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5)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두희는 문제의 황후로 조나라의 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원래 명문 집안 출신이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찍부터 궁중에 시녀로 뽑혀 들어가 여후를 섬기고 있었다. 얼마 후 여후는 궁중에 있는 여인들을 제후들에게 후궁으로 보냈는데, 두희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두희는 조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조나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저를 꼭 조나라에 보내 주시는 거죠?"
담당자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담당자는 막상 그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녀를 대나라로 가는 일행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 보고서가 그대로 여후에게 승인되었다. 그래서 두희는 할 수 없이 대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울며 불며 담당자를 원망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대나라는 북쪽의 오지로서 흉노와 국경을 맞댄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나라로 향했다. 대나라로 간 두희는 다행스럽게도 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런데 대나라 왕에게는 왕비가 있었고 그 사이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왕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왕비가 난 아들들도 이상스럽게 차례로 병이 들어 모두 죽고 말았다. 그 후 여후가 죽고 여씨 일족이 몰락하자, 중신들은 여씨를 싫어해 박희의 아들이었던 대나라 왕을 천자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대나라 왕이 황제로 즉위하여 몇 달 뒤에 태자를 정하게 되자 아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두희의 장남(후의 경제)이 태자로 뽑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두희는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그렇게도 가기 싫어했던 곳으로 가서, 결국 황후가 된 것이었다.
이산가족 상봉
두희에게는 소군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워낙 가난했었기 때문에 소군은 너댓 살 때 장사꾼에게 팔려 가야 했다. 소군은 그 뒤 10여 차례나 주인이 바뀌면 팔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양 땅에서 숯을 구으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그는 동려 백여 명과 함께 낭떠러지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벼랑이 무너졌다. 그래서 모두 압사당했으나, 오직 소군만이 요행히도 목숨을 건졌다. 소군이 무사히 살아간 뒤, 점을 쳐 보니 며칠 후에 제후가 된다는 점괘를 얻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소군은 이튿날 장안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그곳을 떠돌다 소문을 들으니 이번에 새로 즉위한 왕의 황후가 관진 출신으로 두시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혹시 어릴 적 헤어졌던 누나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는 어려서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 이름과 자기 성씨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옛날 누나와 뽕잎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두희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곧 소군을 불러 들였다. 여러 가지 확인해 보니 그의 대답은 상소문과 똑같았다. 황제가 물었다.
"혹시 다른 증거는 없는가?"
그러자 소군이 대답했다.
"누나가 나를 두고 장안으로 올라갈 때 주막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때 누나는 쌀뜨물을 얻어다 제 머리를 감겨 주고 밥을 얻어 먹여 주었습니다. 그러고나서 누나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을 듣자 두희는 자기 동생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뛰어가 동생을 얼싸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소군에게 집과 밭을 주고 또 후한 선물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덕망있는 학자들을 그와 사귀게 하였다. 하지만 소군은 결코 자랑하지도 않고 뽐내는 일 없이 겸손한 자세로 살아갔다. 그 후 소군은 제후로 임명되었다. 또한 두희의 사촌 형제인 두영은 용기있는 사람이었으며, 오초 7국의 난 때 진압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을 받고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 갔다. 한편 두희는 황제와 노자의 가르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들인 경제를 비롯해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황제나 노자의 글을 즐겨 읽게 되었다.
밀어 주려면 확실하게 밀어 주어라
두희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바로 경제와 양왕, 그리고 큰 딸이라는 의미의 장공주였다. 그런데 장공주는 출가한 후에도 자주 궁궐에 나타나 어머니 두희(두태후)와 함께 힘을 발휘하였다. 이때 경제는 할머니인 박희의 집안에서 박씨 여인을 맞아 황후로 삼고 있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박희가 죽자 바로 폐위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황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당시 경제에겐 모두 6명의 여자가 낳은 14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이로 보면 율희가 낳은 유영이 가장 큰 아들이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영은 태자가 되었다. 한편 경제의 누나인 장공주는 자기 딸을 외조카인 태자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태자의 어머니인 율희는 시누이인 장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공주가 경제에게 많은 미녀들을 추천해 붙여 주었고 그 미녀들은 율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율희는 장공주의 제의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 뒤부터 장공주는 올케인 율희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경제에게,
"율희는 후궁들을 만날 때마다 내시를 시켜 뒤에서 침을 뱉게 하고 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 같소."
