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5. 좋은 정치란 도덕에 있을 뿐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석지, 장탕)
2) 정치의 올바른 길이란 도덕에 있지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탕)
고기를 훔친 죄로 쥐를 재판하다
장탕의 부친은 재판을 담당하던 한나라의 하급 관리였다. 어느 날인가 부친이 외출하게 되어 어린 장탕에게 집을 보라고 맡겼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쥐가 고기를 물어가 버렸지 않은가. 부친은 화가 나서 장탕을 회초리로 쳤다. 그러자 장탕은 쥐구멍을 찾아 먹다 남은 고기와 함께 쥐를 끌어냈다. 그리고 몇 대 내려친 다음 쥐를 묶어 놓고 재판을 열었다. 우선 영장을 만들고 이어서 공술서를 작성하여 논고하더니 이어 구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당 끝에 쥐와 증거물인 고기를 내놓고 판결문을 읽더니 찢어 죽이는 벌에 처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낱낱이 보고 있던 부친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판결문을 읽어 보고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숙달된 사법관이 한 것처럼 나무랄 데가 한 곳도 없는 게 아닌가. 그 이후 부친은 장탕에게 자기가 쓰던 관청의 판결문을 대신 쓰도록 했다.
법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장탕은 커서도 법률에 밝아 정위 벼슬을 했다. 그런데 그는 원래 자신의 본심을 겉에 드러내지 않는 사나이로 사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능이 있었다. 그가 아직 하급 관리였을 무렵 장사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장안의 부호들과도 폭넓게 사귈 기회가 있었다. 그 뒤 대신으로 승진하자 이름 있는 사대부를 가까이 했고,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자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정중한 태도로 대해 주었다. 당시 무제는 유학에 관심이 높았다. 그리하여 장탕은 재판의 기본 원리를 유교경전에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 장탕은 "상서"나 "춘추"에 정통한 자를 부관으로 임명하여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제껏 판례가 없는 안건의 재가를 왕에게 구할 때는 미리 근거가 되는 자료를 함께 제출했다. 그리고 무제가 뜻에 따랐으며, 그럴 때는 언제나 자신의 부하 가운데서 유능한 인물의 이름을 들면서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방금 꾸중하셨던 조항에 관해서 이 부하가 꼭 같은 취지의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하오나 어리석은 저는,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의 책임이옵니다."
그럴 때마다 장탕의 책임은 용서되었다. 또한 판결문을 올려서 칭찬을 들을 때에도 역시 부하 이름을 들면서,
"이것은 저의 판단이 아니옵니다. 이런 부하가 저에게 제안한 의견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옵니다."
이같이 장탕은 항상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부하를 먼저 생각하고 추천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무제가 중죄에 처하려는 안건에 대해서는 평소에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맡기고, 죄를 사면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안건에 대해서는 가벼운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맡겼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된 자가 권세를 떨치고 있는 유력자인 경우에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으로 그 죄상을 높게 만들었다. 반대로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자라면,
"법에는 저촉되지만 아무쪼록 배려 있으시기를 바라옵니다."하고 무제에게 아뢰어 번번이 풀려나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용서하면 처벌할 사람이 없다
정탕이 고관이 되고 나서부터는 부쩍 인품이 좋아졌다.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고 친구의 자제 중 관리로 채용된 자나 가난한 형제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았다. 또한 춥거나 덥거나 항상 중신들을 방문하여 문안을 드렸다. 이 때문에 적발은 가혹하고 법 적용이 반드시 공평하지는 않았어도 장탕에 대한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더구나 장탕의 수족이 되어 엄격히 법을 집행한 하급 관리 가운데는 학문을 숭상하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승상 공손홍도 장탕의 훌륭한 점을 자주 칭찬하곤 하였다. 그 무렵 회남왕과 형산왕 등의 모반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장탕은 사건의 관계자를 철저히 파헤쳤다. 무제는 이 사건에 대해 장탕이 매우 엄격하게 임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관련자 가운데 엄조와 오피만을 사면시키려 했다. 그러나 장탕은 단호하게 반대를 하였다.
