않은 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유학은 이 같은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재야의 한계를 벗고 나라의 중심 학문 즉 관학이 됨으로써 엄청난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었다. 즉 인간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거나 소수의 사람만을 지배할 수 있던 무대에서 벗어나 역사의 너른 현실 안에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 것이다. 진시황에 의해 분서갱유를 당한 지 백년도 안되어 이제 제자백가는 모두 추방되고 오직 유학만 관학화됨으로써 유학의 오경은 국가가 인정하는 유일의 공식적 경전이 된다.그리고 다른 책을 연구하는 박사들은 모두 추방되고 오직 오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오경박사만이 박사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박사란 오늘날 대학의 학위를 가리키는 박사란 말과 마찬가지로 고금의 문화에 달통한 학자를 뜻한다. 동시에 오늘날 국립대학의 교수와 비슷한 관직을 일컫기도 한다. 행정일은 맡지 않고 오직 연구 업무만 수행한다. 이러한 관직은 한나라 때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 때부터 있었다. 당시 제나라가 수도의 직하라는 곳에다 천하의 학자들을 불러모아 정치에 관계없이 오직 학술 연구에만 종사하게 하였는데 이 제도가 한나라 오경박사제의 모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도는 한 때 70명의 박사를 두었던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초기에까지 이어졌다. 이 사실은 권력이 야만스런 폭력과는 어느 정도 격을 달리하는 것이라면 모종의 이념과 대의명분이 없이는 존립하기 어려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박사는 무제 이전에도 있었지만 오경만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가 탄생한 것은 무제 이후의 일이다. 이때 박사는 종교적인 의식을 주관하는 사제가 아니라 오경이라는 책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이것은 유학의 비종교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 준다. 유학을 굳이 종교라고 한다면 아마도 책의 종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학에서는 옛부터 내려오는 문화적 전통을 문자로 기록해 놓은 책 이상으로 신성시하는 것이 없다. 유학은 책을 우상숭배한다. 오경이라는 책의 신성함이 유학의 궁극적 보루였던 것이다. 실제 한대에는 유학보다도 오히려 오경이 더 존중되었다. 유학이 있고 난 다음에 오경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경이 있고 난 다음에 유학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대에 유학이 존중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경을 받드는 학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향의 칠략과 반고의 한서예문지에서는 육례와 유가를 따로 분류했다. 유가는 사사로운 민간인들에 불과한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반면 육례는 고대의 제왕에서 비롯된 왕관의 학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육례란 원래 유학에서 가르치던 예,악,사,어,서,수 등의 잡다한 교과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육례란 오경(시,서,예,역,춘추)에 악까지 합친 유학의 신성한 책들 즉 육경을 가리킨다.공자가 배우고 가르쳤던 시서예악이 오경의 모체임을 기억한다면 육례의 이 두 가지 의미가 실은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대에는 육례라는 말이 육경 혹은 오경이라는 말로도 쓰이곤 했던 것이다. 한대 사람들이 공자를 존경한 것도 공자가 육례를 전한 자라고 여겼기 때문이다.무제가 유학을 높여 오경박사라는 제도를 설치한 것 역시 실은 육례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오경박사라고 해서 하나의 경에 한 명의 박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경에 여러 명의 박사가 있기도 했고 한 명의 박사가 여러 경을 전공하기도 했다. 오경박사의 수가 얼마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박사의 수가 조금씩 늘었지만 백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역두세 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박사라는 관직은 학자들에게는 엄청나게 명예로운 자리였던 셈이다. 오경박사라는 제도가 설치되고 나서 얼마 뒤에 박사들을 위해 처음으로 제자 50인을 두게 했다. 제자의 수는 그 후 3천 명으로까지 늘어났다. 오경박사와 그 제자들로 구성된 대규모 국립대학이 형성된 것이다. 제자들이 관리로 진출하게 되자 박사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오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어느 것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경서에 대한 주석만 해도 수백만 자에 이르다 보니 머리가 희어지도록 공부해 봐야 한 가지 경서조차 다 배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학 오경의 학문이 그토록 있었던 것은 관리과 되어 이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경박사라는 제도가 설치되고 제자들이 관리로 진출하는 길이 열림으로써 오경을 배우는 유학자들에게는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도를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리하여 자신들의 이념을 추상적으로밖에 전할 수 없는 재야의 민간 교육자였던 유학자들은 권력에 의해 작동되는 정치질서, 행정체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를 통해 유학자는 자신들의 이념의 순수성솨 자유를 잃는 대신 이록을 얻고 이념을 신천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유학은 이제 권력과 악수함으로써 권력의 성격을 바꾸고 아울러 기존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수천년을 살아남은 유학의 비밀
뒷날 관리선발제도로 정착되어 19세기 말까지 계속되는 과거는 유학자와 권력자를 매개해 주는 공식적인 통로였다. 유학자는 관거를 통해야만 책임 있는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자신의 순수성에 자부심을 가진 유학자치고 과거를 깨끗한 길로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과거는 도를 행하는 길이기도 했지만 부도덕한 권력자한테까지 머리 숙이면서 이록을 탐하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부심 강한 유학자들에겐 과거란 치를 수도 없고 안 치를 수도 없는 딜레마였다. 특히 송명이학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었고 과거를 궁여지책 정도로 생각하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오늘날 우기 사회에 전인교육과 입시교육 간의 대립이 있듯이 송명시데에도 순수한 도학과 과거를 위한 학문간의 대립이 있었다. 송명이학은 과거를 위한 학문보다는 도학을 훨씬 더 중시했다. 이것은 조정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시골 마을에 파묻혀 지내며 숲과 시내를 벗삼아 시를 짓고 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더 순수하게 보았던 당시의 풍조를 반영한다. 이는 대자연과 대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 보는 송명이학의 분위기와도 관련된다. 본래 선한 세상을 정치를 통해 억지로 어떻게 해 보려 하기보다는 자연스러움에 맡겨 두는 것이 더 좋다고 보았던 것이다.