라고 율희를 비방하는 등 기회만 있으면 율희를 헐뜯었다. 이에 경제도 점점 율희를 멀리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경제가 몸이 아파 앞날이 걱정되던 끝에 율희에게 상의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식들을 잘 부탁하오."
그러나 율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들까지 돌볼 수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경제는 매우 속이 상했다. 이때 장공주는 자기 딸을 왕부인의 외아들(뒤의 한무제)에게 시집보냈으며, 그래서 그녀는 왕부인과 짜고 율희를 어떻게든 쫓아내려 했다. 그 무렵 율희는 자기가 황후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경제에게 자주 말해 봤지만, 경제는 계속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부인은 공작을 꾸몄다. 즉, 시종관을 시켜 황제에게 율희를 황후로 맞아야 한다고 진언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시종관이 경제를 찾아 뵙고 말했다.
"아들이 귀하면 어머니도 귀한 법입니다. 지금 태자의 어머니가 아무런 작위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마땅히 황후로 맞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이 말을 들은 경제는 완전히 격노했다. 그리고는 바로 시종관을 투옥시키고 처형시켜 버렸다. 또한 태자까지 폐위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분을 참지 못한 율희는 마침내 자살해 버렸다. 그 뒤 왕부인이 황후가 되었고, 그 아들 철이 태자에 올랐다. 그리고 태자는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한나라를 전성시대로 이끈 무제였다.
여인의 치마폭에 둘러싸인 황제
한무제는 영걸스러운 황제였지만, 초기에는 주위의 여인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16세에 즉위한 무제에게는 우선 할머니인 두태후가 있었고 어머니 왕태후가 있었으며, 그리고 장모이면서 고모이기도 한 장공주도 있었다. 이들 모두 무제를 황제로 만든 일등 공신들이었다. 두태후는 노자에 심취해 유교를 선호하는 무제와 그를 둘러싼 신흥세력을 결사적으로 견제했다. 또한 두태후의 친족인 두영과 왕태후의 이복동생인 전분은 인척 관계를 이용해 마음대로 권세를 휘둘러 방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무제의 부인은 진황후였는데 바로 장공주의 딸로서 사촌간이었다. 그런데 진황후는 자기 어머니인 장공주가 무제의 즉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는 점을 항상 과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이른바 석녀였다. 설상가상으로 무제의 형제는 1남 3녀로 모두 여자 형제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무제는 온통 여자들에게만 포위되어 있는 셈이었다. 나이도 어린데. 이러한 무제를 가엾게 여긴 사람이 다름아닌 누나, 평양공주였다. 그녀는 출가했으면서도 무제와 잘 통했고 그래서 무제는 자주 그녀의 집에 놀러갔다. 평양공주도 그러한 무제를 위해 성대한 잔치도 베풀고 미녀들로 하여금 시중까지 들게 하였다.
어느 날 무제가 평양공주의 집에 들러 잔치를 벌였다. 그때도 역시 미녀들이 왔는데, 무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노래를 부르는 기회가 나왔는데, 무제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당시에는 귀인이 용변을 본 후에는 옷을 모두 갈아입어야 했다. 그래서 하인 한 명이 언제나 수행하도록 했다. 그 날 무제가 가희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안 평양공주는 그녀에게 그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변소라 하지만 공주의 집인지라 옷 갈아 입는 곳도 매우 넓었다. 어쨌든 그녀는 평양공주의 하녀로 위청의 누나였다. 그 뒤 위자부는 궁중에 들어가 아들을 낳고 드디어 아기를 못 낳는 진황후 대신 황후가 되었다.
진황후는 그 후 미도를 했다는 죄로 유폐되었다. 미도란 나무로 만든 인형을 땅 속에 묻어 특정 인물을 저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엄격한 법 적용으로 혹리로서 유명한 장탕이 심리했는데, 무제는 처형하는 대신 그녀를 유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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