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6. 기러기의 큰 날개를 가졌어도 때를 만나지 못한다면(공손홍, 원고생, 동중서)
2) 곡학아세는 학자의 길이 아니다(원고생)
원고생은 "시경"에 능통하여 경제 때에 박사가 되었다. 언젠가는 조정 회의석상에서 황생이라는 선비와 논쟁이 벌어졌다. 황생이 먼저 말했다.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군주를 시해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원고생이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폭군 걸왕과 주왕이 포악하고 난폭해서, 천하의 민심이 모두 탕왕과 무왕에게 쏠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탕왕과 무왕은 천하의 민심에 따라 걸과 주를 쳤던 것입니다. 또한 걸과 주의 백성들은 폭군의 치하에 있기 싫어해 탕왕과 무왕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없이 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다시 황생이 말을 받았다.
"관은 아무리 낡아도 반드시 머리에 쓰고, 신은 아무리 새 것이라도 반드시 발에 신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위에 있을 것과 아래에 있을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걸과 주가 비록 천자의 도리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위에 있어야 할 임금입니다. 이에 반해 탕왕과 무왕은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결국 아래에 있어야 할 신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잘못했을 때 신하가 바른 말로써 허물을 바로잡아 줌으로써 임금을 받들지 않고, 도리어 임금의 허물을 핑계로 삼아 이를 무찌르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이것이 시해와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원고생이 다시 반박했다.
"그렇다면 고조 황제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잘못이겠습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경제가 말했다.
"고기를 먹으면서 말의 간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말의 간은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고기 맛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또 학문을 하는 사람이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 뒤로 어느 학자도 천명과 시해에 대해 감히 논쟁하려는 자가 없었다
멧돼지와의 결투
그 무렵 경제의 어머니인 두태후는 "노자"의 글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원고생을 불러 "노자"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원고생은 즉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식한 하인들의 말과 같아 취할 바가 없습니다."
이에 태후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그럼 그대에게 강제 노역형에 처하도록 해 줄까."
그러면서 원고행을 멧돼지 우리에 집어넣고 멧돼지와 싸우도록 시켰다. 이때 경제는 원고생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아는지라, 그가 돼지 우리로 들어갈 때 몰래 잘 드는 비수를 주었다. 그래서 원고생은 우리에 들어가자마자 정확히 멧돼지의 염통을 찔러 돼지를 쓰러뜨렸다. 이렇게 되자 태후도 다시 처벌할 수도 없게 되어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무제가 즉위한 후, 무제는 원고생을 다시 조정에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자 평소 원고생의 꼼꼼한 성격을 싫어하던 신하들이,
"원고생은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그를 이제 기용해 봤자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하며 헐뜯었다.
그래서 무제도 그를 등용시키지 못했다. 이때 원고생의 나이는 이미 아흔 살이 넘고 있었다. 원고행이 무제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갔을 때, 소장학자로 유명한 공손홍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공손홍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원고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원고생은 그런 공손홍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 자리가 파하자, 원고생이 공손홍을 불러 말했다.
"내가 듣건대 조정에 온갖 아첨배들이 날뛰고 그대가 그들과 가까이 한다는 소문도 있으나 나는 믿지 않소. 그대는 상당한 학문을 닦았고 아직도 젊으니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해 올바른 학문을 세워 주기 바라오. 결코 학문을 굽혀서 권세에 아첨하는 그런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오."
공손홍도 원고생의 깊은 뜻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3) 3년 동안 집안 뜰조차 쳐다보지 않다(동중서)
동중서는 "춘추"에 정통하여 경제 때 박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속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의했다. 제자를 가르칠 때는 선배가 새로 들어온 학생을 가르치는 식으로 학습했기 때문에, 어떤 학생들은 동중서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동중서는 3년 동안이나 장막 속에 들어앉아 자기 집 정원조차 못 볼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모든 행동거지에 있어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은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을 하는 선비들은 모두 그를 스승으로 존경했다. 그 후 무제가 즉위하자, 동중서는 강도 지방의 재상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천재지변에 관심이 많아 "춘추"의 원리에 따라 음과 양, 두 기운이 서로 운행하는 이치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비를 오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양기를 닫아 버리고 음기를 발산시켰으며, 비를 그치게 하는 데는 그 반대로 하였다. 이런 식으로 강도 지방 전역에서 시행해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우연히 요동 지방에 있는 고조의 사당이 불탄 적이 있었다. 이때 동중서를 평소 미워하고 있던 주보언이 그의 책을 훔쳐 황제에게 올렸다. 이에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불러 검토하게 하였는데 맹렬히 비난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중서의 제자였다. 그는 그 책이 스승이 쓴 것인 줄도 모르고 저속하고 어리석은 내용으로 가득 찼다고 비난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중서를 옥리의 손에 넘겨 처형시키려 했지만, 얼마 후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뒤부터 동중서는 다시는 천재지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동중서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했다. 그리고 학문에 뛰어났다. 공손홍조차도 "춘추"의 연구에 있어 동중서를 따르지 못했다. 그런데 공손홍은 세상의 흐름에 맞춰 처신함으로써 벼슬이 승상까지 올랐다. 그래서 동중서는 공손홍을 아첨배라고 생각했으며, 공손홍 역시 동중서를 미워했다. 어느 날 공손홍은,
"동중서만이 교서왕의 재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황제에게 아뢰었다. 교서왕은 포악하기로 이름난 제후로 많은 신하를 죽였다. 즉 공손홍은 동중서를 교서왕에게 보내 죽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서왕은 평소부터 동중서가 덕행이 높은 학자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그를 잘 대접하였다. 동중서는 몇 년간 교서왕 밑에서 일하다가 무사히 그만두고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동중서는 죽는 날까지 집에서 오직 글쓰는 작업에만 몰두했다. 실로 동중서만이 "춘추"에 정통했던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은 "공양전"에 전해오고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가 일어난 지 80여 년, 천자의 마음은 바야흐로 학문에 쏠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훌륭한 인재를 모아 유가의 학문을 넓히려 하였다. 그 인재들은 모두 기러기와 같은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새나 제비 따위에게 시달림을 받아 돼지나 양을 치면서 살아야 했다. 만약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높은 지위에 오르며 그 이름을 만세에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공손홍도 "춘추" 하나를 가지고 한낱 돼지 치는 평민에서 제후가 되었던 것이며, 이를 계기로 한나라에는 커다란 학문의 바람이 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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