주자 자신부터 19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행동에 뜼이 있엇지만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한적한 시골의 유학자로 일관하다시피 했다. 송명이학 그 중에서도 특히 주자학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우리의 조선조에도 과거를 경시하는 풍조가 자부심 상한 주자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조의 이름난 주자학자들 중에는 송시열처럼 과거를 치르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유학자가 과거를 통하지 않고 권력과 손을 잡는 길로는 천거가 있었다. 과거는 학식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필답고사인 반면 천거는 인품을 주로 평가하는 주관적인 추천제이다. 천거에는 사사로운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자들은 과거보다는 천거가 더 좋은 관리 선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중종 때부다는 천거가 더 좋은 관리 선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중종 때 조광조는 주자학의 정신에 따라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현량과를 실시한 바 있는데 현량과는 일종의 천거제였다. 유학자들이 천거제를 선호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과거제는 권력자가 혈연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직접 관리를 선발하는 방법인 반면 천거제는 유학자 자신들이 관리를 추천하는 방법이었다. 유학자들이 천거제를 선호한 것은 아마도 권력과 손을 잡더라도 가급적 약하게 손을 잡음으로써 권력으로부터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고 싶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무제 이후 권력과 유학은 손을 잡았고 그 결과 권력과 유학 모두 어느 정도의 변질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폭력성을 자신의 본질로 하는 권력과 인위라는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유학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유학자들은 군주로부터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직책과 먹고 살 수 있는 이록을 얻었으나 군주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군주에게 자식들을 자애롭게 돌보는 부모처럼 백성을 돌볼 것을 요구하고 백성의 부모라는 기준에 따라 군주의 언행을 비판했다.그리고 자신들의 비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엔 미련없이 군주를 버리고 정치판을 떠나 다시 무위자연의 세계로 퇴장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오늘날 유학이 봉건적인 지배이데올로기였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것을 기껏해야 반쪽의 진실밖에 말해 주지 않는다. 유학은 군주의 지배를 옹호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목숨까지 걸어 가며 그것을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군주는 백성의 부모라는 유학자들의 군주상을 수용하면서도 유학자들의 요구와 충돌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유학자들의 요구는 군주의 지고한 권력에 대한 간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군주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할 경우엔 군주와 유학자들 간에 충돌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유학은 권력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순화시키려 하고 권력은 그 이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렇듯 유학과 권력의 만남에는 항상 대립과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군주가 강해지면 유학이 약해지고 유학이 강해지면 군주가 약해졌던 것이다.
군주의 권력은 군주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국가내 백성의 공적인 이익을 위해 쓰일 수도 있ㅎ다. 군주에 대한 유학자들의 간섭과 비판은 군주의 폭력성을 순화시키고 그것을 공적 이익을 위해 쓰도록 한 점에서는 옳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학자들의 간섭과 비판 앞에 군주의 권력이 자주 노출되면 군주의 권력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군주의 권력이 약화되고 또 약화되다 보면 종국에는 군주는 사라지고 오직 유학자들만 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학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 자체가 사자리게 된다. 그리하여 국가의 이익도 백성의 이익도 실현하지 못하고 오로지 유학자층의 이익만 실현될 우려가 있다.