"오피는 원래 이 반역 음모를 계획한 인간입니다. 또한 엄조는 폐하의 신뢰가 두텁고 측근에서 폐하를 보좌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제후와 은밀히 내통한 인간입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을 용서하신다면 앞으로 처벌한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무제는 장타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고 그의 판결을 승인했다. 이처럼 특히 재판에 관한 일이라면 장탕은 중신의 간섭도 물리치고 자신의 책임으로 처리했다. 그러므로 그 공적은 거의 모두 장탕의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탕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지더니 드디어 어사대부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고개숙인 백면서생
그 뒤 장탕이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거나 국가의 재정 문제를 언급하면, 무제는 날이 저물도록 식사하는 것까지 잊어가며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승상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고 중요 사항은 거의 다 장탕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정부가 계획을 세워 지시를 하여도 그 성과가 오르기 전에 각 지방의 악덕 관리가 백성을 착취하여 모처럼의 계획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관리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렸지만 그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 그 결과, 위로는 정부 고관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일들이 모두 장탕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탕이 앓아 누우면 무제가 손수 병 문안을 갈 만큼 무제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 무렵, 흉노가 화평을 청해 왔다. 그것을 수락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신하들을 소집해서 어전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박사인 적산이 입을 열었다.
"수락함이 마땅할까 아뢰옵니다."
무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적산은,
"예로부터 무기는 불길한 도구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함부로 사용해선 안됩니다. 일찍이 고조(유방)께서는 흉노 토벌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셨지만 평성에서 고전에 빠져 결국은 협정을 맺고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혜제, 여태후의 시대에는 싸움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은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시대에는 흉노와 자주 싸움을 벌여 그 때문에 북방의 땅은 또다시 황폐해졌던 것입니다. 또한 경제의 시대에는 오, 초 7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제는 그 대책에 부심하여 황태후의 지시를 받기 위해 수개월 동안이나 황태후가 살고 계신 곳으로 매일 왕래해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오, 초 7국의 난을 진압하자 지쳐 버리신 경제는 그 후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은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폐하께서는 흉노 토벌군을 일으키고 계시지만 그 결과 나라의 재원은 바닥이 드러나고 변경의 백성들은 몹시 빈궁해졌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화평을 수락하시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무제는 다음으로 장탕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장탕은,
"적산은 학문을 겉핥기로 배웠기 때문에 세상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며 적산을 반박했다. 이 말에 발끈한 적산은,
"말씀대로 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장탕은 어떻습니까. 그의 충성심이야말로 겉치레가 아닙니까? 가령 전에 회남왕의 반란 사건을 취급했을 때 장탕은 어떻게 했습니까? 법을 뒤흔들어서 무리하게 제후들 다스린 결과 육친 사이에도 의심하게 되었고 중신들은 불안에 휩싸여 소신껏 정치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장탕이야말로 거짓 충신입니다."하며 장탕을 몰아부쳤다.
이 말에 무제는 기분이 나빠져서 적산에게 물었다.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를 태수로 임명할 테니 흉노의 침략을 철저하게 저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적산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못하옵니다."
현령이라면 어떤가?"
"그것도 무리하옵니다."
"그럼 요새의 수비대장이라면 어떤가?" 여기서 적산은 생각하였다.
'이 이상 피하다간 옥리의 손에 인계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제는 그 말을 듣고 난 다음 적산을 어느 요새의 수비대장으로 전출해 버렸다. 이렇게 한 달쯤이 지났을 때 흉노는 그 요새에 침입하여 적산을 살해해 버렸다. 이 사건 이후 모든 신하들이 장탕의 권세에 겁을 먹게 되었다.
