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4) 여인 천하의 종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여후가 죽은 후, 하늘을 찌를 듯했던 여씨 일족의 권세도 차츰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여후가 죽었어도 여씨 일족이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켜 유씨네 한나라를 엎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기도 했다. 다만 유방이 생존했을 때 뒷일을 부탁했던 주발이나 관영 등의 용맹스런 장군들이 아직도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선뜻 일으키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때 유장이라는 제후가 있었는데, 20세밖에 안되었으나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여후는 그에게도 역시 여씨네 집안의 딸을 시집 보냈으나, 그 딸이 유장에게 여씨 일족의 음모를 낱낱이 폭로해 버렸다. 그러자 격분한 유장은 자기 형인 유양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번 기회에 여씨 일족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전해받은 유양은 즉시 군대를 일으키는 한편, 모든 제후들에게 여씨 토벌의 격문을 띄웠다. 한편 조정에서는 유씨 제후들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급보를 접하고 상국이던 여산은 관영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물리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관영은 군대를 이끌고 궁궐 밖으로 나와서 병사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지금 여시 일족은 방자하게도 천하의 권세를 쥐고 흔들고 있다. 이제 나는 역적 여씨 일족을 토벌하려고 하니, 그대들은 나를 따르라."
이에 병사들은 일제히 창과 칼을 높이 들고 환호하였다. 관영은 즉시 유양에게 사자를 보내 연합군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진평과 주발도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여록이 장군으로서 군대 지휘관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진평과 주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신인 역상의 아들 역기가 여록과 친했었다. 그래서 주발은 역상을 통해 역기에게 여록을 유인하도록 꾀를 냈다. 여록은 역기를 믿고 군대 본부를 나와 밖에서 놀았다. 이 틈에 주발이 군대 안으로 들어가 지휘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호통을 쳤다.
"장군이 군대를 버리다니, 이제 우리 집안은 망했구나."
그리고는 집안에 있는 모든 패물들을 마당에 내팽개쳤다.
"어차피 빼앗길텐데 이렇게 버리는 게 낫지."
과연 주발은 여록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자마자 전군을 소집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명령하였다.
"여씨에게 편들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에게 편들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벗어 유씨를 지지한다는 표시를 하였다.(이 일로부터 한쪽을 편드는 것을 좌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진평과 주발은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자 유장에게 병사를 주어 궁궐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상국 여산은 뜰을 거닐고 있다가 갑자기 기습을 받고 변소로 피했으나, 그곳까지 추격한 유장에게 목이 베어졌다. 유장은 계속 궁궐을 수식해 장락궁의 경호 책임자였던 여경시를 베었다. 이렇게 하여 여씨 일족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군사 지휘권을 주발에게 넘겨 주었던 여록도 칼에 맞아 죽었으며, 여수는 매를 맞고 죽었다. 그리고 여수가 낳은 번쾌의 아들 번항까지 살해되었다.
자리가 다르면 할 일도 다르다
여씨 일족이 멸망한 후 중신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가장 중요한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중신들은 모두 여씨 외척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거사에 공훈이 컸던 유장과 유양도 추천되었지만, 그들 역시 회가가 매우 음흉하다고 소문난 집안이었으므로 기각되었다. 결국 옛날 박희의 아들이 추천되었다.
"그분은 현재 살아 있는 유방 폐하의 친자식 중에서 최연장자이며, 외가인 박씨는 조촐한 집안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중신들의 의견은 일치되었고, 급히 사자를 보냈다. 박희의 아들은 거듭 사양했지만, 중신 일동은 두 차례나 권유했다. 드디어 박희의 아들이 할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문제이다.
승상이라는 자리
새로 즉위한 문제는 주발 장군이 여씨 토벌에 가장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를 제1의 공로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평은 그것을 알고 우승상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사직을 청원했다.
"그대는 이제까지 건강하더니, 갑자기 아프다며 사임하겠다니 무슨 이유요?"
문제가 진평에게 물었다.
"예, 황공스러운 말씀이오나 옛날 고조 때는 저의 공적이 주발을 앞섰었습니다. 그러나 여씨 토벌에는 주발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진평은 좌승상으로 임명해 제2위의 서열로 내려놓았다. 그 뒤 문제가 어느 날 주발에게 물었다.
"우승상, 재판은 전국적으로 몇 건쯤 있는가?"
그러자 주발의 얼굴빛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미처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국고는 연간 얼마나 되는가?"
"그것도 모르겠나이다. 죄송합니다."
주발은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러자 문제는 이번엔 진평에게 물었다. 하지만 진평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문제라면 각각 담당자에게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담당자라니 누굴 말하는가?"
"재판은 정위가 있사오며, 국고에 대해서는 치속내사가 있사옵니다."
"만사에 담당자가 있다면, 그대는 대체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가?"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모름지기 재상이라는 자리는 위로는 황제를 보좌하며 아래로는 모든 만물을 잘살게 할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바깥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와 제후들을 다스리고,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그 직책을 완수시키는 자리입니다."
문제가 그 말을 듣고는,
"정말 훌륭한 답변이오."
하면서 진평을 칭찬했다. 이에 주발을 더욱 부끄러워졌다. 이윽고 밖으로 나오자 주발이 진평에게 불평을 했다. 그러자 진평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우승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직책이 뭔지 몰랐단 말인가. 만일 폐하가 장안의 도난 건수를 물으시면, 그것까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주발은 자신이 진평을 따르지 못함을 재삼 깨달았다. 그 후 진평은 승상으로 재임용되어 2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옥리에게 목숨을 구걸한 장군
진평이 죽은 후 주발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0개월이 채 못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지금 제후들에게 각자 임명 지역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는데, 잘 지켜지지 않고 있소. 그러니 그대가 먼저 임명 지역으로 돌아가 모범을 보여줄 수 없겠소?"
주발은 할 수 없이 승상직을 사임하고 그의 임명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주발은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누가 자기를 주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스스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였으며, 손님들도 그런 상태로 맞았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주발은 급기야 반역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래서 주발은 옥리에게 넘겨져 취조받기 시작했다. 주발은 두려운 나머지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취조가 심해졌을 때 옥리에게 천금의 뇌물을 준 것이 효과를 보았다. 옥리가 조서 뒤에 '공주에게 증언을 시키라'고 써 준 것이다. 공주란 문제의 딸로서 주발의 큰며느리였다. 옥리가 주발에게 그 공주를 증인으로 세우라고 알려 준 것이었다. 마침내 공주가 증인으로 섰고, 그리하여 재판은 단번에 주발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문제도 주발의 조서를 읽고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발을 즉시 풀어 주었다. 감옥에서 나온 주발은 한탄하였다.
"일찍이 백만 대군을 이끌던 나였지만, 옥리 하나가 이렇게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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