이 같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대표적인 본보기가 바로 유학의 영향력이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강했던 우리의 조선조였다. 조선조에서는 군주가 유학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유학이 군주를 이용하는 꼴이었다. 조선조의 왕들은 태종, 세종이나 영조, 정조 같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유신들의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왕은 궁중에서 태어나 유학자들에 의해 교육되고 사대부 관료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견제 속에서 정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조의 왕들은 양반관료 국가인 조선조의 상징일 뿐 실질적인 권력을 갖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조라는 국가가 무력해지고 마침내 유학자 자신들이 염원하던 위민정치마저 이룩할 수 없었던 근본 이유이다. 그 위선조차도 아름답게 보이는 도덕의 왕국 조선조가 양반계층의 전횡에 따른 부패와 타락으로 국력을 소진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다.군주의 권력이 가진 폭력성이 유학의 이념에 의해 너무 순화되어 버린다면 결국 군주의 권력은 거세되고 만다.군주의 권력이 가진 폭력성이 유학의 이념에 의해 너무 순화되어 버린다면 결국 군주의 권력은 거세되고 만다. 군주의 권력이 거세된 국가는 중심을 상실하며 중심이 없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유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강력한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국가가 등장할 수 없다. 강력하지 못한 국가는 끊임없이 외침에 시달리게 된다.
새로운 왕조는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등장할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군사력에 기반해 새로운 경우와는 달리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군사력에 기반해 새로운 왕조가 둘어서면 곧 무기를 버리고 도덕과 이념에 의한 통치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다시금 쇠퇴와 혼란의 길로 인도할지 모르는데 권력은 왜 유학과 손을 잡았던 것일까. 왕조의 부침 속에서도 정치적 이념으로는 별로 효용이 없는 저 어정쩡한 유학이 왜 그토록 오랜 기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한 무제가 유학을 선택하고 조선조를 개국한 이태조가 주자학을 선택한 것은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유학이 추구하는 가치가 인간이면 누구나 그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일상의 삶에 뿌리박고 있다믄 것이다. 유학은 일상의 삼의 가치에 충실한 평범한 가르침에 불과하지만 유학이 강조하는 인륜 질서를 군주로부터 보통 사람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면 누구라도 벗어나거나 거부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 누구도 유학의 가치를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생활유학이가장 강조하는 효제의 윤리는 사실 어떤 종교나 철학 혹은 어떤 정치체제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유학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고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하고 강력한 군주라 출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군주만이 낡은 왕조를 허물어 새로운 황조를 창건하거나 세상을 근본적으로 되바꿀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군주는 자칫 잘멋하면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원흉아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유학의 가치, 인류의 기본적 질서를 무시하다가는 지식인과 민중의 광번위한 반발에 직면하기 십상이었고 이 반발을 이겨 낼 만한 군주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대부분의 군주는 유학적 가치를 수용하고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적 난제 성악설과 성선설
우리가 유학을 유학답게 만드는 유학의 본질을 애써 찾는다면 인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하기를 가르치는 효제의 윤리는 그 모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유학의 출발점에는 늘 효제의 윤리가 있다. 사서오경에 달통한 자라 해도 처음부터 효제의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더 이상 유학자일 수 없다. 물론 유학이 효제의 윤리를 항상 지켜야 하는 것 혹은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유학자들은 상황에 따라 효제의 윤리를 넘어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과거 많은 유신들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나라일이 맞부닥치게 될 때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여 때로는 나랏일을 우선시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윤리가 더 이상 필요없을지도 모를 자연세게에 푹 파묻혀 버리고 싶어하는 유학자들도 종종 있었다. 음풍농월하면서 인간의 시비이해가 없는 자연세계를 그리워하다 효제의 실천에 소홀해질 수도 있을 터인데 조선조 유학자들 가운데는 자연세계를 그리워하는 유학자들이 많았다. 효제의 윤리는 효제의 윤리가 아닌 모든 것을 배제하는그런 윤리로서 강조되었던 것이 아니다. 유학은 효제의 실천에서 출발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넘어서기도 하는 것이다. 효제의 윤리를 부정하고는 유학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효제의 윤리만으로 유학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도 없다.
