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마읍에서 생긴 일
그 뒤 한무제는 즉위하자 흉노와의 화친책을 선명히 내걸고 흉노를 정중히 대접했다. 흉노와의 교역에도 힘을 들이고, 한나라 물자를 충분히 흉노에게 공급했다. 그러므로 흉노도 선우 이하 한나라와 친하지 않은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친책 뒤에서 한나라는 은밀히 흉노 토벌의 책략을 꾸며 마읍의 한 노인을 흉노 땅에 들여보냈다. 그는 밀수를 하면서 흉노와 친교를 맺고 교묘히 선우에게 근접하여 마읍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믿은 선우는 마읍의 풍부한 물자를 손에 넣고자 10만 기를 이끌고 침입했다. 이에 대해서 한나라는 마읍 근처에 30여 만의 대군을 미리 매복시켜 충분히 사전 준비를 갖추고 선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를 알 턱이 없는 선우는 마읍을 향해 단숨에 진군해 왔다. 그런데 마읍까지 백여 리를 남겨 놓았을 때였다. 평원 일대에 가축이 떼지어 있는데 그것을 망 보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도 안 보였다. 수상히 여긴 선우는 방향을 돌려 근처의 경비초소를 급습했다. 때마침 변경의 요새에서는 보초병 하나가 선우의 부대 움직임을 정찰하고 있었다. 한나라 군사의 책략을 알고 있었던 그는 선우에게 붙잡혀 칼로 위협을 받자 한나라의 잠복 사실을 모조리 불로 말았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었지."
선우는 놀라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즉각 군사를 요새 밖으로 퇴진시키면서 경비병에게 말했다.
"너를 잡은 것은 천운이라 할 것이다. 하늘이 네 입을 통해 알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왕으로 등용하여, '천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한편 한나라 군대는 선우가 마읍에 들어서자 각 군이 일제히 습격 할 작정이었으나 선우가 철수해 버렸으므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배신감을 느낀 흉노는 한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끊고 닥치는 대로 한나라 변형을 하기에 이르렀다.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 행위를 일삼는 사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만은 계속되었다. 흉노는 여전히 한나라의 물자를 탐냈으며 한나라 또한 교역을 통해서 흉노를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공격은 했지만
마읍 사건이 일어난 지 5년 후의 가을이다. 한나라는 위청, 공손하 , 공손오, 이광의 네 장군에게 각기 1만 기의 군사를 주어 교역장 주변의 흉노를 공격케 했다. 그러나 손실에 비해 전과는 미미한 것이었다. 다만 전과라 할 수 있는 것은 위청 장군이 상곡에서 출격하여 겨우 7백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정도였다. 공손하는 운중에서 출격하여 아무런 전과 없이 철수하고, 대 지방에서 출격한 공손오는 대패하여 7천여 명을 잃었으며, 안문으로 출격했던 이광도 흉노의 대군을 만나 참패를 당했다. 이광의 경우는 뒤에 탈출했다고는 하나 한때는 흉노에게 생포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공손오와 이광은 옥에 갇혀 속쇠금을 물고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같은 해 겨울, 흉노는 줄곧 한나라의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대해 한나라는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지방에 장군 한안국을 주둔시켜서 흉노에 대비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흉노도 잠잠했다. 그러나 다음해 가을에는 2만 기가 침입, 요서의 태수를 살해하고 2천 명을 포로로 데려갔다. 또한 어양 태수의 수비군 천여 명을 쳐부수고 장군 한안국의 군대도 포위했다.
한안국의 군대는 그때 천여 기에 불과하여 전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위기 일발에 연나라에서 구원군이 도착하여 흉노를 쫓음으로써 위기를 면했다. 그 후 흉노는 또다시 안문에 침입하여 천여 명을 살해, 약탈했다. 그리하여 한나라는 위청에게 3만 기를 주어 안문에서 출격하게 했다. 이때 머리를 벤 자와 포로를 합쳐서 수천의 전과를 올렸다. 위청 장군은 다음해에도 운중에서 흉노 토벌에 나섰다. 그는 서진하여 농서에 이르러서 오르도스에 진을 친 흉노의 누번왕, 백양왕을 공격하여 수급과 포로를 합쳐 수천, 소와 양을 백여만 마리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한나라는 오르도스를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하고 진나라 시대에 몽염이 구축했던 요새를 수복하고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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