부하를 잘 써라
하동 사람 이문은 옛날에 장탕과 옥신각신하며 다툰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후에 그의 벼슬이 높아지자 옛 원한을 갚기 위해 장탕을 탄핵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아 계속 장탕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 장탕에게는 평소부터 아끼던 노알거라는 부하가 있었다. 알거는 장탕이 이문에 대해 심상치 않은 감정을 품고 있음을 알고 이문의 약점을 잡아 이문을 고발하게 했다. 그러자 장탕은 죄상을 심리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 물론 장탕은 그 고발 사건이 알거의 공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제가 장탕에게 물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가."
그러자 장탕은 이렇게 시치미를 뗐다.
"이문의 패거리가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한 짓이겠지요."
그후 얼마 지나서였다. 알거가 여행 도중에 앓아 눕게 되어 어느 시골 여관에 묵게 되었다. 그러자 장탕은 일부러 그곳에 내려가 문병을 하고 다리까지 주물러 주었다.
사면초가
당시 한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에서는 제철업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나라 왕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감독관의 행동에 대해 몇 차례나 고소했으나, 그때마다 장탕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조왕은 장탕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의 부정을 캐내고 있었다. 또한 조왕은 알거에 의해 취조받은 일도 있어서 알거에게도 원한을 품고 있었다. 조왕은 장탕이 알거의 문병을 하러 간 사실이 있다는 걸 알자 때를 놓치지 않고 무제에게 일러 바쳤다.
"장탕은 중신의 몸으로 일개 말단 관리에 불과한 알거를 문병했을 뿐 아니라 다리까지 주물러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이 공모하여 도리에 벗어난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정위 앞으로 회부되었다. 그때 알거는 병사하였기 때문에, 그 아우가 공범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장탕은 그 권세가 너무 컸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나 장탕이 어떤 사건의 범인 취조 때문에 감옥으로 왔다가 여기서 알거의 아우를 만나게 되었다. 깜짝 놀란 장탕은 어떻게든 그를 풀어 주려고 생각했지만, 일단 그 자리에서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알거의 아우는 장탕이 자기를 버린 것이라 착각하고 성이 나서 사람을 시켜 장탕을 고발했다.
"장탕은 형과 공모하여 이문을 끌어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가 비화되었고, 이 사건은 감선이라는 자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감선은 전에 장탕과 충돌한 적이 있는 대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기회에 사건의 배후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장탕을 얽어 넣으려 했다. 그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이번에는 효문제의 능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승상 청책은 장탕과 같이 입궐하여 두 사람의 연대 책임으로 감독이 불충분한 데 대한 사과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탕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도 막상 어전에 들어가 고하게 되자 능을 경호하는 것은 승상의 책임이므로 자기는 관계가 없다고 발뺌을 하면서 사죄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승상이 혼자서 사죄했고 이에 무제는 어사대부 장탕에게 사건의 조사를 명했다. 장탕은 이 명령을 기화로 책임자인 승상을 옭아 넣으려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승상은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러자 승상의 부관들은 장탕을 원망하면서 어떻게든 장탕을 실각시킬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주매신은 "춘추"에 정통해 있었다. 일찍이 엄조가 그 점을 높이 사서 무제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원래 주매신은 "초사"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엄조와 함께 무제의 주목을 끌어 무제를 측근에서 섬기게 되었다. 그 무렵에 장탕은 아직 하급 관리였는데 주매신 등의 앞에 나오면 엎드려서 명령을 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장탕이 정위로 승진하면서 회남왕 사건을 담당하여 엄조를 실각시켰을 때 엄조의 은혜를 입고 있던 주매신은 마음속으로 장탕의 처사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 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 주매신도 회계군 태수에 발탁되었다가 몇 년 후 주매신은 법에 저촉되어 부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무렵에 어떤 일 때문에 주매신이 장탕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장탕은 의자에 몸을 뒤로 젖히고 앉은 채 부하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주매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주매신은 혈기 왕성한 초나라 사람으로 이런 대접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기회가 오면 장탕을 혼내 주려 벼르게 되었다. 또한 같은 부관 중 한 사람인 왕조는 법에 정통하고 우내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또 한 명의 부관인 변통도 유세술을 배웠고 남에게 자기 싫어했다.