하지만 유학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면서도 변함없이 효제의 윤리를 강조한다. 유학이 효제라는 가족간의 윤리를 강조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무엇보다도 가족은 인간 삶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모와 자식이 있는 가족안에서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자기 부모의 자식이고 자기 형제의 형제이다. 즉 가족은 후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효제의 윤리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가족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가족이 없이는 인간이 탄생하고 성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가 성립할 수도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일상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유학은 효제의 윤리를 잠시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족 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세계 너머 한쪽에는 인간보다 앞서 수십만년 전부터 말없이 있어 온 하늘과 땅으로 대표되는 대자연의 세계가 있다. 또 다른 한쪽에는 군주와 신화의 위계질서가 늘 위협받으면서도 엄존하는 혼탁한 인간세계가 있다. 가족은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유학자라면 누구나 효제의 윤리를 중심적 가치로 숭상하지만 효제의 윤리는 늘 이 두 상반된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이 두 세계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는지는 유학자마다 달랐다. 공자는 문화적 전통의 습득과 도덕적 이상의 실현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인간세계와 그 안에서 자라나는 문화에만 골몰했던 단순한 인문주의자는 아니었다. 공자는 때로는 부국강병을 위해 인간세계가 절대군주를 정점으로 획일적이로 일사분란하게 지배되어야 한다는 법가의 냉혹한 현실주의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래서 제나라 법가의 영웅인 관중이나 형법을 최초로 만든 정나라의 자산을 높이 예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자는 다른 한편으로 아예 인간이 만든 문화가 있기 이전의 세계를 더 근본적인 세계로 여기기도 한다. 그 세계는 엄한 군주 중심의 질서체제는 물론 인간을 완성의 길로 이끄는 시서예악마저 떠난 세계이다. 공자는 어쩌면 그런 세계가 찬란한 문화로 빛나는 인간의 세계보다 더 근본적이라 여긴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세계가 곧 인간 노력의 한계 바깥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이 세계가 곧 인간 노력의 한계 바깥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세계로 공자가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면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다고 말할 때의 그 무위자연의 세계이다. 공자는 인간세계를 몰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분명히 그런 무위자연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었다. 공자가 혼란한 역사적 소용돌이에 널더리가 나서 이따끔 인간세계의 바깥에서 홀로 노니는 은자들의 세계에 은밀한 동경의 시선을 보낼 때 혹은 자신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위기에 처해 절망 속에서 외마디로 천 혹은 천명을 내뱉을 때 공자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인간 너머에 있는 무위자연의 세계였다.
공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효제의 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인륜도덕이 유학의 출발점에 항상 자리잡고 있으나 그 출발점의 한 쪽 극단에는 무서운 군주가 위엄 있게 군림하는 정치세계가 있고 다른 한쪾 극단에는 작위하는 인간이 사라지고 없는 무위자연의 세계가 있다. 한쪾은 욕망을 가진 인간들이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이는 역사의 세계이고 다른 한쪾은 스스로 부여한 질서에 따라 순리댈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세계이다. 한쪽은 법가가 주로 관심을 갖는 세계이고 다른 한쪾은 도가가 주로 관심을 갖는 세계이다. 때문에 제가백가 가운데 유가와 법가를 정반대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유가와 법가는 다르지 않다. 이에 함께 유가와 도가도 정반대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위자연은 노자와 장자가 주로 말하던 것이고 논어나 다른 경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지만 무위자연을 예상케하는 발언은 유학의 경서 속에 비일비재하다. 논어네서 공자는 효제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하면서 늘 효제의 실천을 중심으로 삼지만 때로는 효제를 넘어 법가 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때로는 효제를 넘어 도가 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이에 따라 공자의 인 개념도 덩달아 흔들리곤 한다. 공자는 효제의 실천을 인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법가의 영웅인 관중을 인자라 칭송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무도한 세상이 싫어 수양산에 숨어 버린 백이, 숙제와 같은 은자를 두고 인자라 칭송하기도 하는 것이다.
공자의 흔들리는 언행 가운데 어떤 측면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한 유학자들 사이에 입장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인간세계에 적극적으로개입하고자 제후의 신하가 된 자도 있고 인간세계에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며 세상밖으로 나가 은자가 되어 버린 자들도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두 흐름을 대표했던 자들이 바로 순자와 맹자였다. 순자의 주장에 동조했던 자들은 선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강했던 자들이다. 선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그 선이 인간이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열심히 토론하고 계몽하고 주장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자의 성악설은 능동적 작위를 강조하게 되었다. 반면 맹자는 선이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진다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선이 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자연도덕주의 입장을 취하면 인간이 애써 무엇을 새로 이루려 하는 적극적인 태도보다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는 수동적 태도를 강조하게 된다.선은 찾고 만들어야 할 대상이기보다는 자연이 준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곧 선을 찾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악설과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론으로서는 둘 다 참으로 한심한 수준이다. 성악설과 성선설이 얼마나 어설픈 이론인지는 순자나 맹자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다. 순자와 맹자는 간단한 사례 몇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논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두 이론을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론으로만 읽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모두 당시 사회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이런 관련성 속에서 읽혀질 때 비로소 유의미한 것이 된다. 성악설과 성선설은 인간을 어떻게 교육하고 인간세계를 어떻게 관리,경영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미리 결정하게 만든다. 성악설을 주장하게 되면 인간세계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인간을 예법에 의해 교육하고 인간세계를 군주의 엄격한 통치 아래 두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성악설이 극단화되면 필연적으로 획일적 통제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반면 성선설을 주장하게 되면 선을 취하기 위해 예법에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맡겨 선이 자연스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당연히 군주의 엄격한 통치보다는 인간세계를 있는 그대로 두자는 입장이 강조된다. 성선설이 극단화되면 필연적으로 자유방임을 가져온다.
성악설과 성선설 가운데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그 실천의 결과가 이처럼 크게 달라지지만 실은 둘 다 유학의 이론이다.양자는 모두 효제의 윤리를 벗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가족 질서를 절대시하는 효제의 윤리는 가족 질서를 넘어서 가려는 유학자의 행보를 가로막아 그를 다시금 가족 질서 안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성악설과 성선설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끝까지 고집하는 유학의 이론은 없다. 만약 성악설과 성선설 가운데 어느 한 극단으로만 나간다면 공자의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는 시중의 가르침에 어긋날 수도 있다. 알고 보면 성악설을 주장하는 순자에게도 어느정도 성선설적 요소가 있고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에게도 어느 정도 성악설적인 요소가 있다. 그래서 효제의 윤리는 유학자가 인간세계의 변혁을 노리고 법가 쪽으로 나아가더라도 법가가 될 수 없게 만들고 그가 무위자연의 세계로 달아나려고 도가 쪽으로 나아가더라도 도가가 될 수는 없게 만든다. 효제의 윤리로 인해 유학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 사이에서 획일적 통제와 자유방임 사이에서 중용을 취한다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효제의 윤리로 인해 유학은 어느 쪽에도 철저하지 못한 채 늘 어정쩡한 자세를 면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중국의 송대에 들어오면 노장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유학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송대에 유학을 서양 사람들은 새로운 유학 즉 신유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같은 명명은 잘못된 것이다. 송대의 유학이 이기와 심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전개하지만 자연세계를 인간세계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이 특별할 뿐이고 송대의 유학에도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송대에 들어와서는 특별히 사서가 중시된다.그것들은 송명이전까지는 선왕이 제작하고 공자가 산정한 것이라 믿어지던 오경에 비해 권위가 한참 떨어진다고 생각되던 문헌들이었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가리킨다. 논어는 공자의 손을 거친 적이 없는 책이고 맹자는 순자나 묵자와 마찬가지로 제자의 서에 불과한 책이다. 그리고 대학과 중용은 예기에 들어 있는 조그마한 두 편의 글에 지나지 않는다. 송대 유학자들은 문자 하나하나의 뜼을 연구하는 복잡한 훈고보다는 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의리의 파악을 중시했다. 송대 유학자들은 사서가 훈고 없이는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한 오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간단명료하게 압축해 준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훨씬 중시했다. 이들은 사서만 읽으면 옛 성현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 메시지란 천지자연과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자연도덕주의적 질서였다. 천지의 대자연과 이 대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근원적으로 선하다는 이른바 자연도덕주의적 믿음이 송명시대의 유학자들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송대의 유학에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선설을 유학의 전통으로 간주하고 성악설을 배척한 것뿐이다. 이로 인해 성선설을 말하는 맹자를 특히 중시하게 되었고 맹자가 경서의 하나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성이란 저절로 주어지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말하는데 성선이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본래 좋다는 것이다.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좋다면 인간에게 그런 본성을 부여한 자연 자체도 좋아야 할 것이다. 자연의 명령을 성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는 중용의 말은 자연도 좋고 천의 명에 의해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도 좋으니 이 본성에 따르는 것이 곧 도라는 뜻이다. 송대의 유학적 흐름을 두루 포괄하는 송명이학의 특징은 바로 자연도덕주의였던 것이다. 주자는 논어 그리고 예기의 두 편인 대학 및 중용과 함께 맹자를 사서로 선택했다. 주자학에서 사서는 오경보다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일 뿐만 아니라 오경보다 더 중요한 경서로 간주되었다. 송대 이전까지는 오경이 경학의 중심이었지만 송대에 와서는 주자를 계기로 사서가 경학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경 가운데서 주자가 역을 가장 중시한 것은 역이 맹자나 중용과 마찬가지로 자연도덕주의적 믿음에 비교적 충실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서가 모두 철저히 그런 것은 아니다. 맹자와 중용은 자연도덕주의적 믿음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으나 논어와 대학은 그렇지 않다. 특히 대학은 맹자나 중용과는 다른 면이 있다.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격물치지는 외부 세계에 대한 앎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는 다분히 인위적 노력을 중시하는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명학은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맹자의 입장에 맞게 다시 해석하기도 하였다. 인간에게는 본래 타고난 본성인 양지가 있는데 양지는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는 성향으로서 이런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주자학과 양명학 모두 맹자의 성선설과 자연도덕주의적 믿음에 뿌리박고 있지만 강조하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주자학보다는양명학이 노장이나 선불교의 무위자연 철학에 더 가까운편이다. 양명학도 노장이나 선불료처럼 인간과 자연 혹은 인간과 우주가 하나 되는 세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자학과 양명학 모두 효제의 윤리를 부정하지 못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악설과 성선설 중 어느 것이 유학의 정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선조 오백년을 주자학이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유학의 정통이 성선설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공자는 성악설도 성선설도 명시적으로 이야기한 바 없다.하지만 그에게는 인간의 적극적인 활동에 관심을 갖게 하는 성악설적인 요소도 있고 무위자연으로의 퇴행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성선설적인 요소도 있다. 공자가 배우고 가르쳤던 시서예악에도 인간세계에 치중하는 것도 있고 자연세계에 치중하는 것도 있다. 굳이 나누어 말하자면 서와 예는 인간세계에 치중하고 악은 자연세계에 치중한다.