이 세 사람은 모두가 전에는 장탕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부관으로 좌천되어 장탕 밑에 있었던 것이다. 장탕은 이 세 사람의 부관이 일찍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보란 듯이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던 세 사람은 상의 끝에 승상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장탕은 승상 어른과 같이 무제에게 사죄할 것을 약속했으면서도 어전에서 승상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즘에는 승상 어른께 죄를 씌우려 벼르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어른 대신 승상 지위에 오르려는 음모로 보입니다. 지금 그를 실각시키지 않으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어집니다. 실은 저희가 장탕을 실각시킬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승상은 즉각 관리에게 명하여 장탕의 죄를 알고 있는 전신 등을 잡아들여 취조했다. 그러자 전신은 이렇게 증언했다.
"장탕은 재정 문제에 대해 보고할 때는 미리 그 정보를 저희들에게 알려 주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물건을 매점해 놓았다가 값이 뛸 때 팔아서 이윤을 올리고는 그것을 장탕 대감과 반씩 나누었던 것입니다."
취조가 계속되는 동안 전신 등의 증언이 하나도 남김 없이 무제의 귀에 들어갔다. 궁금하던 무제가 직접 장탕에게 하문했다.
"재정 정책이 실시되기도 전에 상인들 귀에 들어가 물건을 매점한다 하니 계획을 밖에다 누설하는 자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탕은 직책상의 해명은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럴 수 있을 듯합니다."
죽어서 무죄를 증명하다
그 후 감선이 한술 더 떠서 알거에 관한 일을 무제에게 소상히 주상했다. 무제는 장탕이 이제껏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해 차례로 8명씩이나 검찰관을 보내어 죄상을 추궁했다. 그런데 장탕은 그때마다 증거를 제시하면 반론하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제는 장탕의 옛 동료였던 조우에게 취조를 명했다. 조우는 장탕을 나무랐다.
"너무도 최후가 더럽지 않은가. 자네가 일가 몰살의 판결을 내린 자가 얼마나 많은 지 생각이나 해 보게. 증거도 이미 충분할 만큼 갖춰져 있지만 폐하는 자네를 차마 처형하지 못하고 자결하기를 원하고 계시네. 이제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 게 좋겠네."
이에 장탕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황제에게 보내는 상주문을 썼다.
"장탕은 아무런 공도 없이 하급 관리의 몸으로 폐하의 은총을 입고 삼공에 이르렀습니다만,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죄는 억울하옵게도 세 명의 부관들이 날조한 것이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제가 장탕이 죽고 나서 유산을 조사시켜 보니 고작 5백 금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것도 모두 봉록이나 하사품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장탕의 형제와 자식들은 의논 끝에 장례만은 성대히 치르자고 했으나 모친이 반대했다.
"그 아이는 중신의 몸으로 불명예스러운 죄록으로 죽은 것이다. 성대한 장례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그 시체는 서민과 같이 허름한 관에 넣어 손수레로 운반되었다. 무제는 이 말을 듣고 감동했다.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장탕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무제는 다시금 철저한 조사를 한 끝에 세 사람의 부관이 무고했음을 밝혀내고 그들을 벌하여 주살했다. 승상 정책도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다. 무제는 장탕을 잃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는, 그의 아들 안세를 높은 자리에 앉혔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장탕은 지혜를 다해 황제의 뜻을 살피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맞추는 한편, 옳고 그른 것을 따져 옳은 것을 굳게 지켰다. 그래서 그로 인해 나라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장탕이 죽은 후 법망은 더욱 치밀해져서 관리들은 억지로 법을 냉혹하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정사가 차츰 쇠퇴해 갔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다만 실수없이 자리 지키기에 급급할 뿐 일체의 창조적인 논의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