시서예악의 확대판인 오경 중에도 인간세계에 치중하는 것이 있고 자연세게에 치중하는 것이 있다. 대체로 봐서 서와 춘추와 예는 인간세계에 치중하고 역은 자연세계에 치중한다.시는 어느 쪽이라고 분류하기가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각 문헌의 명확한 주장에 따라 시원하게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를 통해 유학의 경서가 오경에서 칠경, 구경, 십삼경으로 확대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논어가 보여 주는 공자의 잡다한 관심사로부터 그리고 일상적 삶의 근본 양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인의 중력장 유학
유학은 늘 지상의 현실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서 있다. 가끔은 인간세계의 극한에서 그 너머의 세계를 두들기기도 하지만 곧 돌아와 버리고 만다. 유학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세계를 끝까지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유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모와 자식이 있고 군주와 신하가 있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종교적 믿음이나 철학적 사변이야말로 당연히 이단이고 패륜이다. 유학에 의하면 일상적인 세계와는 유리된 도라고 불리는 순수하고 완전한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서오경은 평범한 세속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상식 차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자연과 가족과 사회에 구속당해야 하는 세속의 삶에 절망하여 일상적인 세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큰 기대감으로 사서오경을 읽는다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현실을 초탈한 신비하고 심오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 그들은 사서오경에서 인간을 세속에 묶어 두려는 무거운 중력만을 읽을 것이다.그들의 독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사서오경은 구도자적 열정을 채워 줄 만한 이야기를 전혀 제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속을 초월하려는 이들의 순수한 열정 자체를 패륜으로 규정하여 이단시한다.
또한 인간사회의 부패와 혼란에 넌더리가 나서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도 역시 사서오경을 읽고 큰 실망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사서오경에서 기존의 억압적 질서를 옹호하려는 불순한 음모만을 읽을 것이다. 그들의 독해 역시 틀린 것이 아니다. 사서오경은 그들의 혁명가적 열정을 채워 줄 말한 이야기를 전혀 제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세상을 뒤바꾸려는 그들의 순수한 혁명가적 열정마저 패륜으로 규정하여 이단시한다. 사서오경에 의해 도야된 유학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세속을 벗어나 높고 고상한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구도자들이나 거꾸로 세속 안으로 돌아와 세속의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혁명가들이나 모두 다 패륜이고 이단일 뿐이다. 유학은 이러한 초월이나 혁명의 의지에 대해 상식의 차원을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파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유학은 왜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계에서 도 아니 도를 추구하며 진리 아닌 진리를 지키고자 하였던가?
하늘과 땅이 있고 부모와 자식이 있고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는 세상에서 인간의 삶의 대부분 잡다한 일상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일상의 시간은 익숙하고 상식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들이 늘 새롭게 반복된다. 위계질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매일매일 서로 어울려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밥 먹고 못 입고 일하고 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다. 이런 일상적 세계 곧 일용인륜의 세계에는 늘 그 나름의 잡다한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물론 이 질서들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예 아무런 질서가 없는 혼돈의 세계는 있을 수 없고 설령 혼돈의 세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경험될 수가 없으니 우리와 무관한 세계의 이야기이다. 약간의 혼란과 위반은 있겠지만 나름의 질서가 엄존하고 있는 일용인륜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이란 좀체로 일어나기 힘든 법이다. 또한 평소 우리가 전혀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과 같은 일 신비한 체험 격정적인 삶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설령 그러한 순간이 있더라도 곧 우리는 이에 익숙해지며 일상성을 회복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일상을 지워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삶 자체가 증발되어 버릴 것이다. 마치 그것은 꿈처럼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토막토막 전개되는 상황이 되어 버릴 것이다.
유학이 말하는 일상성의 진리를 감히 보편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시공의 한계에 매인 채 잡다한 일상적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진실 때문이다.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진실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지위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보통 사람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나 철학자 혹은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사람이 되기 이전에는 한 어머니의 철모르는 아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이 된 다음에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보통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극히 평범한 일상사를 되풀이하지 않고는 어느누구도 정치나 철학 혹은 종교활동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용인륜의 세세한 내용은 시대와 지역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평범한 일상 생활만큼은 큰 차이가 없다. 유사 이래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당장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유학이 갖는 보편적인 특징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먼저 일상인일 뿐이다. 일상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신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되물어 보아야 한다. 서양으로부터 근대 자연과학을 받아들이고 근대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지 백여 년이 된 오늘날 우리의 일상적 삶이 크게 변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본 구조는 과연 얼마나 변했는가 사서오경을 읽고 외우는 경학은 이제 쓸모없는 학문이 되어 버렸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은 사서오경이 이야기하는 그 구조의 틀에서 과연 얼마나 벗어나 있는 것인가.
경학이 학문의 대세를 이루던 조선조를 뛰어넘고 다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는 일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인간의 일상적 삶의 근본 구조에는 놀랍게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수만년,수십만년 전부터 있어 왔던 저 하늘과 땅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고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족의 일원으로 길러지고 인간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갈등과 대립으로 얼룩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질서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군신관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군신관계를 봉건 잔재로 보는 것은 인간세계의 실상을 정직하게 관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군대에서의 계급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에서의 선후배관계나 사제 관계그리고 회사에서의 상하관계 등도 모두 본질적으로 군신관계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구조가 이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서오경의 이야기를 우리와 무관한 남의 이야기 혹은 먼 옛날의 이야기라고 치지도외할 수만은 없을지 모른다.
유학에 진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일사으이 세계에서 구한 건전한 상식들이다. 유학은 이러한 상식에서 벗어난 멋들어진 이론이나 거대한 신화 초월적인 삶을 거부하고 적나라한 인간의 실상에서 인간됨을 실천해가고 원만한 인강으로 성숙해 가기를 원했다. 유학의 전통을 이어 갔던 유학자들 그리고 넓게는 동아시아인들이 태어나서 교육받고 아웅다웅 다투고 고민하며 도덕을 세우고 질서를 찾다가 흔쾌히 삶을 접을 수 있었던 주무대는 다름 아닌 인간세계였다. 이 세계 안에서 인간들은 스스로 열심히 배우고 수양하며 도덕을 찾아 냈고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하며 도덕을 찾아 냈고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많은 이들이 인생의 좌표로 삼고 배우고 따르는 참된 인격의 완성자이자 지도자인 군자가 있었고 성인이 있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배움의 의미는 먼저 효제충신이라는 바탕을 닦고 그 다음 옛 문화적 전통이 집적된 오경의 문을 배움으로써 생긴 바탕 위에 세련된 교양미를 더하여 문과 질이 찬란하게 조화를 이룬 군자가 되는 것이다. 군자란 생활유학과 학문유학을 한몸에 다 익힌 자이다. 이런 배움이 완성돼야 비로소 관리가 되어 자신의 이념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배움이 차고 넘치면 그때 비로소 벼슬을 해도 좋다고 공자는 말한다. 유학이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라는 이 사실은 오늘날의 유학 연구에서 너무나 자주 무시되고 있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유학을 애써 종교화하려 하고 애써 철학화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여기에는 종교와 철학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화 현상이라는 서구의 편견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동양의 과거 역사에서도 이러한 종교나 철학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문화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종교와 철학이 있어야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종교와 철학은 인간사회에 꼭 있어야만 하는 보편적인 문화 현상은 아니며 종교나 철학에 특별히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무관심한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방향을 잃어버린 채 타락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개중에는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상식을 지키고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 즉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는 인격적인 완성자가 나오기도 한다.종교와 체계적인 철학 없이 사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겠지만 특히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유학자들에게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경전이 부재하는 시대의 사서오경
경이란 어떤 사회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진리 혹은 도를 담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책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건 아니면 옛 성현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건 일단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공인되면 그 책들은 경으로 격상되고 신성한 책들이 된다.경이란 하나님이나 부처님 혹은 옛 성현의 절대적 권위를 빌어 인간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인간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이전에 미리 결정해주고 이 결정에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한다.이 요구의 정당성 여부를 요모조모 따져 보기 시작한다면 경의 절대적 권위는 즉각 위협받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경이란 자유로운 비판적 정신과는 양립하기 어렵다. 자유로운 비판적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있어 경이란 타도해야 할 우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반면 경의 권위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운 비판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위험한 이단자로 보일 것이다.
경은 한 시대를 송두리째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경직되어 인간 정신의 자유를 한없이 억압하는 우상이 되어 버릴 염려가 늘 있다.그러나 경은 바로 이러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통해 자칫 방황하기 쉬운 굳건한 터전 위에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경은 모든 것을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중력과 같아서 인간이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을 방해하지만 동시세 인간이 지상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한다. 억압이 인간을 반드시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자유가 인간을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다.억압에는 방황이 없는 안정이란 보상이 주어지고 자유에는 늘 방황과 불안정이라는 대가가 따라 다닌다.
경에 기록된 말씀이 어떤 초월적 존재의 말씀인가 아니면 역사와 사회 속에 살았던 어느 성현의 말씀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경의 말씀은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이건 간에 인간의 말과 생각과 행동의 방식을 미리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불행을 줄여 준다.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과 권위를 지닌 경이 없다면 아마도 그 시대는 더욱 불행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의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무한정 존중되는 다원화된 시대이다.어떤 경이 말하는 진리이건 자유로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무한정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지난날 어떤 시대도 누리지 못했던 우리 시대만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일체의 비판을 포기하고 어떤 경을 절대의 진리로 받들어 모시더라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래서 우리 시대는 경이 철저하게 부재하는 시대인 동시네 다양한 경이 무질서하게 난립해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사서오경도 자유로운 비판정신 위에 세워진 근대적인 학문의 수입과 더불어 낡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이제 사서오경을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치부하여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건 혹은 그것을 다시금 먼지 쌓인 문서고에서 끄집어내어 불변의 진리로 모시건 말건 그것은 읽는 사람들 마음이다. 사서오경에 대한 어떤 입장을 취하건 한국의 현대사가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사서오경을 무시하는 사람과 존중하는 사람 모두 사서오경이 이야기하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서오경이 이야기하는 진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서오경을 무시하거나 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설령 그렇다 한들 대세에무슨 큰 지장이 있겠는가마는 서구적 근대가 이미 저물어 가고 있는 지금 근대를 지배해 오던 사상은 해체당하고 다음 시대의 미래를 위한 사상적 그림의 윤곽이 잘 떠오르니 않고 있는 마당에 사서오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몽매한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손해일지도 모른다.
물론 유학과 사서오경이 무슨 대단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유학과 사서오경의 가르침은 그런 진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라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무슨 대단한 존재이기에 앞서 우선 평범한 일상인일 뿐이며유학과 사서오경은 우리들 평범한 일상인이 지켜야 할 평범한 도리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있고 부모와 자식이 있고 군주와 신하가 있는 그런 평범한 세계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일단은 이런 평범한 세계에 태어나 적어도 일정 기간은 그 속에서 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다음에 구원을 받건 해탈을 하건 혁명을 하건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적 세계에는 평범한 질서가 있을 뿐이다. 유학이 가르치는 도리는 그런 평범한 질서외에 다른 것이 없다. 사실 유학에는 거창하게 진리라 부를 것도 없고 사서오경 역시 거창하게 경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고원하고 심오한 진리를 유학의 사서오경에서 찾으려 한다면 남는 것은 실망뿐일 것이다.사서오경에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라도 보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진리가 들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고원한 것이 아니라 비근한 것이고 심오한 것이 아니라 천박한 것이다.그러나 고원하고 심오한 것에 싫증이 난 사람들에게는 유학의 비근하고 천박한 진리야말로 고원하고 심오한 것보다 더 고원하고 더 심오한 것으로 들릴지도 모른다.너무 비근해서 고원해지고 너무 천박해서 심오해진 것 다시 말해 너무 평범해서 비범해진 것이 곧 유학의 경서가 말해 주는 보편적인 진리일 것이다.
한 무제가 유학을 국가교학으로 공인하면서 오경이 정식으로 경전화되고 오경박사가 설치됨과 아울러 오경의 학습이 관리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되면서 유학은 제자백가 가운데 마지막 승리자가 된다. 그 후 이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학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으로 군림한다. 유학이 승리하게 된 것은 유학이 비범한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진리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과 사서오경이 이야기해 주는 것은 대단한 진리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너무나 평범한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초시대적 보편성을 가질지도 모른다. 다음 세기에 가서 유학이란 이름이 완전히 잊혀지고 사서오경이 먼지 쌓인 문서고 속에서 완전히 실조오대 버린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또 나서서 아마 유학과 사서오경이 이야기해 주던 바로 그 평범한 진리를 유학이 아닌 다른 이름의 제목을 걸고 한문이 아닌 다른 언어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지도 모른다.유학과 사서오경이 이야기해 주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대단한 인간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 없이는 평범한 일상적 세계 속에서 평범한 일상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을 마신다고 해서 특별히 배가 부를 일은 없지만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사어가 되어 버린 한문의 난해함으로 말미암아 유학의 진리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비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색창연한 한문의 난해함은 한문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마저 고색창연하고 난해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문자는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만 그 문자를 해독하기 어려울 경우 그 문자와 함께 그 문자가 가리키는 의미까지도 동시에 어둠 속에 갇히고 말며 게다가 그 문자가 오랜 전통을 가진 경우 모종의 신비감마저 덧붙여진다. 그리하여 이제는 한문을 읽고 해석하는 작업이 무슨 비교적인 행사처럼 여겨지고 유학이 말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성의 진리까지도 신비로운 한문의 장막에 가리워져 몹시 고원하고 심오한 것으로만 악면히 상상되고 있다.유학의 역사를 통틀어서 사서오경이 지금처럼 무용지물로 전락한 적도 없지만 이와 아울러 지금처럼 신비화된 적도 없을 것이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근대의 물결에 밀려난 사서오경이 우리가 약간이나마 알고 있는 다른 경전이나 종교 혹은 철학에 비해 별난 어떤 보편성이 있고 또한 사서오경이 우리의 전근대를 지배했던 책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서오경은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그럴싸한 참고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는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반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